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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쌍해보이나요?

<홍승은의 질문교차로 인문학카페36.5º> 글을 쓰는 이유

 


나의 경험이 ‘자극적인 사연’으로 이야기될 때

 

글을 쓰는 게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나둘 기억을 꺼내다보면, 29년 동안 내가 가해온 폭력과 당했던 폭력이 빈 종이에 가득 찬다. 겪었던 일을 조각조각 모아놓으면 내가 봐도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게 정말 내가 다 겪었던 일인가? 다 공개해도 되는 걸까? 내가 너무 우울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말하고 싶은 나와 망설이는 나 사이에서 타협해가며 간신히 글을 추리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염려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런 일을 겪다니…불쌍하다”, “막장이네”, “글로 쓰는 용기가 대단하다.” 언뜻 달라 보이는 반응 속에는 내가 ‘유별나게 불쌍한 여성’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있다. 그런 다양한 시선 속에서 나는 타자화되어 고립된다.

 

최근 <일다>에 실린 데이트 성폭력 관련 글에는 이런 댓글도 달렸다. “너무 자극적인 이야기라 보는 이에 따라서는 글쓴이를 다시 보게 하는군요. 물론 생각이 전부 다르겠지만 꼭 적나라하게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에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재의 빈곤 때문 아닌가봅니다.”

 

글 쓸 소재가 없어서 자극적인 데이트 폭력 경험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 같다는 댓글 내용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화가 났는데, 이유는 악플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자극적인 사연’이 꽤나 ‘일상적인 일’이라는 걸, 아마 그 사람은 상상도 못할 거라는 점에서 불현듯 화가 났다.

 

우리는 더 이상 장밋빛 미래를 얘기하지 않는다

 

▶  나   ⓒ 홍승은


며칠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영화나 소설보다 더 허구 같은 이야기가 각자의 삶 속에서 술술 나왔다.

 

내 친구의 어머니는 결혼 초부터 20년 넘게 식당일을 하면서 친구와 동생을 키웠다. 집에만 있으면서도 가사노동에 털 끝 하나 손대지 않았던 아버지는 평생 이중 노동으로 고생한 어머니에게 자주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다른 지역에서 한 여성과 살림을 차렸다. 상대 여성은 남편과 사별한 상태이고 20대 아들이 둘 있는데, 그 지역에서 아버지는 무척 자상한 남자라고 소문이 났다고 한다.

 

친구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지 않고, 일주일에 며칠은 어머니에게 와서 지낸다. 한 번은 어머니가 힘들다고 아버지에게 따지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퇴원한 어머니는 깊은 절망감에 죽으려고 농약을 마셨다. 다행히 깨어났지만, 친구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냥 죽지 그랬느냐”며 여전히 폭력을 반복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친구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지 못한다. 일과 일상 모든 것이 어머니의 노동으로 이뤄져있지만, 남편이 없는 삶을 상상해보지 못한 어머니는 그래도 아버지가 있어야한다며 폭력을 견디고 있다.

 

다른 친구의 이야기. 그 친구의 언니는 스무 살에 결혼했다.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언니는 성인이 되자마자 도피하듯 결혼했다고 한다. 결혼 12년 차, 30대 초반인 언니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결혼할 때부터 언니를 무시하고 언어폭력을 일삼았던 형부는 사업을 핑계로 언니 앞으로 몇 억의 빚을 졌다. 언니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집안일 모두를 도맡으며 남편 일도 도왔다.

 

얼마 전 형부는 언니에게 더는 너랑 같이 못 살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돈 한 푼 남기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시부모님은 오히려 언니를 탓했고, 언니는 자신 앞에 놓인 빚과 아이들 때문에 당장 어쩌지 못하고 시부모님을 모시며 살고 있다. 최근에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시내를 활보하며 데이트하고 있는 모습이 목격됐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은 ‘애들이 불쌍하다’며, 언니에게 어떻게든 참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타이른다고.

