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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머리 짧은 여자, 조재] 관계를 달팽이처럼 지고 가야하는 삶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일요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엄마’. 

옆에 아빠가 있어서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 버렸더니 바로 문자가 왔다.

 

엄마: 어딘데?

나: 밥 먹는 중이었어요.

엄마: 일해?

나: 안 해요, 오늘은.

엄마: 어디야?

나: 집이요. 왜요?

엄마: 엄마 할머니 집에 있어. 빨리 와.

 

순간 확 짜증이 나서 싫다고 문자를 했다. 대뜸 딸에게 전화해서 하려던 말이 ‘할머니 집이니까 빨리 오라’는 얘기라니. 그냥 쉬고 싶었다. 내가 엄마 전화 한 통화에 지금 하려던 거 다 때려치우고 달려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뒤로 엄마에게 따로 답장이 오진 않았다. 밤이 돼서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가 같이 살던 아저씨한테 엄청 맞고 거의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찰에 신고해서 어찌어찌 빠져나와 지금은 할머니 집에 있다는 것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수요일. 일이 있어 시내에 나왔다가 친구를 만나고 저녁나절 헤어졌다. 

또 전화가 왔다. ‘엄마’.

 

엄마: 어디야?

나: 친구 만나고 있어요.

엄마: 오늘 일 안 해?

나: 오늘은 쉬어요.

엄마: 그럼 진작 말하지. 엄마 돈이 없어서 대출을 좀 받아야 해. 네가 은행 가서 좀 알아봐. (…) 건성으로 듣지 말고, 네가 도와줘야 엄마가 진짜 끝낼 수가 있어.

나: 예….

엄마: 내일 꼭 은행 가서 알아 봐.

나: 예….

 

목요일. 오전부터 전화가 온다. ‘엄마’.

 

엄마: 어디야?

나: 집이요.

엄마: 아직도 은행에 안 갔어? 엄마가 꼭 알아보라고 했잖아. 어휴, 됐다.

 

안 그래도 씻고 나갈 참이었는데…. 대출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친한 친구에게 전화했다. 친구는 아마도 이러이러한 서류가 필요할 텐데 일단 가서 상담을 받아보는 게 빠르다는 말을 해줬다. 4대 보험이 최근에 끝나버려서 조금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은행에 가니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스레 몸이 움츠러든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괜히 어깨를 한 번 쭉- 펴본다. 서류가 몇 가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은행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돈, 돈 거리는 게 속물이라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는 사람들이 속물이라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돈, 돈 거린다는 말을 했다. 맞아. 엄마가 아저씨한테 맞고도 돈이 없어 입원을 못 하고 보증금이 없어 방도 못 구하지. 

친구가 힘들겠다고, 아무 생각 말고 영화나 한 편 보라고 영화표를 선물해줬다. 마땅히 볼 영화가 없어 그나마 재미있어 보이는 <굿바이 싱글>을 예매했다. 영화의 거의 후반부쯤 주연(김혜수 분)이 단지(김현수 분)에게 말한다. “네가 왜 울어? 진짜 울고 싶은 게 누군데!” 후에 주연은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한다. 진짜 당사자인 단지의 입장을 헤아려보지 못했던 주연은 펑펑 눈물을 흘린다.

 

제일 힘든 건 당사자겠지. 맞다. 그래도 자꾸 내 나침반을 남서쪽으로 끌어내리는 엄마를 감당하는 건 매번 힘들다. 내 삶은 일시 정지되고 자꾸 여기로 모든 감정과 시간이 휩쓸려가는 것만 같다. 책 <단속사회>(엄기호, 창비, 2014)에서 관계를 달팽이처럼 지고 가야 하는 삶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그게 퍽 이해가 됐다. 나도 엄마도 달팽이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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