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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드러내는 직장에서 성소수자로 살아내기

[성소수자, 나도 취준生이다]⑤ 직장문화와 자기관리


성소수자 청년들의 취업과 노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소위 ‘일반’ 청년들의 노동에 있어 접점과 간극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모두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20~30대지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만 묶일 수는 없다. 취업 키워드들을 통해 성소수자들과 비성소수자들의 삶을 살폈다. 그렇게 찾아낸 공통분모들이 우리 시대의 청년노동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노동자 희정]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추문’의 주인공이 되는 일


우리의 편견은 지독하다. 직장은 그 편견을 드러내기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직급이 있고, 그에 따른 위계가 있다. 권력이란 ‘그러할 수 있는 힘’이다. 회사는 그 힘이 작용하는 곳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편견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힘’도 포함된다. ‘요새 젊은 것들은’, ‘여자가~’라는 말이 통용된다. 농담으로 하고 훈계로도 한다.


그 편견은 직장 내 커밍아웃을 막는다.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머물러야 하는 곳이 회사다. 장시간 사람들과 부대끼는 공간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일은 “힘들고” “피곤하고” “에너지를 너무 쓰게” 된다. “자괴감을 주고” “거짓말을 한다는 자책”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동성애(로 대표되는 사회적 소수성)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공간에서 커밍아웃은 어려운 일이다. 정체성을 밝힐 경우 해고나 계약해지 가능성, 업무와 관계에 미칠 영향을 예측해야 한다. 단순히 말해 ‘추문’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다.


“저랑 교류가 없는 사람들이 저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전에 가졌던 편견들로 혐오를 쌓아가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이 알고 있던 나와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가 달라질까 두려워요.” -소유, 30대, 수도권 거주자, 게이, 퀘스쳐너리, 현재 IT업계 종사


정체성을 숨기는/밝히는 일은 이들에게 한평생 과업이 된다.


반갑지 않은 인정, “너는 예외”


커밍아웃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직장이라 해도, 해피엔딩인 건 아니다. 인터뷰 초기, 사람들에게 당신의 직장은 커밍아웃이 가능한 퀴어-프랜들리(Queer-friendly)한 곳이냐고 물었다. 질문이 잘못됐다. 커밍아웃을 할 수 있다고 해서 퀴어 정체성에 친숙하거나 열려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직장에서 커밍아웃 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다는 소유의 이야기를 빌리자. IT회사에 근무하는데, 소유는 그 회사 창립멤버다. 선임이자 창립멤버라는 권력. 직장관계에서 ‘을’은 확실히 아니다. 또 일의 특성상 성과가 분명히 보이는 기술로 평가받고, 혼자 하는 작업이 많다. 정체성이 일과 관계에 미칠 영향을 적게 걱정해도 된다. 커밍아웃 하기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라 했다.


성 정체성을 밝혔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소유는 동료들과 연애 이야기도, 생활사도 잘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누구와 가깝게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라고 답했다. 회사 특성상 동료들 간에 교류가 잦은 곳이 아니라 했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더니 “내 정체성이 아니었다면 교류가 없었을까요?” 되물었다.


“회식할 때 한 명이 주말에 영화보러 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누구랑 가냐고 묻는 거예요. 친구랑 간다 그랬더니 남자끼리 가냐고, ‘더럽다’고 그러는 거예요. (호모)포비아적인 대화를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음에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소유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혔다. 그러나 그 ‘사건’은 종종 잊혀졌다.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어떤 이는 못 들은 척하고 어떤 이는 기억을 못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나의 말을 부정”한다. 커밍아웃은 ‘거듭’ 반복해야 하는 작업이 된다.(<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中 소수자는 피해자인가, 한채윤, 도란스, 2018)


잊지 않았어도 “남자끼리? 더러워” 그런 식의 대화는 쉽게 나온다. 습관처럼 나오는 말이라 했다. 그게 이 사회의 상식이다. 남자와 여자가 영화를 보고,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는 것이 ‘올바른’ 사회인데 소유는 ‘예외’라 생각한다. 그 예외’는’ 인정해준다. 소유의 예외는, 오히려 이들 리그의 ‘정상’을 공고히 한다.


