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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을 듣다: 울타리 밖의 범속한 목소리들

<노년여성의 경험을 잇다> 노년들이 들려주는 생의 이야기


※ 노년여성을 만나 인터뷰해 온 여성들의 기록 “노년여성의 경험을 잇다” 연재의 마지막 기사입니다. 필자 김영옥 님은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okeesalon.org) 대표입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Feminist Journal ILDA


‘나이 든’ 사람들의 목소리에 특히 끌리는 이유

 

신비주의자들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천지만물을 비의가 새겨져 있는 텍스트로 보고 그 비밀스런 전언을 읽어내는 것이었다. 활자를 익힌 뒤로 꾸준히 무언가를 읽어온 내가 뒤늦게 발견하고 탐닉하게 된 텍스트는 목소리로 등장하는 사람이다. 처음 새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거리에서 발견하는 간판이란 간판은 모조리 소리 내어 읽게 되는 충동을 누구나 조금씩은 경험했을 것이다. 그때 자기 귀에 들려오는 자신의 그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래서 묘하게 이국적인’ 목/소리는 참 뿌듯하고 신기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 활자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나면 자신의 목소리에 동반된 ‘이국-이질적’ 아우라는 사라지고 범속한 사용의 차원이 우세해진다. 익숙함 다음에 오는 것은 눈으로 읽기다. 이 읽기는 그림이나 영화, 사진, 건축물 등 근본적으로 소리 내어 읽을 수 없는 기호들로 대상을 넓혀나간다. 나의 경우, 다른 이들이 지어낸 글들을 읽으면서 소설가가 되는 꿈을 품기도 했기에 은연중에 사람들의 생김새를 비롯해 얼굴표정이나 몸짓을 관찰하는 버릇도 함께 지속되었다. 세상에 지천으로 널린 게 보고 읽을 것들이니 죽을 때까지 심심할 일은 없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런 읽기는 부챗살처럼 넓게 펼쳐졌다 좁혀지고 그러다 다시 펼쳐지기를 반복하며 내 삶에 이런저런 영향을 끼쳐왔다.


▶ 타지마 요꼬. 70대 중반. 대학에서 은퇴 후 ‘샹송가수’가 되어 콘서트를 열고 있는 모습. 일본 노년들에게 인기인 샹송 부르기는 샹송을 일본어로 개안해 부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활자나 이미지만큼, 아니 종종 그보다 더 흥미와 관심을 자극하는 것이 따로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건 다른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이미지로 읽던 것과는 매우 다른 지각경험이었다.

 

결여는 집중과 몰입을 낳는 것인가. 나 자신의 목소리에 결여가 생기면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몰입해서 ‘빨아들이게’ 되었다. 성대가 나빠지면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더니 그 다음에는 고음을 내거나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게 불가능해지고 (고함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야에서 벗어난 반려견을 불러 세우지 못할 때는 정말이지 불편했다. ㅜㅜ) 결국에는 겨우겨우 낮은 목소리로 일정량의 목소리만 사용 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잦아드는 내 자신의 목소리에 비례해서 더 잘 들리고 더 잘 스미는 타인의 목소리. 내 귀는 안테나처럼 스르르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향해 방향을 조절하고 그 엄연한 현전의 차이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때론 찰떡처럼 찰진 목소리, 때론 이름 모를 어떤 풀로 만든 피리처럼 가늘고 높은 목소리, 때론 적당히 굵고 둥근 나무 기둥 같은 목소리, 때론 하루 종일 말해도 (물론 들어도) 지치지 않을 것처럼 편안하고 고른 목소리, 때론 미세먼지를 머금은 바람결 같은 목소리 ... 목소리들은 다르고 독특했다. 지각 가능한 물질로서의 목소리는 내용과 무관하게 이미 어떤 형상이었고 신호였다.

 

바로 곁에서 혹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어떤 다른 장소로 나를 데려가는 느낌을 주었고, 그 느낌은 우연이거나 착각이 아니라 착근감이 확실한 호기심을 생성시켰다. 내용과 얽히지 않고도 신호를 보내고 움직임을 유발하는 목소리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리듬을 따라 흐르는 노래를 닮았다. 그렇게 목소리의 물질성에서 촉발된 나의 즐거운 듣기는 점차 그 목소리가 전하는 내용에도 이끌리기 시작했다. 물론 목소리의 온전한 소리 측면과 내용 측면을 구분 짓는 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시소의 양쪽은 오르락내리락 하기에 말이다.

