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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가 왜 아직도 야수를?

[잇을의 젠더 프리즘] ‘미녀와 야수’의 저주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잇을님은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_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빌 콘돈 감독, 엠마 왓슨, 댄 스티븐스 주연 <미녀와 야수>(미국, 2017)

 

최근 ‘한남과의 사랑 가능한가?’ 라는 제목의 특강이 열린 것을 봤다. 1991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실사영화로 다시 만든다고 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도 비슷했다. ‘미녀가 왜 아직도 야수를?’

 

물론 수많은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을 사랑한다.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조금만 부딪치면 사랑에 빠지고 고민은 없다. 그 남성이 어떤 인간이든지 그 상태는 지속된다. 장르가 멜로드라마라면. <미녀와 야수> 원작에 따르면, 벨은 당연히 야수를 사랑한다. 그렇더라도 ‘유일하게 유의미한 인간관계였던 아버지를 떠나서 남편감을 찾았다’로 요약될 이 이야기가 2017년에도 낭만적이려면, 더 성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녀와 야수>는 야수의 저주 사연을 보여주고 곧바로 벨에게 향한다. 영화는 엠마 왓슨의 영리하고 용감한 이미지를 빌려왔기 때문에, 벨의 매력에 대한 착각이 잠시 일어난다. 벨은 총명하고, 책도 구하기 힘든 시골에서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으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꾼다. 부모를 잃고 ‘미혼’으로 남으면 비참해질 거라는 청혼자의 협박도 단칼에 자른다.

 

그런데 괴짜로 불릴 정도로 남다른 욕망을 가진 벨이 그 이후 보여주는 모습은 정해진 결론에 갇힌다. 탈출에 한번 실패하고 나서 다시는 탈출을 시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야수에게 호감을 가지며, 마침내 ‘네가 나를 좋아해줄 리 없겠지’ 하는 야수의 고백도 아닌 고백에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고 있다. 이 변화에는 아무 설명도 없어서, 벨이 ‘촛대나 옷장을 선택하기 어려워서 야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빌 콘돈 감독, 엠마 왓슨, 댄 스티븐스 주연 <미녀와 야수>(미국, 2017)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는 일시적 ‘자유’가 주어지자 벨은 어머니를 추억하고 야수의 집으로 돌아간다. ‘자유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을까?’ 벨은 자유를 꿈꾸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모르고, 제대로 가져본 적 없는 자유를 포기한다. 성에서 나갈 엄두를 못 내는 야수와 달리, 벨은 어디로든 떠나서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야수가 선택해둔 책만이 아니라. 그러나 벨이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주인공’이라는 걸 관객은 알지만 벨은 모른다.

 

야수가 대단히 매력적이든지, 하다못해 우리가 잠시라도 야수에 대해 이입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영화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냉혹한 아버지와 자랐다’는 몇 초 설명으로 그의 일생을 요약해놓았을 뿐이다. 야수가 ‘금기시된 존재’라는 점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저주 이전에도 외로웠다면, 왜 저주가 풀리기만을 소망하는지, 괴로워서 울부짖는 그 모습조차 숲의 맹수를 내쫓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나는 알고 싶다. 주인공의 가족상황을 둘러싼 편견이 아니라.

 

<미녀와 야수>에 설득력을 부여하려면, 벨과 야수를 조금 바꿔놓는 것으론 부족했다. 정해진 전개와 결말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야 했을 것이다. 맹수를 물리칠 때 외에는 야수가 사람 같기만 한 것도, 그래서 사람인데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벨에게 사랑받는 것 같은 점도 납득되지 않는다. 영화는 차별, 사회적 금기, 모호하고 암묵적인 도덕규칙 등에 의해 덜 지지되는, 낙인찍히거나 처벌되는 욕망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이성애만 잘 완성하고 끝난다. 더구나 야수가 사람의 몸을 갖게 되면 당연히 둘은 더 행복하다는 식의 결말까지.

 

▶ 빌 콘돈 감독, 엠마 왓슨, 댄 스티븐스 주연 <미녀와 야수>(미국, 2017)

 

우리의 저주를 생각해봤다. 이성애 관계, 일대일의 독점관계, 성적인 끌림과 정서적 친밀함을 동시에 느끼는 관계를 항상 시작하고, 지속하고, 또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이 그것이다. 때로는 ‘사랑’이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전부처럼 될 때도 있다. 그 저주 때문에, 사랑과 행복은 가능하기 힘들다. 우리는 트랜스젠더퀴어, 동성애자, 양성애자, 애인/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섹스하는 사람, 그 밖의 모든 비규범적인 사람을 차별하는 교육을 받았고, 그것에 분노한다. 동시에 규범적인 자기 욕망과 상황도 괴롭다.

 

나는 지우거나 덮어둬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어떤 종류의 ‘친밀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인공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야만 한다’는 그 서사를 벗어나서도 잘 살아가고 싶다. 일단, <미녀와 야수>보다 더 용기 있는 영화를 보고 싶다. 그건 가능했으면 좋겠다.  _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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