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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망원시장 여성상인 구술생애사 작가들의 이야기> 박내현 작가


※망원시장 여성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가 담긴 책 <오늘은 맑음>(푸른북스)을 기록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박내현씨는 적당히, 느리게,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마을활동가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구술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엄마가 우리 네 남매의 사진들을 정리해서 하나씩 앨범을 만들어 주시는 걸 보면서, 나도 엄마 아빠 앨범을 만들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된 흑백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한 장의 사진.


여고생 교복을 입은 사진 속 엄마는 수줍지만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고흐와 르누아르가 좋아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 미술학원에 다니며 공부했지만 결국에는 다른 길을 선택했던 엄마의 얘기를 떠올리며, 꿈 많은 여고생이었던 사진 속 그녀의 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졌다.


▶ 젬베를 연주하는 망원시장 대진청과 김미숙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과일 가게를 하는 김미숙 사장과 만나다


망원시장의 김미숙 사장을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녀의 꿈이 궁금했다. 지금은 시장 사거리에 위치한 커다란 과일 가게인 ‘대진청과’의 주인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의 삶의 자락들은 어떻게 시작되어 흘러왔을까. 성격이 소심하고 대범하지 못해 낯선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어려웠다던 그녀가 어떻게 매일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을까, 그 삶의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았다.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마을에서 태어나 일일이 손으로 김을 말리고 동생들을 업어 키우며 집안일을 도왔던 착한 큰딸. 대학에 가고 싶었던 그녀는 무리를 해서 광주로 나와 혼자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결국 건강이 나빠져 원하던 대로 대학에 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생각하면 재수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나는 못가도 동생들은 대학에 보내야겠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홀홀히 낯선 서울로 떠나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을 꾸려갔다. 그런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고, 재주도 있었다.


“제가 노래를 좀 해요. 아주 잘하는 건 아닌데. 그때는 카세트 조그만 거 틀어놓고 노래하고 춤추고, 개울가에 앉아서 모닥불 피워놓고 노는 게 유행이었어요. 그때 당시로는 그게 그렇게 재밌었어요. 밤에 그렇게 모닥불 피워놓고 노래하고 놀고 그러는데… 인천도 놀러가고 끼리끼리 남자친구 몇 명, 우리 여자들 몇 명 이렇게 해서 놀러 가고 그랬죠. 남편이 좀 유머러스했어요. 그렇게 만났죠.”


연애랄 것도 없이 다정한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살림을 차렸다. 그렇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인생. 그녀는 얘기 중에도 여러 번 자신의 인생이 딱히 이야깃거리가 되겠냐는 말을 덧붙였다. 평범한 인생이라고는 했지만, 그 평범한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첫 아이를 잃고, 바로 이어진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그 충격으로 힘들어하는 시어머니를 혼자 모시고 살았던 시간들. 그리고 그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마음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들.


“불 때서 밥을 하고 소죽도 끓여야 되고, 땅은 많은 집인데 현실적으로 땅 부자인지는 몰라도 돈은 많지 않았어요. 환경이 열악했죠. 화장실도 재래식이고 물도 따뜻한 물이 없어서 데워서 써야 하고, 아마 겨울에 갔던 거 같은데 빨래도 개울에 가서 하는데 얼음물이고, 시어머니가 물을 끓여 고무 다라이에 담아왔고, 개울에 가면 추우니까 빨래터에다 하우스 같은 걸 쳐놨어요. 얼음물에다 빨래해서 탈수기에 돌려 널고,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때 제가 시어머니를 모셨어요. 양평 집은 두고, 당뇨가 있으셔서 형이 모신다고 했는데, 우리 집으로 모셨어요. 지병이 있으셔서 걷질 못하시고 파킨슨병을 앓으셔서 손도 떨고, 밥도 간신히 떠서 드시고, 걷지를 못하니까 뭉그적거리면서 다니고, 다리를 못 쓰시니까 제가 안고 목욕탕에 들어가서 씻겨드려야 하고, 그런 걸 다 해드려야 했어요. 어쩌다 똥이라도 싸면 다 치워야 했어요. 그렇게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집에 계셨어요. 가만히 방에 있으면 ‘애미야, 애미야’ 이렇게 부르시는 것 같고 환청 같은 게 들릴 때가 있어요. 이게 아니다 하고 정신을 차리기는 하지만, 잠깐씩 그런 게 들리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힘들었어요.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그런 걸 마음에 많이 안고 살았어요.”


▶ 망원시장 대진청과 김미숙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홈플러스 싸움을 거치며 쌓은 자부심과 연대감


힘든 얘기만 해서 재미없지 않냐고 걱정했지만, 망원시장 상인회를 통해 시작한 젬베 활동 얘기를 할 때면 그녀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공연했던 동영상과 사진을 일일이 찾아 보여줄 때는 눈빛이 반짝였다. 힘차게 젬베를 두드리고 민속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노래를 좋아해서 강가에서 둘러앉아 친구들과 놀았던 그 시절의 그녀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1년 365일 중 363일을 같이 보내는 남편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그녀의 말에 계속하라고 해줬다고 한다. 매주 한 번씩 만나 젬베를 배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며 보냈던 시간들은 마포구청에서 열리는 정기공연 외에도 한강 둔치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진행된 시장 내 공연에서 꽃을 피웠다.


