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세상이라는 가족 속에 너의 자리가 있어”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소속감이 주는 기쁨


하나 리 크리스프


※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나는 1984년 전주에서 태어나 1988년 호주로 입양되었다. 2010년 해외입양인연대(GOA’L)의 <고향으로의 첫 여행>(First Trip Home)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친가족과도 재회했다. 호주로 돌아간 하나는 호주 한국입양인 네트워크(Korean Adoptees in Australia Network)를 세우고, 입양인 지원단체 VANISH를 위해 일했다. 그리고 수년 간 그녀는 ‘뿌리의 집’과 ‘진실과 화해를 도모하기 위한 해외 입양인들의 모임’ TRACK, ‘한국입양인참여연대’ SPEAK를 비롯한 국내 NGO들과 함께 입양인 권익 찾기와 친가족 보존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싱글맘의 날’ 컨퍼런스, 최근 김해에서 열린 동료 입양인 얀 소르코크의 추도식 같은 행사에서 노래 공연을 했다. 하나는 2017~2018년 1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했다.


▶ 해방촌에서 열린 입양인 말하기 행사에 참여해 벤 코즈(Ben Coz)와 함께 공연한 모습. ⓒ하나 리 크리스프


30년 전 그 날, 내 이야기의 출발


내 첫 이주는 네 살 때였다. 그때 할아버지(외할머니 여동생의 남편)는 나를 서울의 입양기관에 두고 갔다. “할아버지!” 나는 미친 듯이 매달렸다. “나 두고 가지마. 착한 아이가 될게.” 6개월 뒤, 나는 적도 너머 호주 태즈메이니아의 작은 도시에 있었다.


극적으로 보이려거나 동정심을 자극하려고 저 이야기를 한 건 아니다. 단지 그것이 원래부터 내 이야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더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국의 친가족들이 들려준 몇 가지 단편적이고 간접적인 기억들뿐이다. 그것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사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다른 가족들에게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버려질 거라는 두려움은 내 몸 깊이 살아있어서 30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으로 이주를 감행하기까지 8년이나 걸린 이유


2017년까지 나는 이미 한국을 일곱 번쯤 방문했다. 정신없이 지나간 일곱 번의 여행 뒤에 호주 생활로 다시 돌아와 적응할 때면 어김없이 “한국방문 후 우울증”(post-Korea depression)-많은 입양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이 뒤따랐다. 그 중 몇 번은 한국에 몇 달이나 머무르다 왔지만, 겉만 핥다 온 느낌이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지만, 상자는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 깊숙한 곳을 남몰래 괴롭혔다. 결국 나는 한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표면적으로는 1년 간 한국어를 공부하러 가는 것일 뿐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일이 잘 풀리면 아예 눌러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침내 이주를 실행하기까지 8년이나 걸린 셈이다. 나는 이주에 대해 생각하면서 8년 동안 왜 하지 못했는지 핑계를 만들고 있었다. 왜일까? 한편으로는 내가 호주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기대를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입양돼서 더 훌륭한 삶을 부여받았어, 안 그래? 정상 등급에서 아주 조금 어긋난 다정한 가족, 좋은 교육, 광활한 호주 해변에서의 수많은 유쾌한 놀이들, 해외여행을 다닐 기회들 등등.


그런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의 무언가가 상실돼서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또한 한국으로의 이주가 호주에서 입양인으로서 내 인생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동화되고 적응하고 “행복”해지려는 필사적인 노력에도 어느 수준에서는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나는 내가 한국에서 사는 경험을 싫어하기를, “내 세계에서 그것을 뽑아내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국, 친가족, 입양 문제를 영원히 외면할 수 있기 위해. 완전한 마무리와 같은 어떤 것… 그 유혹적인 상상의 유니콘을 찾아내기 위해. 그것은 또한 주변의 사람들이 내게서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다. 가서 끝내고, 돌아와 호주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기를.