 

또 다른 이야기. 한 친구는 남자친구와 합의하에 섹스를 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함께 영상을 본 뒤에 그 자리에서 바로 지웠는데, 어느 날 우연히 남자의 핸드폰에서 동영상을 발견했다. 남자가 동영상을 N드라이브와 연동시키는 설정을 해뒀던 것이다. 친구가 동영상을 지우려고 하자 남자가 정색하며 지우지 못하게 했다. 친구가 완강하게 따져서 지우긴 했지만, 그 사람과 헤어진 뒤로도 친구는 자신의 동영상이 어디엔가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걱정하고 있다.

 

다음, 그 다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말하는 이와 듣는 나조차 헷갈렸다. 이게 정말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가? 장밋빛 미래, 연애, 결혼을 꿈꾸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친구들과의 시간은 이미 옛 일이 됐다. 술잔을 기울이다가 한 친구가 말했다. “막장 드라마 보면서 욕했었는데, 현실이 더 막장이다 정말.”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세계는 현실일까, 영화일까, 소설일까. 혹은 모두 거짓일까.

 

당신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최근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이언희 연출, 엄지원 공효진 주연)를 봤다. 영화 속 두 여자주인공이 겪는 사회적 고립, 차별, 폭력을 보며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폭력을 참고 사는 어머니, 남편과 시댁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언니, 수치와 상처를 안고 사는 친구들과 나의 모습이 스쳐갔다. 왜 우리는 영화보다 더한 일상을 살고 있을까. 의문이 들자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실컷 울고 영화관을 나서는데, 뒤에 있는 커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너무 막장 아니야?” “그러게. 너무 스토리가 그렇다. 이런 영화보고 우는 사람도 있더라.” 순간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요, 이거 정말 현실적인 영화인데요. 현실이 훨씬 더 막장인데요. 제 친구의 어머니는요…”

 

어떻게 해야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타인의 삶에 공감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소재가 자극적으로 보이면 특수하거나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같아서 글쓰기가 망설여진다. 그렇지만 내 삶은 내가 써왔던 글보다 더 ‘자극적인 것’뿐인걸. 내 글이 편지처럼 누군가의 일상에 닿길 원하지만, 종종 보기 좋은(혹은 경각심용으로) 액자로 전시된다. ‘어느 안타까운 사연’으로 동정과 냉소 사이에 존재한다. 그런 때면 홀로 허공에 외치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내게 “좀 밝은 글도 써봐”라고 말한다. 당연하게도 내 삶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밝고, 가볍고,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있고, 사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내가 고통의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고통을 외면한 희망의 언어보다, 고통을 응시하는 정직한 절망의 언어가 나를 살아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적어도 스스로를 외면하지는 않으니까. 가끔씩 내 글이 누군가의 삶에 당도했다는 기별이 돌아오기도 하니까. 그 속에서 나는 뜨거운 위로와 위안을 느낀다.

 

한 남성이 내게 말했다. “저는 승은 씨 글에서 나오는 사례들이 설마 실제로 있는 일일까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지어낸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자주 가는 카페에 앉아서 가만히 주위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까 정말 그럴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쉽게 타인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다행히 그는 나를 통해서 처음 느꼈던 낯선 세계가 자신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때면 용기를 내서 글을 쓰길 잘 했구나 싶다.

 

나는 앞으로도 절망을 응시하고 싶다. 그 절망을 글로 옮기고 싶다. 매번 나의 글은 다짐으로 끝났지만, 이번만은 바라는 점이 있다. 나를 불쌍하게 보지 말아 달라. 나는 불쌍하지 않다. 나는 당신과 다르지 않다. 당신과 나 사이,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느껴 달라. 그 일을 함께 책임져 달라.

 

“프리모 레비는 평생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 사이의 간극에 시달렸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그 비극을 경험하지 않은 ‘특권’을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하는 배려와 관용. 나는 이 부정의를 참을 수 없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고통, 폭력, 슬픔이 연구되기 어려운 이유라고 생각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이 언어화될 때만이 우리는 위로 받을 수 있다. 내 고통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인식만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중에서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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