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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시대에 잊고 있었던 맛 “씨앗, 할머니의 비밀”

식탁 위의 다양성…토종씨앗 지켜온 여성농민들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다. 얼마 전 좋아하는 해외배우의 라이브 영상을 보다가 외국어 속에서 갑자기 ‘먹방’이라는 말이 나와서 놀랐다. 이렇듯 해외에서도 통용되는 용어로 자리 잡았을 만큼이니 먹방은 한국에서 분명 대세가 된 흐름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먹방 영상이라는 걸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타인이 음식에 대한 욕구를 드러내고 또 그걸 충족하는 영상을 보는 것에 대해 그다지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를 먹는 일도 귀찮은데 남이 먹는 모습을 왜 봐야 하는지 의문도 있었다.


한때는 ‘먹는다’는 행위를 꽤 좋아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큰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적게 먹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매일 꼬박꼬박 세 끼를 챙겨 먹지만 먹는 재미가 사라졌다. 맛있다는 감각이 들 때도 그리 많지 않다. 그냥 먹는다. 가끔은 그래도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서 일명 ‘맛집’을 찾아가곤 하지만 실망감을 안고 돌아갈 때가 많다.


내게서 식욕이라는 게 언제부터 희미해지게 된 걸까? ‘이제 대학에 갔으니 살을 빼야 한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던 때부터일까, 취직 후 독립을 했을 때부터일까, 돈이 부족해서 저렴하게 구성해야 했던 식사 시간이 차츰 부족한 시간 속에서 빨리 해결해야 하는 행위가 되어버렸을 때부터일까,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망가진 위장을 달래는 약이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린 때부터일까.


먹는 일에 시큰둥해져 버린 나에게 정말 오랜만에 먹는 것에 대한 설렘을 안겨준 책을 읽었다. 여성농민들이 토종씨앗을 지켜온 과정과, 그렇게 키워낸 다양한 채소들이 가득한 밥상차림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 <씨앗, 할머니의 비밀>(할머니가 차린 토종씨앗 밥상과 달큰한 삶의 이야기, 김신효정 지음, 소나무, 2018)이 그것이다.


▶ 김신효정 글, 문준희 사진 <씨앗, 할머니의 비밀>(할머니가 차린 토종씨앗 밥상과 달큰한 삶의 이야기, 소나무)


어쩌면 아는 맛, 어쩌면 모르는 맛


어떤 음식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서 먹고 싶어질 때는 두 가지 경우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어서 그 맛이 궁금하거나, 이전에 정말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보게 되었을 때.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음식들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책에서 묘사하는 맛을 알 것 같은데 잘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또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옥수수라고 하면 그냥 옥수수인줄 알았는데 메옥수수와 쥐이빨옥수수는 대체 뭔지? 된장도 쌈장도 아닌 밀장은 또 뭔지? 궁금증이 더해갔고 그건 곧 먹어 보고 싶다는 욕구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흰당근, 삼동파, 쉬나리팥, 반달콩, 호랭이콩, 속청콩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채소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떻게 생겼나 싶어 인터넷에서 검색해봐야 할 정도다. 검색 결과에 뜬 사진들을 보면서 이런 채소도 있었나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다 똑같다고 생각했던 양파도, 당근도, 콩도, 팥도, 밀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이름(종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하나로 다 퉁쳐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꾸역꾸역 먹었으니, 먹는 재미가 떨어진 건 필연적인 일이었는지 모른다.


▶ 언니네텃밭 토종씨앗사업단에서 판매하는 토종 조선무 나박김치 ⓒsistersgarden.org


국가가 통제하고 사라지게 한 우리 먹거리


책을 읽으며 ‘신기한 채소사전’이 있다면 등장할 것 같은 희한한 이름의 채소들을 만나게 되자, 이 채소들이 내 식탁 위에 올라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엄마에게 몇 개 이름을 들려줬지만 잘 모른다고 하셨다. 어촌과 농촌의 모습이 뒤섞인 작은 마을에서 자란 아빠에게도 물어봤지만, 어떤 채소는 처음 들어본다고 하셨다.


조금 놀랐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의 윗세대들에게도 ‘토종씨앗’에서 나온 채소들이 그렇게 가깝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토종씨앗’이 사라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국가라는 거다.