▶ “입양인 말하기: 1988~2018” 인스타그램 캠페인에 참여한 모습. (촬영: Shane Bolen)


‘나를 거부한 사회’와 마주치는 일상


처음에는 힘들었다. 당연히도 나는 세 살 배기의 언어 능력을 가진 현지인의 얼굴을 한 외국인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일상 대화를 할 때, 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한국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가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그것은 호주에서 다른 인종의 해외입양인으로 살던 삶의 기묘한 반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현지인인데도 완전하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매일 네 시간 동안 나는 한 대학의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수업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한국어 음절들은 너무 큰 사탕처럼 내 입속에서 서투르게 굴러다녔다.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중국, 베트남, 몽골에서 온 청소년들이거나 한국인과 결혼한 서양 사람이었다. 그 수업의 방식은 시험을 위한 암기학습과 반복과 주입이었다. 나는 그것이 전형적인 한국 방식이라고 들었다. 그것은 대개 전혀 즐길 수 없는 것이었고, 내 생애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교육 경험이었다.


“당신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건 한국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도와줄 거예요.” 다른 입양인이 조언을 해주었다. 고마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난 한국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이 빌어먹을 말을 배우고 싶을 뿐이야.


가끔씩, 지하철에서 군중 속을 헤치고 가거나 밀치는 사람들을 뚫고 갈 때 기묘한 분노가 내 안에 요동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 처음에는 그 분노가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했다. ‘오, 맞아.’ 네 조국은 본래 너를 거부하고 수천 달러에 팔아 넘겼어. 그리고 이제 너는 매일 그 사회와 마주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잘 알고 있는 입양인 친구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얻었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네 입양과 상관없잖아.’ 우리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넌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 돼.’


누가 물어보면 나는 거리낌 없이 한국 사람들에게 내가 해외로 입양됐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편리함 때문이기도 했고(확실히 나의 한국인 같은 외모와 부족한 언어능력을 설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으니까), 또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침울한 표정으로 침묵에 빠지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친부모에 대해 묻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마침 화장품 가게 판매원이었던 경우-분명 공짜 샘플을 더 많이 챙겨 주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한 말을 완전히 무시했는데, 이 마지막 경우가 제일 당황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년의 가게 주인, 퉁명스럽게: 한국 사람 같은데. 어디서 왔어요?

-나, 간단한 한국어로: 호주에서 왔어요. 저는 한국에서 입양됐어요.

-가게 주인, 입양 부분은 완전히 무시하며: 아, 우리 아들/딸도 호주에 사는데! 우리 아들/딸은 지금 변호사/의사/회계사로 성공했어요.

-나: 멋지네요.


나는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잦은 전화 때문에 귀찮았을 불쌍한 절친에게 몇 번씩이나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외국에 온 거나 다름없었고, 외로웠다. 밤에는 넷플릭스로 영어 드라마들을 보며 귀를 달래고 편의점에서 사온 초콜릿을 입힌 별 모양 과자를 먹으면서 한국에 맛있는 초콜릿이 없다는 것을 슬퍼했다.(따지지 마시길.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많이 부족한 건 확실한 사실이다.)


나는 조기 귀국해버릴까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가끔 내 (양)엄마가 훌륭한 조언을 해주시는 경우가 있다. 엄마는 휴가를 갔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곧 돌아올 테니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라고. 그 말은 큰 도움이 되었고, 내 여정에 작은 전환점이 되었다.


▶ 서울에서 어느 저녁 산책 후. ⓒ하나 리 크리스프


기러기들의 회귀와 소속 찾기


한국에 사는 입양인들은 다 알다시피 좋은 한국의 날과 나쁜 한국의 날이 있다. 좋은 날에는 내가 용감하고! 독립적이라고 느꼈다! 적어도 한번은 한국어로 성공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이곳 사람처럼 버스 시스템을 이용했으며, 약국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사는 데 성공했다. 오, 그리고 새로 산 옷이 맞춘 듯이 딱 잘 맞았다! 나쁜 한국의 날에는 길을 잃어버렸고, 아무도 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으며, 택시는 나를 그냥 지나쳐 갔다. 또 다시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점차 부지불식간에 상황은 나아지고 있었다. 어느 시점이 되자 나는 물건을 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필요한 절대 최소치의 한국어 실력에 도달했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있으면 서울의 대중들 속에서 현지인으로 통할 수 있었다. 이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바다에, 단지 또 하나의 한국인의 얼굴로 녹아드는 익명성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마침내 국외거주자들을 위해 임의로 주선되는 모임에 나갈 필요가 줄어들었다. 진짜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입양인이었다. 한 커플은 내가 수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난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한국에 거의 처음 와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몇몇은 한국에 10년 이상 산 사람들이라서 나 같은 초짜들에게 지식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한두 사람 정도는 사회적으로 서툰 탓에 큰 입양인 모임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가족모임에서 만나는 괴짜 삼촌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이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각자의 입양 경험도 크게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단순히 한국을 방문만 하는(또는 전혀 방문한 적이 없는) 입양인들에 비해 한국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친가족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일부는 입양인들의 권익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한국의 입양 제도와 우리를 ‘유사 백인’으로 만든 서양식 양육의 실상을 보았고, 그 결점과 허위성들에 맞서 싸우려 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었는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무지가 축복이라는 말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 서울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후 쉑쉑버거에서 ‘입양인 달리기 모임’ 멤버들과 함께. 맨 왼쪽이 필자. ⓒ하나 리 크리스프