대화를 나눌수록 소유는 자신을 ‘예외’ 그러니까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통념을 확인한다. 상처가 잦아진다. 갈수록 말수가 줄어든다. “그러니까 점점 안 어울리게 된 것 같네요.”


자신이 이성애자였다면? 소유는 그런 대화가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커플끼리 놀러 가고, 여자 이야기를 하고. 일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유는 이성애자가 아니고, 그런 대화가 반갑지 않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이 일반적인 길에서 벗어났다고들 말했다. “제 길을 가는 거죠.” 이들이 벗어난 길이란, 이런 류의 대화와 일상을 포함한다.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예쁘냐?” 부터 묻는 대화. “요즘 것들은”으로 시작하는 품평, 아파트 평수와 자녀 성적과 남편 건강으로 채워지는 소소한 일상. 평범함 속에는 성별을 포함한 모든 권력 위계를 내면화하는 잔인함이 숨어져 있다. 그것이 편견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일상은 편견과 편견이 이어 붙인 징검다리와 같다. 그래서 그들의 상식과 편견을 비껴간 “제 길”을 가는 일은 늘 투쟁이다.


▶ 노동자를 위한 성소수자 교육자료집. 직장 내 성소수자 노동권 보장과 인식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이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출처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노동권팀)


내가 나인 것을 받아주지 않는 현장


그 길이 투쟁이기에 가지 않으려 한다. 함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모 기업 정규직원인 준수는 ‘주류’에 있고 싶다고 말한다. 패션과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으나, 일반 직장을 택했다. 몸짓 하나, 목소리 하나 자신은 ‘전형적인 남성’이 되지 못함을 안다. 그렇기에 더욱 퀴어성이 드러나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바깥으로 가는” 자신을 경계한다.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더 주류 문화에 편입되고자 한다. “정체성이 나의 모든 생활을 잡아먹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다. 같은 맥락으로, 성별 전환을 하거나 이를 원하는 (흔하게 트랜스젠더라 떠올리는) 이들 중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범적인 ‘성별 표현’에 더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화장을 하고 긴 머리를 찰랑인다. 어깨를 넓히고 패커(성기 모형) 크기에 신경 쓴다.


이들은 성별 이분법을 파괴하는 몸 또는 성애를 지니고 있으나, 자신을 감추거나 연기한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온 힘을 다한다.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이들이 왜 그러하는가이다. 준수는 “저는 성소수자란 정체성이 좋지만” 동시에 “성소수자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가 ‘나’인 걸 받아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니까요.”


이 사회는 성소수자들이 나로 지낼 수 없게 한다. (이성을 사랑하는) 여자이거나 남자여야 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들은 지속적으로 같은 처지의 동료를 설득한다. 화장하라, 근육을 키워라, 성전환 수술을 하라. “이유는 간결하다. 왜냐면, 너무 힘드니까.”(<청년 성소수자 인식실태조사 및 청년 성소수자 활동가 당사자의 욕구조사> 강현주 외, 2015 서울시 청년허브)


‘정상성’을 연기라도 해야지 너무 힘든 삶은 피할 수 있다. 사회는 성별 이분법-정상가족으로 드러나는 ‘정상규범’에서 어긋난 인생들에 가혹하다. 인생에 체벌을 가한다. 직장에서는 체벌 집행이 해고, 재계약 파기, 직장 내 괴롭힘 쯤 되겠다. 그 이전에 고용 자체를 거부한다. 동성애자인권연대(현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곽이경 전(前) 대표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직장 내에서 성소수자를 보호할 법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회가 성소수자를 보호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노동 현장에서도 성소수자를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실패한 몸을 숨기다


이 사회는 성소수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몸의 상태를 (의료적) 실패로 규정했다. 실패하지 않고 신체를 ‘정상’ 가동시키기 위해 치료를 한다. 동성애 또한 전환치료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정상의 몸’으로 돌아갈(완치)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병원이나 가정 안에 가둬졌다.


