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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지니에 반대하는 행진은 계속된다!

<페미니스트 뉴욕에 가다>⑤ 역사적인 미국 대선의 날



미국 대선 날짜에 맞춰서 뉴욕 여행 계획을 잡았던 건 아닌데, 역사의 순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날, 나는 뉴욕에 있었다. 이런 기회가 여행객에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미국 대선의 날은 여행 기간 중 가장 기대하고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뉴욕 레즈비언 클럽에서 대선 결과를 지켜보다

 

사실 난 대선이 있기 이틀 전인 일요일, ‘스톤월 인’(The stone wall Inn) 앞에서 진행되었던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행진’(March against Misogyny)에 참석했었다. 대선 기간 동안 도널드 트럼프의 미소지니(여성혐오) 언행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모여 발언을 하고 거리 행진을 하는 시위였다.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그리고 남성들)이 참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여성이긴 했지만 말이다.


▶ 대선 전, 미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상징적 장소 ‘스톤월 인’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여성혐오 언행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주연

 

도널드 트럼프에 반대하는 발언들이 이어지고 시 낭독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레즈비언 한 분이 발언했던 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내가 울고 있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하냐고,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너무 무섭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널드 트럼프가 하는 말들을 우리 아이들이 듣고 있습니다. 이제 혐오를 멈춰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난 그 곳에서 여성들의 분노를 보았다. “I’m with her”(힐러리와 함께 한다는 의미로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들이 내세웠던 구호)라고 외치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대선 결과에 더욱 더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토론에서 힐러리에게 “지독한 여자”(Nasty Woman)라고 한 것에 대해, 많은 여성들이 “나도 지독한 여자다!”라는 해쉬태그를 SNS에서 달았다.) 대선 투표의 날, 길거리에서 ‘I voted’(투표했어요)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스티커 옆에 “I’m with her” 뱃지를 함께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터넷에선 투표를 마친 여성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서, 수잔 비 앤서니(Susan B. Anthony. 1820년에 태어난 수잔은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미국 여성운동의 대표 주자이다. 그녀는 여성의 투표가 불가능했던 1872년 뉴욕 로체스터에서 투표를 하다가 구속되었다)의 참정권 운동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무덤 비석에 ‘I voted’ 스티커를 붙이는 장면이 뉴스 클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의 기분은 더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결정되는 순간을 내가 보겠구나! 라는 흥분으로 말이다. 전날 바에서 만난 사람이랑 이야기 했을 때도 뉴요커들은 당연히 힐러리가 당선될 거라고 생각한다며, 걱정 없다는 말까지 들었던 터였다. 대선 결과를 어디서 봐야 이 역사의 순간을 최고조로 즐길 수 있을까 싶어서, 주변의 바(bar) 정보에 대한 인터넷 검색까지 하고 있었다.

 

최종 선택한 곳은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레즈비언 클럽이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면 순간인데, 여성들과 함께 결과를 지켜보는 게 최고 아니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뉴욕 투표는 저녁 8시에 마감이라고 하고 대략적인 결과는 밤 11시-12시 사이에 결정이 된다고 들었던 터라, 저녁 8시 즈음 클럽으로 갔다.

 

사람들이 아직 엄청 많은 건 아니었지만 언론사처럼 보이는 카메라와 리포터도 나와 있었고 다들 즐겁게 술을 마시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커플이 하얀 슈트를 차려 입고, 힐러리 지지 뱃지를 달고 서로의 손을 잡고 티비를 보고 있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었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사람들이 늘어났고, 다들 즐거운 표정으로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종종 뉴스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트럼프 당선, 절망의 눈물을 함께 흘린 사람들

 

그런 분위기가 반전된 건 플로리다, 오하이오, 위스콘신, 버지니아, 미시건 등의 스윙 스테이트(미국의 주들은 대부분 민주당, 공화당 성향이 뚜렷한데, 그 성향이 뚜렷하지 않은 주를 스윙 스테이트라고 부른다. 이 주의 결과가 대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에서 트럼프가 투표수가 높게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각자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졌고 담배를 피러 나가는 수가 많아졌다. 바텐더가 욕을 하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점점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인단 확보 수자가 올라갔다.

 

(※ 미국의 투표 제도는 한국과 달리 직접 선거가 아니라 선거인단을 결정하는 선거를 한다. 그리고 그 선거인단은 승자 독식제를 통해 확정이 된다. 예를 들어 플로리다의 선거인단 수는 29명인데, 이번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49%의 지지율을 얻고 힐러리 클린턴이 47%의 지지율을 얻었다. 불과 2%의 차이지만, 29명의 표를 49:47로 나눠서 가져간 게 아니라 모조리 도널드 트럼프가 가져가게 되는 방식이다.)

 

▶ 마국 대선 기간에 종종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힐러리 지지 문구. 내가 미국 대선에 관심을 가진 것은 힐러리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의 여성/소수자 혐오가 용인되는 사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주연

 

승리는 확정짓는 27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확보한 선거인단이 240명을 넘기는 순간, 아 게임은 끝났구나 라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는데, 아직도 그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절망 이상의 단어를 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티비에선 중년 백인 남성들이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캠프의 모습과 젊은 여성, 유색인종, 엄마와 아이 등이 모여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어깨에 기대 울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캠프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 괴로워졌기 때문이다. 맥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와서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쉽게 잠을 들 수도 없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혹시라도 상황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라는 헛된 꿈을 가지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으로 뉴스부터 확인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내가 미국 대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힐러리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대선 기간 동안 도널드 트럼프가 보여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혐오와 그것이 용인되는 사회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이 1월 초,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공로상 수상 소감으로 이야기했던, 장애인 기자를 흉내 내는 권력 일인자와 그것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사회가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인가’ 라는 의문과 두려움을 안고서 미국 대선에 관심을 가졌던 건데, 결과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여성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졌다가 아니라, 모두가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의 존재가 지워질 것 같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서 정말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멍하게 있다가 힐러리가 선거 결과에 대한 연설을 한다길래 숙소 로비에 있는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연설을 들으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자신은 실패했지만 누군가, 곧 이 단단한 유리천장을 깰 것이니까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그 모습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눈물은 분명 희망보다 절망의 감정에서 오는 눈물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결과 분석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힐러리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졌다, 그녀가 기득권이었기 때문에 졌다, 버니 샌더스가 아니어서 (민주당이) 졌다 등등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이긴 적절한 이유를 찾기 너무 어려웠고,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희망은 우리들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미국 대선 결과,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목격하고 있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여성과 소수자 혐오로 지쳐있던 나에게,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의문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힘을 준 것은 결국 역시 여성들이었다.

 

▶ 내 생애 최초로 눈 맞으면서 한 행진이었던 서울 여성행진(Women‘s March) ⓒ주연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 다음 날인 1월 21일, 미국 워싱턴 DC를 비롯한 미 전역 그리고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나라에서 열린 세계여성공동행진에 참가했던 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것에 일단 놀랐다. 서울에서 눈까지 내리던 그 날 함께 목소리를 내고 걸으며, 우리에게 서로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고 따뜻한 온기 이상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열기가 나에겐 희망이 되었다.

 

우리는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멈추지도 않는다. 우리는 앞을 향해 걸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엔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한 게 아니라, 난 분명히 우리 안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즐거웠던 나의 페미니즘 여행의 유일한 오점이었던 그 괴로운 기억을 이제 씻어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맞으며 함께 걸었던 다수의 모르는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함께 해줘서!  (주연feminist journal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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