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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복지사가 된 당근을 만나다
당근과는 분명 일하다가 만난 사이인데 돌이켜보면 우리는 언제나 한강으로, 북한산으로 다리를 바지런히 옮겨가며 함께 운동을 하곤 했다. 며칠 남지 않은 마라톤 준비를 위해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가볍게 10km를 뛰고 나서, 이제 막 사회복지사로서의 길을 들어선 당근과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당근은 서울의 한 지역자활센터에서 일을 시작한지 두 달 남짓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거의 매일 야근하면서, 실은 그냥 자기가 좋은 일에 열심인 것이면서도, 혹시나 자신이 ‘일’에만 매몰되어 현실에 안주하는 직장인의 삶으로 빠져 버릴까 벌써부터 걱정하는, 정신줄 놓지 않고 살고 싶어 하는 성실한 당근. 이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땐 어떤 생각도 자유롭지 못했어”
유리: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은 아마도 20대 초반엔 떠올려보지 못했던 그림이었을 것 같은데, 당근의 20대는 어땠어?
당근: 고등학교 때까지는 정말 범생이로 살았고 그게 너무 싫었기 때문에 대학교 가서는 정말 놀았어. 몇 달 동안 일요일마다 청년부가 좋다고 하는 교회들을 혼자 찾아 다니고, 오후에는 노동자집회에 가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찾아 다녔는데, 어느 순간 주변을 보니까, 다들 공부를 하고 있는 거야. 깜짝 놀랐어.
대학교 1학년 때,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고 있다가 (고등학교 때도 엎드려 잔 적이 없는데) 깨어보니 나를 제외하고 모두 다 열심히 뭘 적고 있는 거야. 어? 대학교는 이렇게 하는 거 아니랬는데?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어. 진짜 등골이 오싹하면서…. 대학교 가면 맘 편히 놀라고 그러잖아. 난 그걸 정말 믿었던 거지. 내가 88만원 세대의 비애를 몰랐던 거야.
우울했어, 혼자 다녔기 때문에. 구원을 찾아 교회를 찾아간 건데 만족스럽지가 못해서 집회에 가보면 또 집회도 그다지 만족스럽지가 않고. 되게 소외감 느끼고 외로웠어. 그 두 개가 다 그랬어. 지금은 그걸 되게 반성해. 구원자는 사실 없고. 내 안에서 구원의 힘을 찾아야 되는데 자꾸 외부에서 찾으려고 했던 거지. 그래서 불교로 개종한 것이기도 해. 불교는 내 안에 부처가 있다고 하잖아. 나를 다스리라고 하는 게 너무 매력적이었어.
어쨌든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는 어떤 생각도 자유롭지 못했어. 생각은 많은데 그래 봐야 난 공부를 해야 되고, 취직도 하지 못했고. 돈의 한계, 시간의 한계 때문에 머릿속에 든 것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마음에서 접고, 접고, 또 접고. 실행하지 못하니까 결론이 항상 안 나는 거야. 그게 많이 우울했던 거 같아.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었어. 정체성 없이 만난다는 게 부담스러웠지. 그래서 연애하는 것도 생각 안 했어. 정체성 없이 누구랑 사귀고 싶지 않았어.
88만원 세대, 그리고 나
당근: 나는 우리 세대, 같은 20대와 동질감을 느껴본 적이 없어. 물론 개인들의 경험은 다 다르겠지. 하지만 우리는 소통할 기회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 몰라. 386처럼 같이 데모했던 경험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고, 또 문화도 빈곤했잖아. 우리 세대한테 유일했던 모임이라고 생각해보면 취업 스터디 정도?
그래서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막 슬펐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도 깨닫지 못한 내 정체성을 누군가 얘기해 주는 것만 같아서 감격했던 기억이 나. ‘아, 우리 되게 비참하구나, 되게 슬프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
유리: 그러니까 네겐 정체성이란 게 정말 의미가 큰 가봐. 잘 모르는 사람들이랑 그냥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뿐인데도 같이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게 기뻐? 그냥 세대의 얘기고 직접적인 너의 얘기가 아닌데도 그렇게 와 닿는다는 게 신기해.
