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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의 ‘어쩌다 빛’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글의 후반부에 들어가며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feminist journal 일다 ILDA

 

장면 1.

 

겨울 들판에 찌르레기가 난다. 수십 마리가 공중 쇼를 하듯 위로 솟구치다가 갑자기 선회한다. 사십오도 각도로 비스듬한 급 하강! 순간 새들의 하얀 배가 햇살에 투명하게 ‘화들짝’ 드러난다. 아, 아, 눈이 부시다.

 

“챠르르, 챠르르..”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쌀 씻는 소리’로 노래하며 찌르레기들은 겨울 들판을 난다. 새들이 선회하는 방향을 따라 내 몸도 기운다. 내 몸 안에서도 ‘챠르르 챠르르’, 경쾌한 쌀 씻는 소리가 환하게 들린다.

 

▶ 황량하고 너른 겨울의 들판.  ⓒ김혜련

 

장면 2.

 

“고라니다!!!~”

 

갑자기 논 한 가운데서 고라니 한 마리가 껑충 솟아오른다. 푸른 지평선이 일시에 출렁인다. 여름 한낮, 벼들 가득한 들판. 벼가 자라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하다. 그 빽빽한 고요를 뚫고 고라니가 뛴다.

 

고라니가 포물선을 그리듯 두 다리를 허공에 딛고 튀어 오를 때, 대기는 폭발할 듯 튕겨져 나온다. 내 몸에서도 순간 폭발할 것 같은 생기가 함께 터진다. 고라니의 엉덩이와 뒷다리의 발달된 근육이 땅을 박차고 몸을 허공으로 떠오르게 하듯, 내 갈비뼈 어딘가가 근질거리다 허파를 박차고 터져 나오는 커다란 숨소리. 고라니는 들판을 달리고 나는 소리 내어 웃는다. 고라니와 내 몸은 순간 하나다!

 

장면 3.

 

며칠 비운 집 뜰이 썰렁하다. 뒤뜰에 가득 피어있던 봉선화들이 다 사라졌다.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수런수런 피어나 여름 뜰을 붉게 밝히던 꽃들은 없다. 잎들도 거의 사라졌다. 가슴이 철렁하다.

 

‘누군가 담을 넘어 와 꽃을 따 갔구나.’

 

불안이 얼룩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담이 너무 낮아, 좀 더 높게 쌓아야 해. 더 큰 일이 나기 전에 해야지, 시골에서 혼자 사는 여자들, 흉한 일 당하는 경우 많잖아. 아, 아, 무서워…’

 

피해의식과 공포는 천리만리를 달린다.

 

잠시 후 앞뜰의 봉선화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줄기만 남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검은 줄무늬의 커다란 벌레가 봉선화를 갉아 먹고 있다. 호랑나비 애벌레다.

 

비로소 제 정신이 든다. 방금 전의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황당한 것인지 깨닫는다. 어느 누가 봉선화를 따러 남의 담장을 넘어 온단 말인가?

 

장면 4.

 

저녁 때 하늘(개 이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늘 그렇듯 밖에만 나가면 제멋대로 달아나려 한다.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는데도 밖에만 나가면 거의 광(狂)적이다. 이런 하늘이는 내가 원하는 ‘사랑스런’ 하늘이가 아니다.

 

“천천히 가자~”

“헥헥헥 헥헥헥…”

 

“천 천 히 가 자~” (다섯 번째 하는 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헥헥헥헥 헥헥헥헥…”(더 헥헥대며 달아나려 한다.)

 

헥헥거리며 자꾸 달아나려고 하는 하늘이의 모습을 오늘 따라 유난히 참아주기 힘들다. 내 안에서 전자동으로 튀어 나오는 것들이 있다. “개 주제에 왜 날 무시하는 거야?” 낮은 자존감, “확 걷어 차 버리고 싶어!” 낮은 자존감의 다른 자매(姉妹), 분노!

 

하늘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내가 보이는 반응이다. 하늘이를 대하는 나를 보면, 내가 나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들이 왜 내 안에 있는지를 아는 것과 그것들이 사라지는 일은 다른 일이다. 나는 여전히 나와 타 생명에게 이런 마음을 낸다. 씁쓸히, 아주 씁쓸히 그런 나를 본다.

