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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허먼의 <헬렌 켈러> 평전 

대부분의 어린이용 위인전처럼 헬렌 켈러 역시 위인전에서 장애를 이겨내고 인간적 승리를 거둔 여성이자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노력한 천사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헬렌 켈러와 애니 설리번

‘천사’라는 박제된 이미지와 판에 박힌 서사를 걷어내고 난 후의 많은 것들이 궁금해진다. 헬렌이 정말 ‘천사’같은 성품만을 지니고 있었을까? 평생 예외적인 장애인으로써 관찰 당하면서 살아야 했을 텐데 억하심정이 생기지 않았을까? 평생을 바쳐서 헬렌을 가르친 애니 설리번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도로시 허먼은 대중적인 이미지 뒤에 가려진 헬렌 켈러의 입체적인 모습을 발굴해낸다. 여기에는 4년간에 걸친 철저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됐다. 헬렌 켈러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유행할 때 몇 차례 FBI의 혐의 리스트에 오를 정도로 체제 비판적인 인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은이는 헬렌 켈러가 장애에 대한 낯설음과 두려움, 거부감이라는 대중 심리를 통해 걸러진 결과 사회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은 착한 성인으로 남았다고 이야기한다. 헬렌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장애를 극복한 소녀로 유명해진 로라 브리지만 역시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인 감수성이 선호하는 순수하고 고결한 여성으로 이미지화된 바 있다.

여성참정권 지지하는 체제비판적 인사였던 헬렌 켈러

지은이는 헬런 켈러의 활동 궤적과 미국 사회와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한편, 헬런 켈러와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빚었던 관계와 그 심리적 갈등을 편지 등을 통해 꼼꼼하게 추적한다. 예컨대 애니 설리번은 결코 희생적인 선생님이 아니었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주민의 딸로 태어난 애니는 빈민보호시설에서 사랑했던 동생의 죽음을 이겨내야 했으며 그녀를 추행하려는 남자들과 싸우면서 고된 성장기를 보냈다. 그 결과 그녀는 “세상이란 뿌리부터가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라고 믿었다.

애니는 헬렌을 교육시키면서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유년기의 외로움에서 비롯된, 사랑을 받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충족할 수 있었다. 확실히 헬렌과 애니의 밀착된 관계 사이에서 흐르는 감정은 평범한 선생/제자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애정과 집착의 경계를 넘나드는 깊은 종류의 것이었다.

헬렌 켈러가 활동하던 시절 미국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형편없었다. 때문에 헬렌 켈러는 자신이 천재 소녀나 성인으로 이미지화되거나 실험 대상이 되는 일을 기꺼이 수락하면서 장애인 권리 찾기에 힘쓴다. ‘볼 수 있는 것은 빛이며 볼 수 없는 것은 어둠’이라는 견해는 헬렌을 비롯한 시각 장애인들의 사회 활동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장애인이 결코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님을 널리 알려냈다.

도로시 허먼은 헬렌의 입체적 모습을 발굴했다

한편 사회운동가로서 헬렌은 다소 감상적이고 소박하기는 했지만 좌파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억압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사회주의는 헬렌에게 최초로 고통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배출하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엠마 골드먼과 같은 무정부주의자와 급진주의 지도자들과 친구가 됐으며 마르크스와 레닌을 열렬히 숭배했다.

그러나 헬렌 주변의 사람들이나 후원자들, 매체 편집자들은 헬렌이 장애인에게 요구되는 착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우려를 표명했으며 그녀에게 화를 냈다. 이는 장애인이 사회운동가의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이 당대의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이중적으로 어려운 문제였음을 잘 보여준다.

헬렌의 후원자들은 전투적 여성 참정권자와 사회주의자를 지지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을 반대하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부 출신의 보수적 견해를 지닌 가족들부터 헬렌과 마찰을 빚었으며, 귀족적인 취향의 애니는 보드빌과 같은 대중적인 형태의 공연을 즐기는 헬렌의 소박하고 민중적인 취미를 불편해했다.

헬렌의 사회 활동은 그 자체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갈등이 충돌하는 장이었다. “사람들은 헬렌 켈러를 불쌍히 여기면서 장애인이 자신의 신체조건을 극복한 성공사례로 추켜세웠다. 하지만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간혹 날카로운 의견을 말할 때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헬렌이 남긴 일기나 편지는 헬렌이 장애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군식구’가 되어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또한 장애 여성들을 가르치기를 원했는데, 여성들이 교육을 받으면 남성들이 여성이 약한 성(性)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관계나 결혼과 같은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포기해야만 하는 현실적 한계를 씁쓸하게 토로하기도 했다. 그 때는 애니가 헬렌에게 ‘강간이란 여자의 동의 없이 여자를 학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 너무 자유주의적인 것이 아니냐고 비난 받을 정도로 여성의 성이 억압당하고 있었다.

한편 그녀는 유명인사가 된 자신의 처지와는 달리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차별적인 현실 때문에 슬퍼했다. 그러나 명사가 된 ‘찬란한’ 헬렌에 대해 많은 장애인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질투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분명 헬렌은 ‘혜택 받은’ 장애인이었으며 본의 아니게 구축된 선한 이미지는 장애인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일상적인 규범이었으니 말이다.

시각장애인 협회 임원 중 누군가는 이천 장이 넘는 헬렌의 아름다운 사진 가운데 딱 한 장,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눈물을 흘리는 사진에 대해 “너무 심각. 치워버릴 것.”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한다. 나머지 사진 속에서 헬렌은 육체적인 정상성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춘 ‘성인’ 이미지였다.

이 에피소드는 헬렌 켈러가 죽고 난 후 그녀가 위인전 등의 매체를 통해 사회에 어떻게 수용되어 왔는가를 예견하는 것 같다. 헬렌 켈러는 장애를 극복한 한 명의 개인적인 위인이었을 뿐, 결코 장애인에게 차별적이고 ‘정상’에 집착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명되지 못했다.

<헬렌 켈러> 평전은 헬렌 켈러라는 인물에 대한 복원인 동시에 사회가 장애문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되짚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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