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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한 칸의 존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질병과 함께 춤을>② 아픈 몸의 ‘자립’



나는 근육관련 질병을 가지고 있다. 희귀난치성 질환인 ‘척수성 근위축증’으로 근육이 약화되고, 운동 발달 결여로 나이를 먹을수록 근육 상태가 악화되는 진행형 질병이다. 질병은 장애를 가져왔다. 나이가 들면서 장애도 점차 심화됐고, 현재 나는 중증의 장애여성이다. 난 서른이 넘어서야 질병으로 인한 장애임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진 명칭 없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장애였다.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은 방 한 칸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내내 집 안에만 박혀 살다시피 했다. 자의든 타의든 그때 그 시절은 그럴 수밖에 없던 환경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나마 외출할 수 있었던 병원은 7살에, 학교는 14살이 된 1989년 2월 졸업식 이후 단절됐다.


집에만 있게 되면 ‘쟨 뭘 몰라’라는 무시를 당하게 될 거 같았다.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대문 바깥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면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했다. 책이나 TV, 라디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늘 대문 밖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 정보들을 모아 내 나름의 바깥세상을 차곡차곡 구성해 나갔다. 그래서 내게 찾아올 수 있는 무시를 무색하게 만들 승부수를 가진 집순이가 되어 갔다.


집에서 늘 앉아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바깥. (촬영: 은주)


나는 걷지 못한다. 그래서 문턱이 높은 방을 나갈 수가 없다. 어릴 적 마당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과 수돗가는 손바닥과 무릎 꿇은 정강이로 바닥을 쓸며 움직이는 나에겐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방에서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먹고, 싸고, 씻을 수 있었다. 뭐든 혼자 하기 어려운 구조와 환경 속에 사는 삶엔 ‘내 인생’이란 게 없었다. 언제나 타인의 삶에 더부살이하는 존재였다.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나의 일상은 늘 누군가의 삶에 얹혀 돌봄을 받는 부담스러움으로 서로에게 인식되고 고착됐다. 나이가 들수록 그 부담은 집안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현실적으로 해소 불가능하게 부여된 과업이 되었다. 더이상 눈이 떠지지 않는 날이 와야만 이 모든 거로부터 서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20대 후반까지 늘 집에서만 지냈다. 가족들이 학교나 직장으로 가고 조용해지면 아침잠 한잠 더 자고 일어나 쟁반에 차려진 밥을 먹고 라디오를 들으며 집안을 정리하고 청소했다. 영화 <빠삐용>(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 1973년) 주인공처럼 거실 양쪽 벽 사이를 앉아서 왔다 갔다 하는 운동을 했다. 지는 해가 들어오면 방으로 들어가 책 몇 장 넘기다 깜박깜박 조는 하루가 나의 일상이었다.


집에만 있으면 갈 데라곤 방밖에 없다. 세상이 들려주는 혀 차는 소리로부터의 도피처이자 타인의 시선이 없는 유일한 공간이다. 방문이 닫힌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편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현듯 비참했다. 내가 이 세상에 있을 곳은 방 한 칸이 전부라는 생각에. 나는 그렇게 자신을 방 한 칸의 존재로 여기게 됐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자립생활 체험홈 도전


어린이를 지나 청소년도 지나 ‘성인’이라는 구분에 들어가게 된 20대는 내게 또 다른 막막함을 주는 나이의 시작이었다.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거나 재수생이 되거나 취직을 한다는 평범한 소식들이 들려왔다. ‘넌 어떻게 살 거야? 뭐 하고 살 거야?’라는 물음에 나도 평범한 거 중 하나로 대답할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방 한 칸의 존재로 사는, 가방끈이 짧은 중증장애인인 나의 상황은 누구와도 공감하지 못할 막막함으로 침묵하기 일쑤였다. 벼룩시장, 교차로, 신문, 인터넷 등을 뒤지듯 보는 게 일상이었다. 나름 그렇게라도 하다 보면 뭔가 할 수 있는 걸 찾을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한 해 또 한 해를 보냈다.