자본주의는 ‘부정적인’ 몸을 사적 영역에 가두었다. “공적인 세계는 힘의 세계이자 가치 있는 육체의 세계이며, 성과와 생산성의 세계이고, 젊고 성인인 비장애인의 세계”이다. (<거부당한 몸> 수전 웬델, 그린비) 그리고 이성애자 비성소수자의 세계이다. 이에 해당하지 않는 몸들은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 이후 세상은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기반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통제, 신체와 노동(생산)의 통제, 더 나아가 재생산의 통제까지(국가 주도 가족계획 정책을 보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사회를 유지시킨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개별 몸을 통제하고 관리할 것을 요구받는다. 시간관리, 그리고 이성을 통한 신체/생활의 통제, 일명 자기관리는 자본주의 시작과 함께 움터온 개념이다. “열정은 스펙으로 증명하는 거죠.”(드라마 <쌈, 마이웨이> 중 대사) 우리에게 ‘노오력’을 요구하는 ‘자기관리’의 역사는 유구하다.


관리와 통제는 효율을 위해서다. 자본주의 생산(대량생산)과 판매(시장개척)를 가능케 하는 효율. 더 빠르게 생산하고 더 효과적으로 판매하기 위해서는 표준/규격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관리된 정상성’으로 표현된다. 대량생산 체제에서 다양성이라는 것은 규범 사회에서 자율성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환상’이다.


효율의 대량생산은 재생산 영역에도 ‘정상성’을 요구한다.(‘정상’적인 아이를 낳아 훈육할 것)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가 표준화된 상품이 되어 “그러한 정상성을 잘 유지하는 존재로 계속 스스로를 재생산해야 한다.”(<불평등과 성적권리로 관점을 전환하는 여성주의적 재생산 정의운동> 나영, 2015,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기획단)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실패’한 몸이다. 정상성을 유지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재생산하지 않는다. 사회적 통제의 ‘실패’를 보여주는 몸, 이는 의료적 실패인 병든 몸처럼 숨겨져야 한다. 부정당하거나 없는 취급당한다. 그래서 이야기하지 않고, 편견 속에 가두고, 그나마 ‘예외’로 취급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직장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없는 이’들을 위한 보호장치나 권리란 있을 수 없다.


▶ 동성애자인권연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공저 <무지개 성 상담소> 표지 이미지(양철북, 2014)


존재를 드러내는 대항


편견은 조직적이고 보호는 없는 세상이다. 인터뷰에 응한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경험이 일반화될 것을 하나같이 염려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성소수자 서사의 모든 것이 될까 봐. 어떤 이는 자신이 세상이 말하는 전형적인 ‘게이 스타일’이라 커밍아웃을 하기 꺼려진다고 했다. 전형적인 ‘부치’ 스타일 레즈비언 또한 같은 고민을 전했다.


“그 사람들 인생에 처음이자 한 명의 동성애자일텐데. 절 보고 저런 사람들은 다 그래, 생각할 거 아니에요.”


오랜 세월 편견에 노출되어 왔고, 그래서 자신이 그 편견을 재생산할까 봐 두려워한다. 사회가 부러 만들어내는 편견은 공고하고, 우리들은 편견에 무방비하고, 당사자들은 작은 행동조차 조심한다.


그러니 ‘개별의’ 존재로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하지만 그러한 세상이기에 이들이 ‘존재하는’ 일은 중요하다. 사회가 존재를 지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항하는 방법은 존재하는 것이다.