“한 시간이 금방 가요. 시간이 아쉬울 정도죠. 작년 12월엔가 끝나고 여성사업 보조금이 없을 때에도 맥이 끊어지면 안 된다고 우리가 돈 걷어서 했어요. 저희 연습 공간이 홈플러스 싸움 하면서 생긴 거예요. 상인회 건물로 쓰면서 복합공간을 만들고 화장실도 만들고, 저렇게 공간 꾸리자고 한 것도 상인회에서 다 회의해서 정한 거예요.”


망원시장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힘, 연대감의 배경에는 자신들의 연습공간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인 홈플러스 싸움이 빠질 수 없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함께 싸웠던 그 시절, 앞에서 싸운 사람들은 남성 상인들이었을지 모르지만 가게 문을 함께 열고 닫으며 그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은 여성 상인들이었다. 그 싸움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공간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인 젬베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완도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서울로, 다시 양평에서 망원으로 흘러들었던 그녀의 삶은, 밀려들어오는 자본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막아내며 망원에서 정착했다.


내 얼굴을 걸고 판매하는 물건이니까…


“사람들이 장사꾼은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생각보다 상인들 착해요. 장사가 한동안 안 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접고 다른 걸 할까 고민도 많이 했었죠. 하지만 결국 평생 해온 일이니, 제일 많이 아는 것도 과일이고, 과일장사가 저희가 제일 잘 하는 일이더라고요. 혼자 사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미니 과일류를 들여놓을 고민도 하고 있고, 낱개로도 판매하고 저희도 변화하고 있어요. 대형마트처럼 엄청나게 많이 들여다 놓을 수 없으니까 비교할 순 없겠지만 저희 스스로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싶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잘 하고 싶어요. 불친절하다, 비위생적이다, 그런 시장에 대한 편견이 많은데 시장도 달라지고 있어요. 시장은 오히려 내 얼굴을 걸고 판매하는 물건이니까 최선을 다하죠. 그게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시장의 ‘정’인 것 같아요. 그냥 물건을 사고팔고, 다시는 안 볼 사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을 보더라도 웃으며 보면 좋잖아요.”


얼굴을 걸고 하는 장사, 이제는 무엇보다 가장 잘하는 일이 된 과일 장사, 김미숙 사장에게 망원시장에서의 삶은 이제 가장 잘하는 일,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때로는 힘들어서 울기도 하고,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일이라 접고만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던 일. 내 속으로 낳았지만 쉽사리 가까워지지 않는 딸과의 아쉬운 관계도 장사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망원시장과 젬베는 지금의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되었다.


▶ 대진청과 김미숙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상인들이 가만 보면 참 불쌍해요. 가게 하시는 분들이 문화생활을 많이 즐기지 못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주말에 쉬는 게 있지만, 가게를 하다 보면 그런 걸 할 수가 없어요. 쉬는 날 어디 나간다는 게 힘들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낮잠 한 시간 자고 나면 하루가 금방 가요. 이틀을 쉬면 하루 어디 놀러가거나 다른 걸 하고 다음날 쉴 수도 있지만, 하루밖에 안 쉬니까. 저희처럼 1주일에 한 번 쉬는 집도 별로 없어요.”


그런 상인들 중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한 달에 한 번 씩 모여 밥 먹고 가게 얘기도 하고, 손님들 얘기도 하고 신랑 얘기도 하고, 수다를 떠는 계모임을 한다. 김미숙 사장이 속해있는 모임의 이름은 ‘해당화’. 3년 동안 돈을 모아 일본에 놀러 가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살자고 해당화로 지었어요.”


나와, 엄마와, 그녀들의 삶을 응원한다


1965년생인 김미숙 사장과 1946년생인 나의 엄마는 약 2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삶에는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큰딸로서의 삶,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며느리로 살아가며 겪었던 외롭고 힘든 시절들. 낯선 곳으로 시집와 모진 시집살이를 겪으며 살아왔던 엄마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쩌면 엄마가 꿈을 잃어버리게 만든 데 나도 동조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줄줄이 태어난 사 남매를 키우느라 직장을 그만뒀던 엄마는 IMF를 지나오면서는 뒤늦게 다시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자식들을 위해, 혹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늘 돕는 삶을 살며 자신의 꿈을 조금씩 뒤로 미뤄야 했던 여성들의 삶은 어쩌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지금을 사는 나에게도, 내 주변의 여성들에게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타인을 돕거나, 타인에 기대는 보조자로서의 삶에서 그치지 않고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살고자 하는, 잘하고 좋아하는 일들을 기어코 만들고 찾아내는 나와 그녀들의 삶을 응원한다.


첫 정기공연 때 자신의 남편만 공연을 보러오지 않아서 서운했다던 김미숙 사장에게 물었다. 올해 공연에는 오셨느냐고. “가장 큰 꽃다발을 사서 왔다”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말에, 내 일처럼 기뻤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고 신나게 하는 것. 그렇게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것이 오늘 망원시장의 그녀들과 우리들이 다시 꾸는 꿈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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