2004년 29살, 인터넷에서 장애인 자립생활 체험홈(탈시설 혹은 탈재가脫在家 의지가 있는 장애인이 자립생활을 경험해 볼 수 있도록 거주할 주택과 자립생활 프로그램을 단기간 제공한다)을 알게 되어 한 달간 가족을 설득해 서울로 올라왔다. 태어나 평생 살아온 강원도를 떠나 서울로 가겠다고 했을 때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 집 밖도 못 나가는데 타지에 가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앵벌이 시키는 곳 아니냐, 낯가림 많아 말 한마디도 못 하면서 어찌 살겠다고 나간다는 거냐 등등 여러 걱정과 우려를 줄기차게 들었다. 하지만 나 또한 꿋꿋했다. 한 달 동안 마지막까지 이어지던 엄마의 반대는 ‘죽기 전에 한번은 집을 나가서 살아봐야겠다’는 내 고집에 꺾였다. 내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는데, 내가 꺾일 순 없었다.


10월 중순 오빠랑 서울로 올라온 날, 체험홈에 입소하며 서울에 정착했다. 그날 오빠는 저녁 늦게까지 강원도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혹시나 올 내 연락을 기다리며 서울에 있었다고 했다. 내가 맘이 바뀌어 집으로 가겠다고 하길 내심 기다렸다고.


난 체험홈에 입소해 지내며 여러 일이 있었다. 집에만 있었다보니 심각한 길치여서 나가면 길을 잃기 다반사였고, 한강 유람선을 타러 갔다가 유람선으로 옮겨 타던 중 휠체어에서 떨어져 119 수상 구조선에 실려 응급실에도 갔다. 또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러떨어져 응급실에 가서 턱을 몇 바늘 꿰매기도 하는 등 정말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센터 사람들은 내가 체험홈 입소 기간인 3개월이 끝나면 다시 강원도 집으로 내려갈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서울에 살 전셋집을 알아보러 부동산을 들락거렸다. 단기간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서울 생활은 ‘집 나오면 개고생이 맞구나’ 싶었다. 하지만 집을 나오며 각오하고 들어선 고생문이다. 몇 발짝 더 떼어 봐야겠단 오기가 객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컸기 때문에 서울에 더 남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중증 장애여성이 혼자 사는 객지 생활


부모님이 내게 보증금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금액은 이천만 원이었다. 서울에서 전동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싼 전셋집을 찾아야 했다. 전세보증금 이천만 원 이하로 나온 집이라는 부동산의 연락에 가보면 계단이 많거나 반지하 주택인 경우가 많았다. 한 달 동안 집을 구하러 다닌 끝에 그나마 조건에 맞는 집을 발견했다. 다가구주택 1층이었으나 문턱과 문지방이 있어서 휠체어 접근이 어려워 집주인에게 경사로 설치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집주인은 이해해줬고 경사로 설치는 내가 알아서 하고 이사할 때 원상 복구하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전세보증금으로 천구백만 원을 넣었다. 남은 백만 원으로 생활비를 쓰며 일자리를 찾다가 2005년 자립생활센터에 취직하게 됐다. 월 급여 5만원이라는 조건으로. 그렇게 5만 원으로 시작한 첫 급여는 1년여 동안 꾸준히 올라 최저임금 70만원이 되었다. 월급으로 생활이 가능해지게 되어 청약 저축도 들며 미래를 준비해갔다.