 

▶ 봄 냉이 밭의 하늘이.  ⓒ김혜련

 

내 삶은 ‘어쩌다 햇살’일 뿐

 

장면 1, 2의 나는 살아있다. 생명의 빛으로 환하다. 전원생활의 아름다움이나 자연과의 합일을 보여주는 근사한 이미지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뭔가 다 이룬 자의 모습 같기도 하다.

 

장면 3, 4의 나는 평생 그래왔듯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겁쟁이 ‘벌벌이’이자, 분노에 차 있는 ‘깡패’다. 이런 내게 평화는 멀다. 여전히 나는 세상을 믿지 못하고 나를 믿지 못한다.

 

둘 다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지 십년쯤 된 나의 모습이다. 장면 5, 6, 7… 다양한 내가 있을 것이다. 그 중 그럴 듯한 장면 1, 2류만 쓰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평생 살아온 습관과 생활양식을 바꾸는 일은 긴장과 오류의 연속이다. 그러다 어쩌다 빛 한 줄기 들어온다. 그 ‘어쩌다 빛’에 초점을 맞추면 마치 삶 전체가 빛인 것 같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기나긴 장마철에 어쩌다 햇빛도 난 날이 있는 것이다.

 

나는 평생 자기초월을 꿈꾼 사람답게 여전히 자기초월을 위해 애쓴다. 다만 그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젊은 시절, 그 초월이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여겼다면 이제는 ‘지금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 밖이 아닌, 여기 일상 안에서의 내재적 초월을 꿈꾼다.

 

그러니 내 삶은 다 이루고, 쉬고 있는 자의 평화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삶 속에서 언제나 자신과 직면하는 내적 긴장이 팽팽히 있다.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 그럴 것이다. 난 그런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강박적 자기추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어진 삶, 다가오는 삶을 부지런히 살려고 할 뿐이다. 이를테면 ‘즐거운 밥하기’는 부지런히 쌓아가야 하는 일이 되었지, 반드시 이루어야할 강박적 추구가 아니다.

 

몸 돌보기 또한 온갖 건강서를 뒤지고 의학 지식을 찾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 몸과 더불어 있는 일이 되었다. 아픈 몸과 함께 잘 지내는 법을 터득하고 때로는 아픔을 그저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되었다. 집을 가꾸거나 농작물을 돌보거나 어떤 일을 하든 마찬가지다.

 

장면 1, 2도 장면 3, 4도 장면 5, 6, 7…도 다 나다. 아마도 집과 자연의 경이와 아름다움들은 장면 1, 2류가 될 것이다. 몸과 밥, 마음에 관한 글들은 장면 3, 4류에 속할 것이다. 장면 1, 2는 스스로 고무될 것이고, 장면 3, 4는 지리멸렬할 것이다.

 

글이라는 속성상 아마도 장면 1, 2류가 더 많이 드러날 것이다. 지리멸렬한 장면 3, 4류를 계속 쓰기는 쉽지 않다. 내 삶은 ‘어쩌다 햇살’일 뿐이다. 그 햇살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글을 쓰겠지만, 그것이 ‘어쩌다 빛’이라는 것만은 밝히고 싶다.

 

▶ 여름 뒤뜰의 봉선화.  ⓒ김혜련

 

그 빛은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창조’된다

 

그러나 장마철에 ‘어쩌다 햇살’은 잠깐 반짝이다 사라지는, 허망한 순간은 아니다. 그 빛이 실은 장마철을 뚫고 나가는 힘이 된다.

 

빛은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찌르레기의 군무(群舞)를 보기 위해서는 겨울의 들판을 매일 걸어야 한다. 찌르레기는 여름새지만 번식기가 끝난 겨울에서 봄까지는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그 모습은 시인이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고 노래할 만큼 신비롭다. (장석남의 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춥고 황량한 겨울 들판을 일정한 시간 매일 걸어서, 어느 날엔가 찌르레기 무리를 만나게 된다. ‘챠르르 챠르르’ 쌀 씻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환한 가슴살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내 몸에서 피어나는 햇살!

 

빛은 그렇게 ‘창조’된다. 매일 걷는다는 ‘아무 것도 아닌’ 반복적 행위가 없으면 빛도 없다.

 

앞으로의 글이 ‘아무 것도 아닌’ 세계가 어떻게 빛을 창조하는지, 그 과정을 섬세하게 보일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다 빛’을 기린다.  (김혜련)  feminist journal 일다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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