당근: 언젠가 종로를 걷고 있는데 외국어학원 창가에 어떤 남자애가 이렇게 엎드려서 억지로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걸 딱 봤어. 정말 누가 봐도 그건 억지로 하고 있는 거였어. 되게 건장한 남자가 거기 앉아서, 그것도 혼자서. 억지로 억지로 공부하고 있는 그 마음이 확 와 닿아서 마음이 안 좋았거든.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도 그 학원가를 다녔던 적이 있어. 물론 난 그때는 공부를 열심히 안 했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애들을 보면 ‘어쩜 저렇게 열심히 할까’ 여기면서, 그런 애들이 되게 멀어 보였고 한편으로는 열등감도 느끼면서 난 절대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새 20대 후반으로 가보니까 ‘그렇게 걔네들을 보면서 내 안에서 방황했던 나나, 어떻게든 영어공부를 했던 걔네나 별반 다르지 않구나’하는 게 느껴졌어. 그래서 내가 세대라는 얘길 하는 거야.
유리: 하긴 ‘나’를 찾으려면 ‘세대’라는 큰 그릇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겠구나. 그 안에서 너 자신이 더 잘 설명되기도 하고.
당근: 응, 나는 이름 붙여지는 게 되게 중요한 거 같아.
‘장래가 유망’해서 택한 직업, 사회복지사
당근: 20대에는 스펙도 쌓지 않고 취직 준비도 안 하고 내 멋대로 했기 때문에, 소위 ‘모범적’인 길을 안 걸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도 대학 졸업 즈음엔 내게 실망을 많이 하셨고 의견 충돌도 많았지. 정말이지 졸업을 하고 나니 ‘내가 뭘 해야 되지?’하는 생각에 참 당황스러웠어. 내 미래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살았던 거야. ‘내가 뭘 원하지?’만 맨날 고민했지, 구체적으로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선 계속 미뤄왔거든. 부모님은 내게 많이 화를 내셨지만 그래도 엄마가 사회복지 대학원이면 보내준다고 그래서 갔고.
유리: 엄마가 사회복지 얘기를 꺼내셨어?
당근: 응. 엄마가 유망할 거 같다고. 나는 사실 갈 생각 없었어.
유리: 이걸 쓰라는 거야, 지금? (둘이 동시에 웃음)
당근: 공부하고 싶었어. 학부 때 전공이었던 행정학은 사회과학이라고 생각 안 했고, 사회과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내 돈으로 대학원을 갈 처지가 안 되니까 엄마 아빠가 보내준다고 해야 갈 수 있는 거였지. 엄마는 ‘주변에도 이걸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좋다고 하더라’면서 평생 직업으로도 삼을 수 있고 자격증도 있고 하니까 유망하다고 보신 거지. 근데 맞는 말이야.
유리: 그래? 사회복지사가 유망한 직업이라고는 생각 못했어.
당근: 사회복지는 일자리가 없을 수가 없어. 복지 예산이 늘어야지 선진국이 되는 거니까. 사회복지도 사회과학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학문에 매력을 못 느꼈기 때문에 처음에는 강하게 거부했어. 그렇지만 내게도 별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해서 마이너스될 것도 없잖아’ 하는 심정으로 간 거지. 처음엔 많이 방황했어.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정책’보다 내가 ‘사회복지’와 맞는 부분이 더 많다는 걸 알겠더라고.
익숙한 광경에서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정직한 눈
지하철에 와서 다시 수다를 떤다. 껌을 파는 할머니가 오셔서 ‘아가씨들 이거 하나만 사라’고 쪼그라든 손을 내민다. 할머니가 간절히 눈빛을 보내는 그때 대부분의 우리는 별다른 수 없이 침묵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떠나고 그 어색한 순간이 끝나는 데에는 십 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하고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눈 앞에 떡 하니 벌어진 일이지만, 손에 잡히는 실체지만, 보고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당근은 그럴 수가 없다.’ 그게 자신이 사회복지사를 직업으로 택한 이유다.
당근: 어떤 교수님이 한국은 아주 기본적인 사회안전망도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라고 한 적이 있어. 드라마를 보면 교통사고 한번 당했다고 집안이 서서히 그러다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얘기가 참 많잖아. 한국은 정말 그래. 남 얘기가 아닌 거지. 사고 당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노숙인들을 보면 ‘춥겠다’라는 생각보다는 되게 불안했어. ‘저 사람들이 저렇게 살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지?’하는 생각으로. 근데 이건 절대 착한 게 아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느 순간부터 현실을 직면하고 나니까 되게 좋았어.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사회복지학이 참 도움이 되었던 거 같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사회복지학이 계속 고민하게 만들었어. 매일매일 볼 수밖에 없거든. 내가 내 일에 만족감을 느끼는 건, ‘안됐다’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그 노숙인들을 보고 대하고 있기 때문이라서야.