<씨앗, 할머니의 비밀>에는 1980년대 미국에서 값싸게 수입된 밀가루가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하고, 농협이 돈이 되지 않는 토종 밀을 더 이상 수매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참밀 농사를 접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농협은 조합원들에게 쌀농사가 아니라 수박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쌀은 수입해서 먹으면 된다는 이유였다.


“한국의 농촌 근대화 과정은 오래도록 지켜 온 것은 낡고 가치 없는 것으로,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바꾸어 버려야 하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렇게 씨앗도 밥상도 철모르는 이들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다.”(p53)


식탁 위의 밥과 음식들이 심심해지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대체된 건,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들여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뺏겨서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식탁 위로 올라오는 것들마저도 이미 통제되고 있었던 거다.


식탁 위의 다양성은 ‘혼밥’을 하는 이에게도, 모두가 추구해야 한다고 강요받는 ‘정상가족’ 구성원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다양한 맛과 향, 영양소를 지닌 토종씨앗은 대량 생산과 (농약을 이용한) 쉬운 생산 방식에 밀려나 그 자취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 언니네텃밭 토종씨앗사업단에서 판매하는 토종 미숫가루에 들어가는 잡곡들. ⓒsistersgarden.org


토종씨앗을 지켜온 ‘할머니’, 여성농민들 이야기


그렇게 우리의 식탁 위가 제한되고 단조로워지는 와중에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토종씨앗을 지킨 사람들이 있다. 대량 생산을 위해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화학농법과 농기계 사용을 장려하던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도 농약 사용을 줄이고 유기농 농사를 연구 계발한 현장에 있던 사람들, 1970~1980년대 개발의 광풍 속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를 향해 떠났을 때 농촌에 남아 농업을 지킨 사람들이기도 한 그들은 바로 여성농민이다.


책에 등장하는 아홉 분의 할머니(여성 농민)들은 우리가 몰랐던, 숨겨져 있었던 영웅들이다. 이분들은 여성이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 받지 못하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일찍 결혼해야 했고, 시집살이과 농사일과 가사일, 출산, 육아까지 도맡아야 했던 시절, 가부장제 구조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모든 투쟁을 해왔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여성’으로서의 삶의 이야기들은 보면 물론 답답한 부분도 있다. 왜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살아내야만 했을까?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분들이 여성농민으로서 자부심을 드러내고, 여성농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들이 해 온 일들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여성 ‘농민’으로 살아왔다는 걸 말이다.


글자는 모르지만 농사짓는 방법은 줄줄 꿰고 있는 전문가인 할머니들은 어느 계절에 무엇을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어떻게 키워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씨앗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땅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땅이 지속적으로 씨앗(생명)을 품어낼 수 있는지, 왜 이걸 지켜야만 하는지를 알고, 그걸 지켜내며 살아왔다. 할머니의 일이 사회에서는 ‘여성’의 일로 평가절하 되는 일이 있었을망정, 당신들 스스로는 그렇지 않았다. 힘들고 고되게 해 온 일들은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할머니들은 고되고 힘든 삶을 누군가 반복하길 원하지 않는다. 후배 여성농민들이 그런 과정을 겪지 않도록, 여성농민회 등의 활동을 하면서 농사 방법도 알려주고 같이 공부하고 연구하기도 한다. 역사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험한 역사를 반복하지는 않게 말이다.


▶ 제주우영공동체에서 생산한 토종 독새기콩 청국장찌개. ⓒ언니네텃밭 토종씨앗사업단


‘혼밥’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척박한 사회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척박해 진 건 우리의 식탁 위와 쌀과 밀, 채소가 자라는 논과 밭일지 모른다. 한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향 가득한 나물을 음미하지 못하고 많은 양의 음식을 펼쳐 놓고 먹는 ‘먹방’ 콘텐츠 앞에 앉아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 증거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화학약품이 아닌 자연퇴비로 가득한 땅과 토종씨앗을 지켜온 여성농민들의 이야기가 중요한 때다. ‘엄마의 밥상’이 그립다고만 할 게 아니라, 우리의 밥상이 만들어져 온 과정에 눈과 귀를 기울이자. <씨앗, 할머니의 비밀>이 그 비밀을 알려줄 테니.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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