나는 호주로 돌아왔을 때보다 서울에서 입양인들을 훨씬 더 가깝게 느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입양, 인종, 정체성, 가족, 정신건강, 활동… 정말 많이 깊고 유익한 토론을 나누었고, 정말 많이 배를 잡고 같이 웃었다. 내가 속한 입양인 달리기 모임과 함께 한강변이나 청계천 가를 달리고 나서 우리는 큰 테이블들이 있는 BBQ나 쉑쉑버거에 들리곤 했다.


어느 날 밤늦게 BBQ에 함께 앉아 있다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깊은 일체감을 느끼고 있으며,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그 또한 분명 내게 새로운 감정이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작가이며 <버즈피드>(BuzzFeed)에 훨씬 더 훌륭한 글을 쓰고 있는 E. 알렉스 정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 있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안도의 한숨과도 같다. 그것은 전기처럼 짜릿하다.”


공동체, 권익 찾기 활동, 소속감. 나는 이런 일들을 한 번도 진정으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굶주린 사람처럼 그것을 빨아 들였다. 갈증을 다 채울 수 없었다. 또 그 과정에서 자기의식이라는 가면을 벗어버릴 만큼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예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 자신이 되었다. 동시에 호주에서 보낸 인생의 다른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픔에 잠겼다. 그렇다면… 그 삶은 무엇이었을까? 반쪽짜리 인생? 연기? 단지 생존?


▶ 서울에서 만난 입양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깊은 소속감을 느꼈다. ⓒ일다(일러스트: 두나)


다시, 호주의 삶으로 돌아와 고향을 그리워하며


진짜 이야기가 막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호주로 돌아왔다. 돈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에 와서 잠시 일을 해야 했고, 가족을 다시 만나야 한다고, 적어도 내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말했다.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떠나야 한다고 느꼈다. 묘하게도 나는 네 살 때 억지로 이주할 때랑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다.


호주로 돌아온 이후와 적응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과 그곳의 입양인 공동체 -나의 공동체-가 그리웠다. 호주에 있는 기존 이주민 모임에는 열심히 나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호주 사회에 동화가 잘 된 전형적인 해외입양인이 아니었다. 나는 결코 잘 동화된 아시아계 호주인 2세가 될 수 없었다. 나의 특수한 문화적 정체성은 서투른 탈(脫)동화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나는 언제나 호주를 사랑할 테지만, 호주 사회에서 내 자리를 찾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나는 내가 항상 그래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미묘한 인종차별들에서 벗어난 멋진 한 해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이곳 호주에서 다시 일상적으로 그것들과 부딪쳐야 한다. 직장 동료들이 내 이름을 다른 유색인 젊은 여성과 헷갈리거나, 모르는 사람이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말을 천천히 하거나 손짓발짓을 시작하는 것 정도는 약과다. 진짜 힘든 건 여기에는 이해해 줄 친구들- “그런 경험들이 나한테 계속 일어나게 놔둘 필요가 없다”고 다정하게 얘기해줄 친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백인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아마도 나 역시 당신들에게 인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미안하지만 정말로 미안하진 않다.)


