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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 ‘보호’가 아니라 ‘안전’이 필요하다

[이가현의 젠더 프리즘] 연말 금요일의 밤길걷기 시위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이가현님은 불꽃페미액션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지난 12월 22일은 오랜만에 좀 추위가 가신 날이었다. 아침부터 날씨를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연말 금요일 밤, 건대입구역 사거리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북적였다. ‘2017 밤길걷기 시위’를 하기 위해 피켓을 잡고 건대입구역 2번 출구 앞에 모여 있는 불꽃페미액션단은 거대한 파도처럼 흘러가는 인파들 속에 소수였고, 그래서 더 결연해보였다.


▶ 12월 22일 금요일 밤, 건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열린 ‘2017 밤길걷기 시위’ ⓒ불꽃페미액션


“보호가 아니라 안전이 필요하다”

“안심하고 사과주스 마시고 싶다”

“동의 없는 SEX는 강간이다”


이번 밤길걷기 시위는 아직도 밤길을 걸을 때 별다른 안정장치 없이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여성들의 처지를 토로하고, 사회가 안전해져야 밤거리를 불안하지 않게 다닐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열린 것이다. 또, 술 마실 일이 많은 연말에 술에 취했다는 것을 핑계로 모텔이나 자취방에 여성을 데려가 강간하고, ‘너도 동의했으니까 따라왔겠지’라며 피해자를 꽃뱀 취급하는 한국 사회의 강간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몰래 술에 약물을 타 넣어서 강간하는 이른바 약물 강간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5월 대선 당시 홍준표 후보가 젊은 시절 친구들과 돼지발정제로 강간모의를 했다는 내용이 책에 실리면서 논란이 되었다. 홍준표 지지자들은 ‘젊은 시절 치기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너그러이 넘어가자고들 했다. 하지만 실제 약물 강간의 피해자들은 강간을 당하고 몸 사진이 찍혀 불법촬영물 공유사이트에서 ‘무한공유’되기도 한다. 약물 강간은 ‘너그러이’ 넘어가서는 안 될 강력 범죄다. 몰래 약물을 탈 수도 있으니 술잔에 술을 남겨놓고 화장실을 가면 안 된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이미 여성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밤길걷기 시위를 시작하고 참가자의 발언이 이어졌다. 아래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 12월 22일 금요일 밤, 건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열린 ‘2017 밤길걷기 시위’ ⓒ불꽃페미액션


<지금부터 너무 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썸을 타고 있었던 남성과 술을 마시다가 모텔을 가기를 강요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각기 다른 세 남성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세 번이나요. 어쩜 그리 시나리오가 똑같은지. 너무 흔하고 뻔해서 이렇게만 말해도 생략된 대화들을 추측하실 수 있으시겠죠. “모텔을 가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다”, “너도 나를 좋아하고 나도 너를 좋아하는데 왜 모텔에 가지 않겠냐는 거냐”, “나를 왜 그런 사람과 동급 취급을 하냐?” 등등.


저는 더 이상 모텔을 가도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지 않았기에, 세 번 중 한명의 남성에게는 내가 왜 모텔에 가고 싶지 않은지, 모텔이 왜 무서운지를 설명했습니다. 그 남성은 썸을 탔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설득하고 싶었고, 잊고 싶은 경험을 이야기해서라도 공감을 얻어내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남성을 일반화한다’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데도 같이 자주지 않는다며 서운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고 난 후 제가 너무 힘들어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을 때, 친구가 저에게 “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어? 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던 너한테 더 화가나”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여성친구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상대가 더 이상 대화가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바로 도망치라고 말했습니다. 여성친구들의 답변은 비슷했습니다. 저도 그래서 더 이상 상대방이 나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했을 때, 나또한 그 사람의 이성을 잠식한 성욕을 무시하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저도 일반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왜 우리 모두 ‘남자는 다 늑대야’라는 말을 정설로 알고 있으며, 그 말을 왜 누가 하는 겁니까? 그건 ‘언제든지 너를 강간할 수 있어’라는 협박 아닙니까? 지금 페미니스트를 대하는 태도는 남자는 다 늑대야, 라고 해서 그렇군, 조심해야 겠다, 했더니 무슨 소리야? 일반화하지 마! 남혐 하지마! 라고 소리치는 격 아닙니까? 정말 둘 중에 하나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란 말인가 트위스트 추면서…


한국 남성들은 진실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이성의 존재에서 끌어내리는 소위 ‘남혐’을 하게 만들 겁니까? 아니면 술 먹이고 강간하는 그 뻔한 시나리오를 이제 멈추겠습니까? 스스로를 늑대로 위치시키는 남혐을 멈춰주세요! 구호 한번 외치겠습니다. 너랑 술을 먹는다고 섹스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너랑 모텔 간다고 섹스하겠단 뜻은 아니야!> (밤길걷기 시위 참가자 발언)


시위 도중에는 “나도 섹스하고 싶다”는 시위대의 절규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사람이랑 섹스를 하는 것, 그것이 왜 이리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는 어려운 일인지 답답함에 터져 나온 말이었다. 내가 지금 당신과 섹스하지 않는다고 해서 ‘순결주의자’거나 ‘성모마리아’가 되고 싶어하는 건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우리도 섹스하고 싶다. 다만 하고 싶을 때가 아닌 것 뿐이다. 아마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지.


