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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하면 무엇이 생각나니?”

<망원시장 여성상인 구술생애사 작가들의 이야기> 박채란 작가


※망원시장 여성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가 담긴 책 <오늘은 맑음>(푸른북스, 2017)을 기록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박채란씨는 동화작가이자 예술단체 <빛나는 순간>의 공동대표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여덟 살 딸아이에게 물어본다.

“시장, 하면 어디가 생각나?”


 딸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한다.

“음…. 시장이라고 하면 하나로마트기도 하고 이마트기도 하고 한살림이기도 하지.”


아이의 마음속에 우리가 익히 아는 시장의 이미지는 없다. 오직 마트가 있을 뿐

 

마흔의 내가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난 시장 하면, 뭐가 떠오르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에서 보낸 나. 금요일 오전이면 단지 안 관리 사무소 근처에서 열리던 알뜰시장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한쪽에서 팔던 오뎅이나 떡볶이 뽑기 강냉이 같은 군것질 거리와 반짝거리는 갈치와 고등어의 비늘. 김장철이면 키보다 높이 쌓이는 배추들. 부산하지만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은 엉성한 느낌까지.


목포홍어무침 조숙희 사장님의 흥미진진한 인생사


궁금했다. 망원시장이라니. 서울 한복판에 재래시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신기한데, 심지어 장사가 잘된다고 했다. 마트로도 부족해 인터넷으로 장을 보는 시대. 망원시장에서는 무얼 팔까? 누가 있을까? 어떤 이야기들이, 목소리들이 흘러 다닐까?


▶ 망원시장 목포홍어무침 조숙희 사장님 (사진: 이경훈 작가)

 

찾아간 곳은 <목포홍어무침>. 망원시장의 한가운데에서 월드컵시장 쪽으로 조금 더 걸어들어 가면, 오른쪽에 홍어무침과 전을 파는 가게가 있다. 손님들이 커다란 팬 앞에서 이것저것 전을 고르는 동안, 홍어무침 맛있어요? 라고 물으면 한번 잡숴봐, 라며 누군가 이쑤시개에 미나리와 홍어를 야무지게 끼워주신다. 그 분이 바로 <목포홍어무침>의 조숙희 사장님. 영업이 끝난 저녁 8시 이후 가게 안쪽에서 나는 조사장님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1992년 민물장어 집을 시작으로 장사를 시작하신 조숙희 사장님. 남편분이 장어를 잡고 소스를 만드는 등의 기술을 2년 동안 배워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나서야 장사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 우리가 칠백인가 밖에 없었어요. 그걸루 시작한 거지. 92년에 민물장어장사 이백에 삼십 할 때는 작은애 임신해서 만삭이 되어있으니까 손님들이 배 다친다고 가려주고 그랬어요. 그때도 우리는 투잡을 했었어요. 낮에는 장사 안하니까 가피공장을 하고 저녁에는 장사하니까는 투잡한 거지. 나는 세시쯤 내려가서 애 아빠가 안 해놓은 거 설거지 하고 상추도 씻고 그때당시에 나는 소주잔요. 다 삶았어요.”


그러다가 둘째가 태어나고, 사장님은 갓난아기를 돌보며 장사를 일구어 가신다.


“저녁에 바쁘다 그러면 분유 두통 딱 타놔요. 우리 큰애가 그때는 일곱 살이었으니까 분유 두통을 딱 타 놓고 애기 봐라 그러구. 진짜 애기가 애기를 키웠지. 그때 애기가 응가를 하잖아요. 엄마 애기 응가했는데, 그러는데 그때는 목 조금 가눌 때. 데리고 가서 씻겨줘라 하니까 지가 딱 데리고 가서 하더라구요. 그래도 본 게 있으니까 파우더까지 발라서 기저귀 딱 채워 놓더라고요 일곱 살짜리가.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까.”


딱 봐도 시원시원하고 수완이 좋아 보이는 조숙희 사장님. 왠지 사장님의 장어가게는 대박이 났을 것만 같다.


“대박은 났는데요. 대박이 나고 나서 가게를 성산동으로 쉰다섯 평짜리로 옮겼어요. 근데 거기는 예약이 없으면 못 먹을 정도로. 그때는 손님들이 굵었잖아요. 그때는 있는 사람들이 장어를 먹었을 때니까. 그때 당시에 삼천인가 사천인가 빌렸어요. 그걸 1년 만에 다 갚았지. 1년, 가게 옮기고 나서 딱 1년 지나고 나서 아이엠에프가 딱 터진 거예요.”


아, 아이엠에프! 나는 아이엠에프가 터지던 1997년에 대학교에 들어갔다. 세계의 최소단위들이 하나씩 무너지던 시기. 이제 갓 대학에 들어와 한껏 부풀었던 청춘들의 어깨가 얼어붙어버려 옴짝달싹 못하던 날들.


