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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로맨틱한 로망에 딴지를 걸어드립니다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에이로맨틱 선언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상대는 내가 동경하는 여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인데다 육체적인 매력도 굉장했다. 커리어 면에서도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을 먼저 가고 있던 그는, 한 마디로 내가 꿈꾸는 나, 영적인 쌍둥이 형제와 같은 존재였다. 유난히 마음이 잘 맞았던 우리는 약 2년간 애정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리가 진짜 형제였으면 한다’는 말을 해서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가족이라면 지금 같은 사이가 될 수 없잖아.”

 

나도 그의 반응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인관계에서의 애정이 형제애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은 것이다.

 

# 에이로맨틱, 끌리지 않는 사람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그 사람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며,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고, 지속적인 친밀감을 원하고 있다는 것 등의 포괄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이러한 설명들은 엄밀히 따지면 서로 다른 종류의 욕망이나 애정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을 복합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엄격하게 분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이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을 의미하는 heterosexual이라는 영어 단어가 우리말로 이성애자, 즉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에둘러 번역되어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성적 끌림과 연정적(낭만적) 끌림 중 하나만을 경험하거나, 둘을 각각 서로 다른 젠더의 사람들을 통해서 경험한다. 에이로맨틱(aromantic)은 어떤 젠더에도 연정적 끌림을 경험하지 않는 성향을 뜻하는 말(wiki.asexuality.org/Aromantic_FAQ)로, 내가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이다.

 

▶ 에이로맨틱 플래그. 초록은 사랑의 색깔인 빨강의 정반대를, 검정은 전통적 의미의 사랑을 거부한다는 의미라 한다.

 

에이로맨틱은 다른 성적 지향보다도 더욱 가시화가 어려운 소수자성이기도 하다. 우정이 아니면 사랑이라는 식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타인에 대한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애정을 이해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불과 1, 2년 전까지는 연애가 나의 외로움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일이 없다. 첫눈에 반하기로는 한강 이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데다, 타인의 성적 매력을 빠르게 감지하는 나인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것이 연애감정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런 나에게 구체적인 낭만적 욕구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연인 관계로 맺어져서 함께 벚꽃 구경을 하고 싶다든가, 사랑을 속삭이는 닭살커플이 된다든가 하는 것을 원한 적이 없다. 내가 이해한 연애는 도달해야 하는 골인 지점이었지 지속되는 상태는 아니었다. 운 좋게 갈망하던 사람과 맺어지면,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느껴지는 것은 잠시 뿐이고 2인 3각 달리기를 하는듯한 불편함이 생활 전반에서 느껴지곤 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는 기분이 바로 연애감정이래.”

 

또다른 에이로맨틱 친구와 나는 그 말을 놓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과연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뭐든지 좋아 보인다던데, 나는 언제나 내 연인들의 외모나 가능성에 대해 정의의 저울처럼 객관적이었다. 또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먼 미래의 일을 약속하며 들뜨는 일도 결코 없었다. 그런 점을 섭섭해 하는 연인도 있어서 일부러 이성의 끈을 놓고 사랑에 인생을 맡겨보려고 작정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눈에 뭐가 씌어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평소에 경솔한 것 이상으로 더욱 경솔해지지는 않았다.

 

# 사랑이 뭐길래?

 

예술혼이 타오르던 어느 목요일 저녁, 나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25주년 특별 공연 실황 영상을 보러 영화관으로 향했다. 막이 올라가고, 빚 때문에 사창가로 팔려온 어린 베트남 여성 ‘킴’과 전쟁 상황의 긴장을 성매매로 푸는 소모적인 삶에 싫증난 젊은 미군 남성 ‘크리스’는 서로의 특별함을 첫눈에 알아본다. ‘제발 이대로 사랑에 빠지지만 말아줘! 진부하다고!’ 기도하던 내 간절한 마음이 무색하게, 둘은 첫날밤을 지내자마자 운명적인 사랑을 예감하고 미래를 약속한다.

 

You are sunlight and I, Moon

Joined by the gods of fortune

당신은 태양이고 나는 달빛,

운명의 신이 맺어주었지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사랑스러운 그 언약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속상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왜 아름다운 노래는 모두 연정을 노래해야 할까.

 

왜 에이로맨틱인 내가 로맨스를 꿈꾸었냐고? 나는 반대로 질문하고 싶다. 로맨스를 원하지 않을 자유가 주어진 적이 있는지 말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유죄이고, 지금은 혼자일지 몰라도 언젠가 운명적인 인연이 찾아올 것이며, 사랑이야말로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마법 같은 힘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흔히 쓰는 ‘우정 이상, 사랑 이하’와 같은 표현이 보여주듯이, 낭만적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 중에서도 최상급의 사랑으로 묘사된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이런 신화를 형성하는 것은 바로 연애정상성(amatonormativity) 이데올로기다. 이는 “인간은 보편적으로 중심적·배타적·육체적인 애정관계를 맺고 추구하며, 그런 관계가 정상적이고 다른 관계들보다 더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믿음”(rabe.org/glossary)을 말한다.