▶ 12월 22일 금요일 밤, 건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열린 ‘2017 밤길걷기 시위’ ⓒ불꽃페미액션


<“저는 짧은 옷을 참 좋아해서 많이 입고 다녔습니다. (중략) 짧은 옷을 입고 다니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하철에서 남자들이 제 다리를 훑어봤습니다. 길에선 저를 정면에서 훑어보고 지나치는 것도 아쉬웠는지 뒤돌아서 끝까지 제 몸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 이러한 ‘시선강간’은 온전히 제가 감내해야할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속바지를 입었고, 계단을 오를 때면 치마를 가렸습니다. 성폭행을 유발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저는 조신함이라는 달콤한 여성혐오를 답습하며 저를 규범 안에 가뒀습니다. 그런데, 저의 조신함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나요? 아니, 저의 조신함은 무엇을 증명하는 것인가요?


사회는 여성에게 성적 각본을 쥐어주고 수행하게 합니다. 여성 스스로 여성을 향한 이중규범을 지키고 나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순결한 사람과 음탕한 사람, 이 두 가지로 나뉘지 않습니다. 여성은 임신을 하기 위해 섹스를 하는 사람과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하는 사람, 이 두 가지로 나뉘지 않습니다. 여성은 어머니가 될 사람과 창녀가 될 사람, 이 두 가지로 나뉘지 않습니다. 여성은 개개인만의 섹슈얼리티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자르고 싶어서요. 자르고 난 뒤 편한 바지를 입고 다니는 지금, 저는 시선강간으로부터 확실히 정말 자유롭습니다. 제 옷차림 때문에 성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아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사회가 저를 여성이라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사회가 하던 대로 저를 이중규범에 넣는 것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사회가 이중규범이라는 틀 안에 넣을 수 없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저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여성입니다.


짧은 옷차림으로 밤길 다니는 게 위험하다구요? 네 위험합니다. 제가 아니라 강간문화가요. 조신해야 될 건 제가 아니라 가해자이고, 바뀌어야 할 건 제 옷차림이 아니라 사회입니다. 우리는 계속 밤길을 걸을 겁니다.> (밤길걷기 시위 참가자 발언)


▶ 12월 22일 금요일 밤, 건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열린 ‘2017 밤길걷기 시위’ ⓒ불꽃페미액션


시위대는 캐롤을 개사한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 페미니스트들의 시위의 한 방식으로 자리 잡힌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내 경험으로는 지난 해 검은 시위에서 ‘마귀들과 싸울지라’를 ‘낙태죄와 싸울지라’로 개사해서 불렀던 것이 시작이었다.


<징글벨> 개사곡

밤거리에서/ 무슨 옷 입든/ 여성들은/ 성적대상화 돼

짧은 옷 입든/ 긴 옷을 입든/ 여자들은 항상 시선/ 강간당하네 (헤이!)

안전한/ 밤거리/ 나도 좀 걷자

뿌셔뿌셔/ 강간문화/ 뿌셔버리자아

안전한/ 밤거리/ 내겐 왜 없냐

시선강간/ 없는 세상/ 페미들 세상 (호잇!)


행진을 하면서 여느 때처럼 시위 현장을 촬영하려는 사람들에게, 확성기로 ‘동의 받지 않은 촬영은 삼가달라’고 안내했다. 그런데 길을 지나는 젊은 여성 두 분이 깔깔대며 시위대를 향해 소리치는 말이 들려왔다. “무슨 사진촬영이야, 너희는 사회악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웅성대던 시위대를 다잡은 건 하나의 구호였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외치고 싶었던 그 말.

“강간범이 사회악!”

“강간범이 사회악!”

“강간범이 사회악!”


감동이었던 순간도 있었다. 맛의 거리 일대의 수많은 술집 중 2층에서 여성분들이 창문을 열고 우리에게 격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결국 그렇게 구체적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운동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회식을 바꾼다”

“우리가 여기서 종강파티를 바꾼다”

“우리가 여기서 뒤풀이를 바꾼다”

“우리가 여기서 술자리를 바꾼다”


▶ 12월 22일 금요일 밤, 건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열린 ‘2017 밤길걷기 시위’ ⓒ불꽃페미액션

 

길을 지나던 할아버지가 번뜩 놀라는 얼굴로 “어? 근데 왜 여기 섹스가 적혀있어?”라고 묻기도 했다. “술 먹고 강간하지 말라구요”라고 설명해 드렸더니 ‘아~’ 하고 이해하는 표정을 지으신다. “길 막혀서 죽겠다!”고 외치는 아저씨도 있었다. 좀 예쁜 말로 했으면 나도 예쁘게 응대했을 텐데 다짜고짜 반말로 시비를 거니 “집회 신고했어요, 집회 신고했다고요!” 하고 소리 질러버렸다.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고는 어딜 가든 이렇게 시비 거는 아저씨들과 만나게 된다.


거리행진을 마치고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던 페미니스트들을 만났다. 행진대오를 찾을 수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람들,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으로 우리의 밤길을 담고 싶었다는 영화감독, 해외 언론 기자… 그리고 시민들이 여전히 바글댔다.


나는 술을 참 좋아한다. 페미니스트들과 술을 마시는 건 큰 즐거움이다. 이 날 불꽃페미들은 건대의 한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에 술을 곁들여 먹었다. 그리고 당당히 걸어와 우리 집에 모여 또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새벽 다섯 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구는 집에 돌아가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건대입구에 가득 찬 사람들이 나처럼 술을 많이 마셔 취했더라도 오빠가, 아빠가, 남자친구가 지켜줘야만 안전하게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도 안전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밤거리를 걸으며 술집 창문으로 즐겁게 발개진 얼굴들이 비칠 때 들었던 생각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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