“아줌마도 우리가 일곱 명 두고 했어요. 그때당시 내가 서른세 살인가 그랬을 거야. 장사 잘 됐어요. 대로변에 있었고. 오죽했으면 내가 돈 가방을, 그때는 카드가 별로 없을 때잖아. 요만한 가방에서 돈 들어갈 가방이 없어가지고 큰 걸로 바꿨잖아. 현찰 넣을 데가 없어서. 그땐 카드가 없었으니까. 근데 아이엠에프가 딱 터져가지고 야, 그때부터 하락세를 치는데 예약이, 연말 예약이 우리는 6,7월 때부터 꽉 찼었어요. 7월 8월이면 예약이 끝나요. 12월 예약까지 다 끝난다고. 그 정도로 우리가 자리가 없었다고. 그래가지고 다 끝나는데, 10월 되니까 쭉쭉쭉 그래서 삼분의 일로 딱 줄어버리더라고! 예약이. 그다음에도 장사를 하는데 2분의 1이야. 그래도 1년 더 버티자 그래가지고 버텼어. 거기에서 또 이분의 일이야. 계속 반 토막이 나는 거예요.”


현찰 넣을 곳이 없어 가방을 바꾸어야 했던 시절을 경험한 적 없는 나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짐작할 수 없다. 하루아침에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어 버린다는 건 어떤 걸까?


▶ 망원시장 목포홍어무침 조숙희 사장님 (사진: 이경훈 작가)


“99년까지 거기서 한 거 같아. 그리고 가게를 옮겼어요. 좀 작은 데로. 우리 둘이서 할 만한 데로, 열일곱여덟 평 해가지고 둘이서 하게끔 했어요. 우리가 거기 가 가지고, 그때는 도시가스가 별로 없었잖아요. 일반 엘피지였잖아요. 근데 거기 가서 우리가 이 도시가스를 잡아 끌이고, 다다미라고 하죠? 방 까는 거 그걸 다 깔고, 시설 다했어요. 그리고 에어콘 빵빵하게. 근데 딱 2년하고 나니까, 장사 해먹을 만하니까. 단골손님 좀 받고 자리 잡히고 하니까 주인이 나가래. 권리금이 그때 당시에 6천이었어요. 그때 당시에 6천. 거기를 그걸 주고 들어갔어요. 그리고 다다미 깔고 하니까 1억이 들어갔어요. 거의 1억이 들어갔어. 근데 딱 2년 하니까 나가래.”


여기까지 듣고서는 헉, 하고 숨이 막혔다. 그럼 1억은?


“당시에는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어요. 지금은 권리금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잖아요? 근데 그때 당시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우리가 장사가 좀 되는 것 같아 보이니까 그랬나봐.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우리가 1억 까먹고 나온 거야. 그 당시에 20년 전에.”


1억! 지금의 가치로도 큰 돈. 웬만해서는 모으기 힘든 돈이다. 20년 전 그 1억은 조숙희 사장님의 인생을 축약한 돈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더 가진 자들의 농간으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오니까는 보증금 딱 삼천 남잖아요. 보증금은 살아있으니까. 그 삼천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들은요, 집이 먼저가 아니라 장사가 먼저거든. 그래도 쥐꼬리만한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남의 집 일은 못가잖아. 그래서 성산시장이라고, 옛날에 지금은 망원시장이 크지만 옛날에는 성산시장이 컸어요. 망원시장보다 더 컸어. 우리 아주버님이 떡볶이 장사를 해가지고 잘 되었거든요. 떡볶이 장사를 한번 해보자 해서 가게를 얻었어요. 그때 권리금 천칠백에 보증금이 천만원해서 이천칠백이잖아. 이천칠백에 들어간 거야. 들어가 가지고, 삼백만원 남은 걸로 쪼그만한 집기류 사고 시작을 했어요. 근데 어마? 잘되더라! 시작부터 잘되거든. 아 이거 성공했구나, 했죠. 퍼블릭마트라고 크게 있었거든요. 그 망원동에서는 거기가 제일 나았거든. 중형마트로 망원동에서는 제일 알아주는 마트, 그 마트 바로 앞이었어요. 명절 때면 진짜 말도 못하게 팔리는 거야! 당시에 분식해서 삼십 만원 사십 만원 팔면 엄청 파는 거예요. 명절 때는 막 칠팔십 넘게 판 거야. 하루에. 2000년이니까 십칠년 전 그때 당시에 삼사십 만원이면 엄청난 거야.”


아, 장사의 세계란 이런 것인가? 나는 손에 땀을 쥐었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그렇지.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응당 보답이 돌아와야 한다.


“웬걸? 5개월 딱하니까 앞에 까르푸가 생겨버렸잖아. 5개월 딱하고 나니까. 우리는 그 정보를 모르잖아.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겠지. 매상이 절반으로 줄더라고. 앞에 마트도 마찬가지고. 같이 죽는 거지. 절반으로 딱 끊기더라고. 나중에는 재료비도 안 나와. 거기서 그래도 3년을 했어요. 처음 5개월만 반짝 했던 거지.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안 되니까 거기서 내가 권리금 천칠백 주고 갔다고 했잖아요. 권리금 천 만원 받고 나왔죠. 나오고 나서 나는 당구장으로 취직을 했죠.”