돌아보니 내가 한국에서 더 행복한 이유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내 안의 뭔가가 활짝 피어났다. 언어 장벽과 나쁜 공기에도 불구하고(매콤한 소스 국물에 흠뻑 빠뜨리지 않은 맛있는 파스타에 대한 커다란 갈망도 더할까?) 나는 한국에서 더 가뿐하고 더 온전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정당화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돌아가서 그 소속감을 따를 수 있다면 어떨까?


한 현명한 친구는 나에게 충고했다. 납득은 잘 안 되겠지만 한국에서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갈피를 잡기 힘든 시간이 어느 정도 있을 수도 있다고. 나는 그녀의 충고를 위안으로 삼았다. 그 시간이 8년이나 걸린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명확히 알게 되었다.


착해지지 않아도 좋아.

속죄하며 천 리 사막을

무릎 꿇고 기어 다니지 않아도 좋아.

그저 네 몸 속 연약한 동물이 사랑하는 대로

사랑하게 놔두면 되는 거야.

너의 절망을 말해 주렴, 그럼 나의 절망도 말해줄게.

그 사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어.

그 사이 해와 맑은 비 구슬들은

풍경들을 가로지르며

넓은 들판과 울창한 숲 들 위로

산과 강 들 위로 흘러가고 있어.

그 사이 기러기들은 맑고 푸른 하늘 높이

다시 고향으로 날아가고 있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네가 상상하는 대로 나타나

기러기처럼 거친 달뜬 목소리로 네게 소리쳐 -

세상이라는 가족 속에

너의 자리가 있다고 거듭 거듭 알려주며


-메리 올리버 <기러기>


(번역: 권호영)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Wild Geese: Reverse Migration and Finding Belonging

Listening to the experiences of overseas adoptee women (2): The joy of belonging


Hana Lee Crisp


Introduction: Hana was born in Jeonju in 1984 and adopted to Australia in 1988. She first returned to Korea in 2010, as part of the GOA’L First Trip Home program, when she was also reunited with her birth family. Back in Australia, she founded the Korean Adoptees in Australia Network and worked for post-adoption support organisation VANISH. Over the years, she has advocated for adoptee rights and birth family preservation, with NGOs including Koroot, TRACK, and SPEAK. She has performed as a singer at events such as the annual Single Moms Day conference and recently, at the press conference and memorial service for fellow adoptee Jan Sørskog in Gimhae. She lived in Seoul for one year from 2017-2018.


Performing with Ben Coz at an adoptee speaking event in the Haebangcheon area of Seoul. © Hana Lee Crisp


The day that my story started, 30 years ago


My first migration was at the age of four when my great uncle left me at an adoption agency in Seoul. “Great uncle”(the husband of my maternal grandmother’s younger sister) I begged, distraught, “Don't leave me here – I’ll be a good girl.” Six months later, I found myself across the equator in a small town in Tasmania, Australia.


I don’t tell that story to be dramatic, or to incite pity, but because that’s basically where my story starts. From the earlier years of my life I have a handful of second-hand memories - tidbits that my Korean birth family has since told me, but I can never really know if they are true. My uncle told the rest of the family that he will never forget that day and nor can I. The fear of abandonment lives deep in my body and even 30 years later, I am dealing with the aftershock.


Why it took me eight years to actually move to Korea


By 2017, I had already visited Korea seven times. Seven whirlwind trips, followed by the inevitable “post-Korea depression” - well known to so many adoptees - upon returning and readjusting to life in Australia. On some trips I’d stayed for a couple of months and yet I felt like I’d only scratched the surface. Pandora’s Box had been opened and it only became deeper. My hunger and curiosity for Korea kept gnawing at the back of my mind until finally, I decided to move there. Ostensibly, I was only moving for a year to study Korean language, but secretly, I wondered if I could stay indefinitely if things worked out.


It took me eight years to finally make the move. I had been thinking about it and making excuses about why I couldn’t do it for eight years. Why? Partly because I had internalised the expectation that I should be happy in Australia. I was adopted and I was given a better life, right? I had a loving, only-slightly-dysfunctional-to-a-normal-degree family, a good education without Korean-style pressure during high school, opportunities to travel overseas, etc., etc. I was slightly ashamed that despite everything, something felt missing and disconnected within me, and that moving to Korea would be some kind of admission that my adopted life in Australia had failed. That despite my desperate attempts to assimilate and fit in and “be happy”, on some level I had failed.