 

노년들이 열어주는 인생의 정원에 들어서다

 

▶ 김사례. 80대 후반. 밀양 평밭마을에서 움막을 지키던 그녀는 지르박 추는 걸 제일 좋아한다. 김사례 할매의 얼굴 가득 물결치는 주름은 그 자체로 인생의 범속한 진실을 담고 있다.


사람-책은 활자/이미지로 엮인 책이 갖고 있지 않는 감각을 담고 있어 끌어당기는 힘의 성격이 매우 독창적이다. 사람들의 입안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고 언젠가 한 치과의사 지인이 말한 적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목소리에 내용이 섞여드니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쏠리거나 끌려드는 나의 감응이 사뭇 달라진다.

 

‘나이 든’ 사람들이 들려주는 살아온 이야기에 특히 끌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목소리-이야기는 그냥 평온하게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듣고 즐길) 때와는 다른 움직임의 진폭을 낳는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재연할 때 나는 특히 ‘주장하지 않는’ 목소리의 수행이 좋았다.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임(being self)’인 목소리가 좋았다. 나이든 사람들의 목소리-이야기는 묘한 비-속도 혹은 반-속도를 지각케 한다는 사실 또한 내게는 중요하다. 이 말은 이들에게는 더 이상 속도를 내서 도달할 곳이 없다거나, 이들은 이제 시장 메커니즘이 요구하는 속도전이나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가져온 시간의 압축 현상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물론 나이 든 사람들이 처한 이러한 정황은 오십대 중반을 넘어선 이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 특유의 근대국가건설 양식인 ‘빨리빨리’의 효율 중심 규범성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던 내게 어떤 우려와 해방감을 동시에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장하지 않으면서 자기로서 제 정원에 머무는 사람의 비-속도감이라고나 할까. 내게 위로를 주고 나를 잡아끈 이들의 목소리-이야기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 다른 시간의 멜로디라고나 할까. 멜로디를 타고 흐르다 보면 문득문득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처럼 여러 시간들이 갈라져 나오는 인생의 정원에 들어선 것 같기도 했다. 미로의 정원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길이 갈라질 때마다 계속 왼편으로 꺾어 들라고 보르헤스는 조언한다.

 

노년들이 열어주는 인생의 정원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목소리의 리듬을 잘 타면 된다. 갑자기 다른 시간이 튀어 나와도, 두 세 시간들이 겹치고 응축되어도, 어떤 시간으로 고집스레 되돌아와도 그 목소리의 멜로디를 믿고 계속 가야 한다. 계속 왼쪽 길로 접어드는 것, 이것은 ‘시간은 하나’라는 미욱한 계몽주의나 세속주의를 벗어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미로의 정원에서는 미로 자체가 곧 길이며, 그 외에 다른 길이란 없다는 신비주의 가르침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터져 나오는 웃음과 조용한 급진성으로 시간정원의 미로를 걷는 사람들.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노년들 개개인의 구체적이고 범속한 삶들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들이 들려준 여러 이야기의 갈래들, 시도하고 성공 또는 좌절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함께였다가 혼자고 혼자이다가 다시 함께인 그 생의 갈래들은, 듣고 들은 것을 풀고 푼 것을 다시 쓰고 쓴 것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서랍 속에 넣어 둔 것을 꺼내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내게 계속 왼쪽으로 난 길을 열어주었기에.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울리는 은근한 전언

 

어느 연령대부터 ‘나이 들었다’고 표현할지는 불분명하지만, 나이 든 (또는 적어도 ‘나이 들고 있음’을 중요한 자기 인식으로 삼는) 이들은 자신이 깃들어 살고 있는 집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와 같다(고 나는 종종 느낀다). 스스로가 존재의 집이 되었다고나 할까. 이 말은 은유이지만 내게 이 말의 울림은 은유 이상의 어떤 실재성을 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이야기를 듣다 보면 규범의 문/법에서 느슨하게 풀려나온 올들이 얽어내는 망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할머니(라 부름직한 연령대 여성)들의 목소리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그것이 몇 시간이고 홀로 하는 산책의 즐거움이든, 70대에 열심히 배워 콘서트까지 여는 샹송가수 되기든, 13세에 이미 알아버린 운명적인 자기 직업이든, 70세가 넘은 지금 15세 때 경험한 첫 사랑을 시작으로 하는 자서전을 쓸 계획인데, 그 첫 사랑을 당시 유행하던 그래서 흠뻑 빠져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본 따 제롬이라고 부르려 한다는 것이든, 모두 다 규범의 문/법에 덧대어, 그 옆에서 새로운 거미의 망들을 짜고 있었다. 이 망들은 이들의 몸이면서 집이면서 언어이면서 문지방이기도 하다. (이 느낌은 특히 밀양 할매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강했다.)