경계에 선 이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


커밍아웃은 ‘이들’에게만 의미 있는 대항이 아니다. 이들의 경험과 서사를 공유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자신이 중심이 아닌 ‘바깥’에 위치한다고 했던 준수의 말을 가져온다. 이들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사회는 면접장 문을 닫아 건다. 정체성을 숨기고 들어오라고 한다. 이들은 결국 숨거나 바깥 경계에 머문다.


바깥은 안을 위해 존재한다. 예외의 존재는 보편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현 사회는 이들을 예외로 규정하여 보편을 강화하려 한다. 그러나 예외는 거듭 확인될 수밖에 없고, 예외‘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정상성’에 균열을 낸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의 반복된 학습은 문득 그런데 정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튀어버리기 때문이다.


▶ 아서 프랭크 에세이집 <아픈 몸을 살다> 표지 이미지(봄날의 책)


자신의 질병 경험을 서술한 <아픈 몸을 살다>에서 아서 프랭크는 아픈 몸은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우리의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한다고 했다. 더는 건강이 유지되고 통제되는 것이 ‘정상’적이고 당연하다고 믿어온 삶에서 머물 수 없다. 경계에서 삶을 조망한 결과 “그저 오랫동안 살아왔던 대로 계속 사는 대신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봄날의 책)


경계에 서면 그간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이 낯설어진다. 이들의 자리에 서면 ‘생산과 효율을 위해’ 내 자신마저 ‘정상으로’ 꾸준히 재생산 해내야 하는 기존의 노동이 낯설게 보인다. 경계에서 선 이들의 낯선 경험은 우리가 “살아온 대로 사는 대신” 다른 가치와 방식을 꿈꾸게 하는 단초가 된다.


그러니 이들의 ‘드러냄’에 응답해야 한다. 이들의 낯선 경험을 나누어야 한다. 커밍아웃은 혼자 외치는 작업이 아니다. 듣고 응답할 이가 필요하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그럼에도 왜 ‘그들’에게 응답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우리도 사라질 판이니까.”


‘없다’ 취급되는 건 성소수자만이 아니다. 세상은 감춰진 사람 몇몇쯤 가지고 있다. ‘정상’을 벗어나면 규범에 어긋나면 우리는 사라짐을 강요받는다. 미투(#MeToo) 운동은 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가. 성폭력은 만연한데 세상은 없는 일인 척 해왔다. 피해경험자는 사라지고 ‘꽃뱀’만 남았다.

 

우리는 존재를 이유로 늘 사라져왔다. 뚱뚱한 여자는 여자로써 사라진다(너도 여자냐?). ‘여자답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자도 사라진다(쟤는 남자지). 취업 면접장에서 여자는 투명인간 취급당한다(무시하다가 기껏 한다는 질문이 “결혼할 겁니까?”). 취업난의 스포트라이트는 ‘장애인’, ‘질환자’, ‘비대졸자’, ‘성소수자’ 를 비추지 않는다. 조명 불빛 안 사람들은 행복한가. ‘노오력’하고 ‘자기관리’하지 않는다면? 손쉽게 퇴출된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정상’과 ‘표준’에 들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늘 불안했다. 애썼다. 그 애씀이 숨이 차 행복하지 않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고도 행복하지 않다. 이제 작동설명서를 다시 봐야 할 때다.


우리를 둘러싼 구조와 문화를 바꿀 때가 됐다. 직장 내 페미니즘 모임도, 노동조합도 그 측면에서 고민이 된다. 해고가 손쉬운 사회는 성소수자가 커밍아웃 하기에도 위험하다. 성소수자들이 혐오에 노출될까봐 몸을 숨기는 공간에서는 여성의 몸 역시 남성중심의 시선에 갇힌다.


경계에 선 이들의 경험과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은 여러 방식이 될 수 있다. 그것의 귀결은 “오랫동안 살아왔던 대로 계속 사는 대신” 다른 삶을 꿈꾸는 일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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