So part of me was hoping that I would hate the experience and “get it out of my system”. To be able to turn my back on Korea, my birth family, and my adoption issues, forever. To find something akin to closure, that mythical, seductive unicorn of an idea. That is also what people expected of me. To go and be done, come back and move on with my life.


Participating in the “#AdopteesSpeak + #1988to2018” Instagram campaign. (Photo: Shane Bolen)


Facing daily ‘the society that rejected me’


In the beginning it was tough. Of course, I was a local-looking foreigner with the language abilities of a three-year old. A strange reversal of life as an intercountry, transracial adoptee in Australia, where I am a local perceived as a perpetual foreigner. I would wait for the routine shock and then recovery on the faces of Koreans during my daily interactions when I started to speak.


For four hours every day I struggled to keep up in a Korean class for foreigners. The Korean syllables rolled around in my mouth clumsily like oversized candy. Most of the other students were either young adults from China, Vietnam, and Mongolia, or Westerners married to Koreans. The approach at Yonsei University was rote learning and repetition and cramming for tests. I heard it was typical Korean style. It was probably the least enjoyable, and to me, least effective educational experience of my life. “You’re getting an insight into the Korean education system and that will help you understand Koreans more,” another adoptee advised. I don’t want to understand Koreans better, I thought to myself - I’m just trying to learn this damned language.


I’d feel strange waves of anger as I walked through the crowds or jostled past pushy ajummas on the subway, and at first I wondered where it came from. Everyday Koreans have nothing to do with your adoption, Hana, I reminded myself. You can’t take out your anger on all Koreans. Look, basically I was rejected and sold for thousands of dollars by my own country, and now I was facing that society.


When asked, I would freely tell Koreans that I was adopted – both for efficiency (it was surely the fastest way to explain my Korean appearance and rudimentary language skills) and out of curiosity for how Koreans would respond. Sometimes their faces would fall and they would go quiet, sometimes they would say sorry, sometimes – if they happened to be a MISSHA cashier – I swear they gave me extra free samples, and sometimes they would completely ignore what I had said. I found the latter experience the most puzzling:

Middle-aged shopkeeper, bluntly: You look Korean. Where are you from?

Me, in simple Korean: I’m from Australia. I was adopted from Korea.

Shopkeeper, completely ignoring the adoption part: Oh my son/daughter is living in Australia! He/she’s a successful lawyer/doctor/accountant now.

Me: That’s nice.


I wondered what the hell I was doing. I called my poor encumbered best friend, multiple times, and asked him what the hell I was doing. I had just moved to a foreign country so naturally, I was lonely. At night I bathed my ears in English shows on Netflix and ate chocolate corn star-shaped snacks from the convenience store, bemoaning the lack of decent chocolate in Korea (don’t argue, it’s improving but it’s definitely lacking). I even considered coming back early. But once in a blue moon, my (adoptive) Mum gives me good advice. Just treat it like a holiday, she said, and appreciate what you can because you’re coming home soon. It was really quite helpful, and a small turning point in my journey.


After an evening stroll in Seoul. © Hana Lee Crisp


Finding community with fellow wild geese


As all adoptees in Korea would know, there are Good Korea Days and Bad Korea Days. On the good days I would feel daring! and independent! I would have at least one successful conversation in Korean, I would navigate the bus system like a local and I would manage to buy something obscure from the pharmacist. Oh, and clothes fit like a glove! On Bad Korea days, I would get lost, no one would understand my Korean, none of the taxis would stop for me, and again, I would wonder what on earth I was doing here.


But gradually, imperceptibly, things were getting better. At some point I reached the absolute minimum level of Korean language required to buy things and get around. I could put my head down and quietly pass for a local amongst the masses of Seoul. The anonymity of being just another Korean face, in a sea of people already looking at their smartphones, felt wonderful.


Eventually I had less need to attend random meet-up groups for expats because I was starting to make actual friends. Most of them were fellow adoptees. A couple I had met years ago on previous trips. Some were fairly new to Korea and also studying Korean, while others had been living in Korea for 10+ years, founts of knowledge to newbies like me. One or two were socially awkward and made people feel uncomfortable at big adoptee gatherings, but they were still endearing, like that weird uncle in your family at Christmas time. Everyone was part of the community.