 

▶ 윤석남. 이미 13세에 자신이 화가가 될 것임을 알게 된 그녀는 70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도 시간을 달리며 형상화에 몰두하고 있다.

 

토니 모리슨은 1993년 60대 초반에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오래 된 구비 전승 이야기로 자신의 수상연설을 시작한다. 앞을 보지 못하지만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알려져 있는 노파가 있었다. 그녀가 받고 있는 존경, 그녀가 누리는 경외심은 그녀의 이웃을 뛰어넘어 아주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 어느 날 젊은이 몇 명이 노파를 찾아와 자신들의 손 안에 있는 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 맞춰보라고 몰아댄다.

 

오랜 침묵 끝에 노파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잘 모르겠네. 자네가 들고 있는 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지만 그 새가 지금 자네 손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그 새는 지금 자네 손에 놓여 있네.” 이야기의 전승된 방식대로라면 노파는 도발적으로 질문하는 바로 그 청년들의 손에 그 연약한 새의 생사 여부가 달려있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개인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약자의 생명을 ‘갖고 노는’ 무책임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이 노파가 전해주는 ‘지혜’이리라.

 

그러나 토니 모리슨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간다. 작가인 자신은 그 새를 ‘언어’로 해석하기로 한다고, 그리고 이때 언어는 체계인 동시에 살아있는 무엇일 뿐 아니라, 결과를 품고 있는 행위성이기도 하다고.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연설을 이어간다. 연설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이렇게 추측한다. 어쩌면 그 젊은이들은 노파의 천리안을 논박하고 그녀가 사기꾼임을 폭로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청년들은 사실 새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만을 갖고 노파에게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인생을 살만큼 살고 죽음을 직면해본 나이 많고 현명한 사람인 노파에게 혹시 그들은 새의 이야기를 빌어 “인생이 무엇인지 죽음이란 또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건 아니겠냐고.

 

그러나 토니 모리슨은 이번에도 노파에게 침묵을 지키게 한다. 마침내 노파가 침묵을 깨뜨리고 말한다. “이제 난 자네들을 믿겠네. 자네들 손에 들어 있지 않은 새를 이제 안심하고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자네들이 정말로 그 새를 잡았으니까. 자, 보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함께 만든 이것이 말일세.”

 

동일한 연설문에서 토니 모리슨은 ‘죽음은 삶의 의미다. 그러나 언어는 삶의 척도다’라고 말한다. 보다 젊은 사람들은 보다 늙은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듣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계이며, 살아있는 새이며, 결과를 낳은 행위성인 언어를 벗어난 삶과 죽음의 의미는 없다. 여기서 핵심은 살아있는 새의 ‘살아있음’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삶의 의미, ‘언어’는 삶의 척도이기에

 

노년들이 들려주는 생의 이야기-언어는 이 상관관계를 매우 다른 지점에서 성찰하게 돕는다. 이들 생의 이야기는 의미체계의 울타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혹은 그 울타리의 경계 위에서 의미다. 꼭 엄청난 사건을 담고 있을 필요도 없으며, 뛰어난 이론의 해석을 동반하지 않아도 된다.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얼굴이 자체로 사건이며, 목소리가 발화되는 몸이 자체로 해석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새를 박제시키거나 새장에 가두거나 날개를 잘라버리거나 성대를 절제시켜버리는 일, ‘이질적인’ 새의 목/소리를 익숙한 단일 코드로 등록시켜버리는 일 – 이 모든 규범언어체계의 모순을, 노년들의 목소리-이야기는, 직시하게 돕는다. 그렇다, 그들은 죽음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기에. 내가 죽음과 친해져보니까 실재란 그대들이 보고 안다고 믿으며 벌벌 떠는 것과는 다르더라. 노년들의 목소리-이야기에서 울리는 은근한 이 전언, 비의면서 범속인 이 전언을 자주 들으려 한다. 늙어가는 여자로서, 삶의 척도인 언어와 삶의 의미인 죽음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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