 

연애정상성의 신화가 얼마나 강력한가 하면, 성소수자 중 특히 동성애자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구호 중 하나가 “사랑은 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키스하는 이성 커플과 동성 커플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둘 다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성애-정상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는 순간에도 연애정상주의는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의심되지 않는다. 반대로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은 동성애는 사랑이 아니라 성행위일 뿐이라거나, 동성애자들은 문란하다고 강조한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 위주의 관계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정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차갑고 이기적인 사람’, 혹은 ‘문란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에이로맨틱은 유연정(有戀情)적 양식으로 애정관계를 맺지 않을 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늘 다정한 연인의 모습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오히려 연애감정이 없는 사람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사랑의 의미가 협소해진 것이 문제가 아닌가?

 

▶ 성소수자 시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사랑은 승리한다’ 손팻말. 다양한 성적/연애적 지향이 존중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직관적이고 강력한 사인이다. 하지만 에이로맨틱이나 에이섹슈얼과 트랜스젠더퀴어 등 ‘사랑’이 아닌 다른 문제로 차별받는 성소수자의 존재는 반영하지 않는 메시지라고 볼 수도 있다.

 

# 당신의 로망을 의심하라

 

달콤 쌉싸름한 사랑! 하루는 사람을 천국으로, 하루는 지옥으로 데려간다는 사랑은 확실히 중독적으로 즐겁다. 게다가 사랑의 달콤함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는 그것을 한층 안전한 오락거리로 만든다. 국경도 나이도 뛰어넘고, 보수적인 사회로 하여금 동성애자·양성애자를 포용하게까지 만드는 사랑은 사회통합을 위해 좋은 전략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신화가 그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소외시켜야 할 만큼 중요할까?

 

연애정상주의 사회는 나와 내 에이로맨틱 친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느끼게 만들어왔다. 우리가 에이로맨틱이라고 정체화하기까지 했던 고민들은 찍어낸 것처럼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걸까?’

‘어렸을 때 학대를 받아서 정서적인 문제가 생겼기 때문인가 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인터넷에서 그러던데….’

 

사실 연애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딘가 잘못되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는 시선에 대한 불만과 비판은 줄곧 있어왔다- 심지어 에이로맨틱이라는 용어의 출현 이전에도 말이다. 성소수자로 하여금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회는 주류의 성적·연애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도 결코 관용적일 수 없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애나 결혼을 강권하는 가족과 지인들로 괴로워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혼주의나 비연애주의라는 선택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혹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천생연분’을 찾는데 열중하여 더 가치 있는 다른 일들을 미루고 있는지도 말이다.

 

낭만적 관계의 형성에 집착하는 사회 분위기는, 심지어 그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에도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필요나 욕망으로 사랑에 빠지지만, 연애가 어떤 모양이어야 하냐는 데에는 꽤 분명하게 정해진 답이 있다. 연애하는 사이에는 일주일에 몇 번 만나고 연락하는 것이 보통이고, 같이 자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는 믿음 따위가 문제의식 없이 널리 공유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만의 시간을 좀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섹스 없이도 만족스러운 사람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확연히 줄어든다. 또한 소유욕이나 질투심을 느끼는 것이 곧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바꾸지 못한다면, 데이트 폭력을 미화하고 비가시화하는 문제는 영영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연애정상주의는 우리에게 허용되는 욕망의 다양성을 축소시키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시키며, 우리의 인간관계를 몇 가지로 한정시킨다. 36색 크레파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그림을 4색으로만 칠할 필요가 있을까. 연정이라는 신화에 기대어 살아가기엔, 낭만적인 파트너가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채워지는 다양한 인간적 욕구가 너무 아쉽다.

 

그래서 에이로맨틱을 선언한다. 당신의 로망을 의심하고, 사랑을 여러 조각으로 해체해보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연정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을 에이로맨틱이라고 한다면,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을 가리키는 에이섹슈얼(asexual)이라는 단어도 있다. <일다>에 게재된 에이섹슈얼 당사자의 글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폭력적인 남성성의 감옥을 탈출하는 법” 

 

※ 이 글을 읽고 자신이 에이로맨틱이 아닌지 궁금해졌다면, 에이로맨틱 테스트 문항 50가지를 이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bit.ly/2p8vs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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