아이엠에프로 권리금 및 시설투자비 1억을 날리고, 이번에는 대형마트 때문에 결국 분식집까지 접게 된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개인의 노력이나 수완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하루하루의 삶 앞에서 때로는 절망도 사치가 된다. 사장님은 당구장으로 중국집으로 퓨전짬봉집으로 사장이 아닌 직원의 삶을 살게 된다.


“내가 기본이 있으니까 일을 금방금방 배우거든요. 퓨전짬뽕이라고 거기 가서 또 1년 넘게 했지. 신촌에 있는데. 처음에는 홀로 갔어. 처음에는 홀로 갔었는데 주방에 한사람이 빠져 버린 거야. 어떻게 대처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주방으로 들어가서 면 삶고 어쩌고저쩌고 다 했지. 그래 나중에는 홀로 내보내지를 않는 거야. 주방 일을 너무 잘해버리니까. 그리고 나서 여기저기서 또 사람 소개를 막 많이 받으니까, 김치찌개 전문집이 사람이 필요하대. 필요하다 그래가지고 면접을 봤어요. 면접을 보면서 내가 그랬지. 나는 사장님한테는 잘 못한다. 나는 손님한테 잘 한다. 처음에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그렇게 생각을 했을 거야. 근데 겪어보니까 진짜로 그러거든, 손님한테 최선을 다하거든.”


그렇게 사장이 아닌 종업원의 삶을 산지 10여년. 조숙희 사장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여기 <목포홍어무침> 자리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내 수중에 돈이 현찰 가지고 있는 게 삼천 있더라고. 근데 우리 아들이 적금 들어간 게 이천 있었어. 그렇게 오천. 여기가 1억천인데 육천 부족하잖아. 우리 형부한테 또 빌렸어. 삼천을 땡겨서 권리금 팔천을 먼저 줬어. 그리고 삼천이 없잖아. 내가 동생한테 부탁을 했어. 내가 지금 삼천이 없다. 한 달에 천만원씩 벌어서 주마. 그때 삼월 달이었으니까. 내가 3월 20일에 여기 들어왔거든요. 그때 장사 잘 되었어요. 그래서 한 달 해가지고 2014년도인데 딱 천만원 갚았어요. 나 혼자 했으니까 나갈게 없으니까. 그전에는 언니들 둘하고 알바까지 세 사람 하던 일을 나 혼자서 다 쳐댄 거야.”


▶ 망원시장 목포홍어무침 조숙희 사장님 (사진: 이경훈 작가)

 

그렇게 해서 자리 잡게 된 망원시장 <목포홍어무침> 가게. 사장님은 지금 이 가게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복 받은 집이야. 들어오고 1년 있다가 마침 옆에 큰 전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2월말에 그만뒀어요, 설 쇠고. 근데 요게 홍어가 이제 차근차근 덜 먹게 되잖아요. 맨날 먹는 음식이 아니라서. 우리가 전 시작하고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니까 덜 팔리는데. 먹어보니까 괜찮거든. 명절 두 번 쇠고 나니까 단골이 잡히더라고 이제 명절 네 번 쇠니까. 우리 집 오면 손님들이 딱 직접 담아요. 손 하나 더는 거예요. 손님들이 아니까. 명절 때는 대박나요. 꼬지를 이런 박스로 열 개를 만들어요. 7월 달부터 추석 동그랑땡을 미리 만들어 놔야 해요. 냉동에다가 빚어서 다 넣어놔요. 어디가 일을 해도 나는 내장사처럼 해버리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이런 큰 복이 왔잖아. 여긴 자리도 좋고 이 동네 오래 살아서 이 시장에 대해 잘 알잖아요. 그리고 나는 남한테 해 되는 일은 안 해봤고 그래서 아마도 이런 좋은 가게를 얻은 거지. 나는 여기 가게 들어온 게 진짜 잘했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숨결이 스민 재래시장


시장, 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재래시장의 이미지가 서서히 사라지고 여덟 살 아이의 마음속에서 ‘시장=마트’가 되어버리는 그 변화의 굴곡이 곧 아이엠에프로 권리금을 날리고 대형마트 때문에 장사를 접어야 하는 조숙희 사장님의 삶의 굴곡과 일치한다.


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특히 자영업은 가게 밖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수완이 좋더라도, 한 사람의 힘으로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설 수가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사장님은 다시, 파도를 헤쳐 나간다. 멋진 일이다.


다시 눈을 감고 떠올려본다. 시장, 하면 무엇이 생각나나?


이제 나는 시장하면 망원시장이 생각난다. 내가 만난 조숙희 사장님과 <목포홍어무침>을 떠올린다. 시장이란 물건을 파는 곳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 세상과 싸우는 곳이다. 그 생애의 역사가 숨 쉬는 곳이다. 주말이 되면, 시장이라는 말에 마트만을 떠올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망원시장에 다녀와야겠다. 아이들에게 그곳을 자신의 삶의 자리로 선택한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어야겠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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