이렇게 점점 더 위험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내가 행복해지려면, 그런 위험이 닥쳐도 쓰러지지 않을 만한 조건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거고, 그게 바로 사회안전망인 거지. 심정적으로는 모른척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안도감도 느끼고.
유리: 누군가는 희생이라고도 떠벌릴 수 있는 일을 안도감이라고 하네?
당근: 아니, 또 다른 누군가는 이럴 수도 있지. ‘저 사람들은 저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 너는 안도하냐?’고. 내 안에는 안도와 죄책감이라는 두 가지 양가적인 감정이 있어. 그래, 그런 게 있으니까 지금도 안도한다고 얘기하면서 죄책감을 느껴. 어쨌거나 나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이 사람들의 존재로 인해서, 이 사람들의 불행이 있기 때문에 돈을 벌고 있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 좀 답답할 때가 많아.
사회복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된 이론이 있어. 바로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이야. 롤스는 정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게 만드는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을 쓰고 무언가를 선택하게 한다면, 최소한 지켜졌으면 하는 개개인의 기준선이 나타날 거라고 했어. 가령, ‘그래도 벌이가 한 달에 50만원은 넘었으면 좋겠다’라는 식의, 그게 바로 최소극대화의 원칙(max-min principle)이야.
가난이라는 문화가 되게 슬럼화되어 있고 게토화되어 있잖아. 모르려면 평생 모를 수도 있어. 누가 알고 싶겠어. 그런데 나는 부자의 문화는 알고 싶지 않거든. 그것은 사치라고 생각하고 쓸데없는 욕구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의 문화는 좀 더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지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 되고 적어도 이 정도의 존엄은 지켜줘야 된다는 최소극대화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 거지.
그래서 내가 목표로 하는 사회복지사로의 정체성은 ‘옹호자’야. 지금은 그저 손 떼고 룰루랄라 즐겁게 사는 게 아니라서 좋아. 고민만 할 뿐 아니라 이제는 그걸 일로써 직접 건드리기도 하며 조금씩이나마 바꿔나가고 있다는 것도.
“OO 사회복지사입니다~”
유리: 영혼을 파는 게 아니라 너무 다행이네! 취직하니까 사는 건 어떻게 달라?
당근: 취직을 하니까 생활의 틀이 생기잖아. 출퇴근이 생기고. 주말에는 쉬어도 되고. 나는 그런 걸 바래왔나봐. 대학원에서는 그런 ‘틀’이란 게 없는 ‘자율’이 오히려 나를 너무 옥죄었어. 주말에도, 수업이 끝난 후에도 계속 과제하고 공부해야 하는 그 생활에 너무 짓눌렸다는 생각이 들어. 내 시간이 없었어. 게다가 내 돈으로 다닌 대학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말 다니기 싫었는데 안 다닐 수가 없는 거야. 내가 대안도 없고, 어떻게든 졸업은 해야겠고. 괴로웠던 적이 더 많았던 거 같아.
그런데 지금은 돈을 벌어오니까 가족들이 이제야 정식으로 대우를 해줘. 사실 예전엔 독립을 참 많이 꿈꿨었는데 그걸 떠나서 가족들이 나를 인정을 해주니까 내가 진짜 정체성이 생긴다는 걸 느꼈어. 집에서 돈을 벌어오는 건 나 혼자니까 엄마 아빠가 더 고마워하는 거 같아. 의료보험도 내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동안은 계속 엄마한테 용돈 받는 학생이었고 때문에 엄마 아빠는 내가 스물다섯이든 여섯이든 일곱이든 나를 성인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어. 하지만 나 역시도 그게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성인처럼 내가 뭘 결정한다는 게 되게 어려웠어. 근데 가족들이 이제 나를 성인으로 봐주니까, 그리고 지금은 나 스스로도 성인이라는 자각을 하고 살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아.
그리고 좀 주책이긴 한데, 요샌 어디서건 내 소개를 해야 할 때마다 그냥 ‘당근입니다’하면 될 일도 꼭 ‘당근 사회복지사입니다’하는 게 입에 배어버렸어. 정체성을 찾은 게 너무 좋은가.
당근의 말에는 우울한 듯하면서도 깜짝 놀랄 만큼 깨끗한 빛깔이 한줄기 제 색깔을 드러낸다. 그래서 내가 당근이란 사람을 푹 맘 놓고 믿을 수 있나 보다. 당근이 일하는 지역자활센터가 그녀만의 독특한 빛을 알아봐주는 좋은 공동체였으면 하고, 마음을 담아 바래본다. 유리▣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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