We were all individuals and our adoption experiences differed wildly, but we also had so much in common. We all had a deeper curiosity about Korea compared to adoptees who only visit (or never visit at all), many of us were navigating relationships with our Korean families, we were all learning Korean at varying levels, and some of us were involved with adoptee advocacy. It was like we’d all taken the lid off the Korean adoption system and our whitewashed Western upbringings, to grapple with the failings and falsehoods. Did that make us happier? Not necessarily (ignorance is bliss) but at least we were no longer in denial.


I felt much more akin to the adoptees in Seoul than with those back in Australia. We could talk about so many things… adoption, race, identity, family, mental health, activism…and we shared so many deep, nourishing discussions and big belly laughs. I would run along the Han river or the Cheonggyecheon stream with my adoptee running group and then we would go to BBQ restaurants or Shake Shack, because they could accommodate large groups. At one point, sitting together at a BBQ place late at night, I realised that I felt a deep sense of belonging and my heart felt light. It was also, admittedly, a new feeling for me. In the words of E. Alex Jung (a much better writer who wrote a much better article for BuzzFeed), “How can I describe what it feels like to be in a place where you belong? It sounds like a sigh. It tastes like electricity.”


Community. Group Advocacy. Belonging. I had never truly experienced these things and I lapped it up like someone who had been starving; I couldn’t get enough. At the same time, there was a recognition, and mourning, of a sense of relative un-belonging from the rest of my life in Australia. In that case…what had that life been? A life half-lived? A performance? Merely survival?


In my relationships with other adoptees in Seoul, I found a deep sense of belonging for the first time. © Ilda (Illustration: Doona)


Returning to Australia but missing Korea


Only shortly after the real story had just begun, I returned to Australia. I had run out of money and I needed to go home and work for a while, and visit my family again - or that’s what I told myself. I didn’t want to leave and yet I felt that I had to. In a strange way, the emotional experience seemed to echo my forced migration as a four-year-old.


The aftermath and the transition back to Australia was…not pretty. I missed Korea and the adoptee community – my community – there. In Australia, I do not fall neatly into one of the existing migrant groups. I am no longer a typical well-assimilated intercountry adoptee and I’ll never be a well-assimilated 2nd generation Asian Australian. My anomalous cultural identity is in a clumsy process of de-assimilation, if such a thing exists. I will always love Australia but I struggle to find my place within Australian society. I guess I always have.


I realised that I had had a lovely year’s break from racial microaggressions while in Korea, but now I have to face them again on a regular basis. It’s so nice when colleagues get my name mixed up with the other young woman of colour at work, or when strangers start to speak more slowly or use hand gestures just in case I might not speak fluent English. But the real pain is having a lack of friends here who understand…who kindly suggest that I “don’t need to let these experiences stick to me”. I’m sorry white people, but I too need to give up talking to you about race (sorry not sorry.)


Looking back, I can’t fully articulate why I was happier in Korea. Somehow my heart and my life blossomed, clichéd as it sounds. Despite the language barriers and the air pollution (and my deep yearnings for good pasta that wasn’t drowning in a spicy sauce-soup?), I felt lighter and more whole. But maybe I don’t need to explain it. What if I can simply go back, without any justification to myself or anyone else, and follow that sense of belonging?


A wise friend advised me that, counterintuitively, it does take some going back and forth to realise that one can be happier in Korea, and I cling to her words as solace. It might have taken eight years. But I think I’ve realised now.


You do not have to be good.

You do not have to walk on your knees

For a hundred miles through the desert, repenting.

You only have to let the soft animal of your body

love what it loves.

Tell me about despair, yours, and I will tell you mine.

Meanwhile the world goes on.

Meanwhile the sun and the clear pebbles of the rain

are moving across the landscapes,

over the prairies and the deep trees,

the mountains and the rivers.

Meanwhile the wild geese, high in the clean blue air,

are heading home again.

Whoever you are, no matter how lonely,

the world offers itself to your imagination,

calls to you like the wild geese, harsh and exciting —

over and over announcing your place

in the family of things.

                                                    

- “Wild Geese” by Mary Oliver

 

English-language blog of ILDASouth Korean Feminist Journal  http://ildaro.blogspot.com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