서울살이를 시도할 수 있었던 건 활동지원서비스 역할이 컸다. 2005년도인 당시는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이전이었다. 하지만 내가 입소했던 체험홈을 운영한 자립생활센터에서 시범사업으로 활동지원서비스 사업을 했다. 그덕분에 나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이용자였다. 나에게 주어진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은 평일 하루 2시간이었다. 휴일과 주말, 야간엔 그 시간마저도 없었다. 24시간이라는 하루를 2시간의 서비스 이용으로 먹고, 씻고, 청소, 이동 등을 하며 살아낼 수 있어야 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으며 무릎 꿇은 정강이로 바닥을 쓸며 움직일 수 있었을 때였다. 다가구주택이었지만 실내 구조는 원룸과 같아 웬만한 건 혼자 해결이 가능했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어른 2명이 잘 정도의 방이지만 내가 움직이기엔 너무 넓었다. 방을 쓸고 닦으면 1~2시간이 후딱 가 있고, 세수하러 갔다 와도 한 시간, 화장실을 갔다 오면 1~2시간, 샤워하고 옷 입는 거는 3~4시간 정도 잡고 시작해야 했다.


뭐든 하고 나면 진이 빠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먹을 기력조차 없었다. 화장실을 갔다 오는 것도 너무 귀찮고 힘들었다. 하루의 먹거리를 ‘초코파이’ 절반 크기인 ‘빅파이’ 하나로 때웠다. 물도 거의 먹지 않았다. 한 모금도 안 먹고 지내는 날도 종종 있었다. 입이 짧기도 했지만, 허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움직이는 것에 긴장과 힘듦이 배어든 날들이었다.


혼자 있다가 넘어지면 움직이지 못해 못 일어나거나 다칠까 봐 두려워 늘 휴대전화와 함께 움직였다. 혹시나 했던 걱정은 어느 날 덜컥 현실이 되어 찾아왔다. 접시물에 코를 박듯이 방바닥에 앞으로 ‘콕’ 고꾸라져 머리를 들 수 없었고 숨이 가빠왔다. 마침 손이 닿는 곳에 있던 휴대전화로 동네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지인이 와서 날 일으켜 앉혀줘서 살아났다. 하마터면 죽을 수 있었다며 서로 깔깔거리고 웃긴 했지만, 활동보조서비스가 없는 시간은 중증장애인에게 생사가 오갈 수 있음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움직일 때 팔이 후들거릴 정도로 힘과 긴장이 더해지고 있었고, 근육병으로 인한 내 장애도 하루하루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나의 몸은 집에서 휠체어 없이 바닥에 앉으면 혼자 이동이 어렵다. (촬영: 배미영)


휠체어를 혼자 타고 내릴 수 없는 나는 출근하기 위해 2시간의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을 이용했다. 오전 8시에 활동지원사가 오면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샤워하고 옷 입고 청소하고 휠체어를 탄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2시간에 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활동지원사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소요시간은 크게 차이가 났다.


활동지원사가 나를 안아 들어 올려서 휠체어에 앉혀 태워줘 출근하면, 퇴근할 땐 집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한테 부탁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나가던 낯모르는 사람과 집에 같이 들어가 휠체어에서 내리는 도움을 받았다. 휠체어를 탈 때처럼 안아 들어 올려 방바닥에 앉혀줘야 휠체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매일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품에 안겨야 하는 부담과 거리낌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내 몫이었다. 몇 년을 매일 낯선 이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집에 들어가는 객지 생활은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게 했다. 도움을 주고 갔던 사람이 몇 분 뒤 다시 돌아와 문을 두드리거나,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문을 강제로 열려고 하는 일 등등 별의별 일들이 있었다. 무서움을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할 때는 그렇게 종종 있었다.


길가 1층에 위치한 내 첫 주거공간은 대학교 근처라 밤새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조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밤새 불을 켜놓아 누군가 있는 집임을 나타내 내 안전을 지키려 안간힘을 썼다. 중증 장애여성이 혼자 사는 객지 생활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나날이었다. 활동보조서비스가 안정되지 않은 시기에 자립했던 나의 일상은 늘 이 악물고 버텨내야 했던 고됨이었다. 2006년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2007년 활동보조서비스가 전국적으로 시행되며 일상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이 점차 늘어 오후에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귀갓길의 두려움은 해소될 수 있었다.


집주인이 바뀌며 보증금을 두 배로 올려달라는 새 집주인의 요구에 이사를 선택했다. 안전하지 않은 주거공간을 떠나 원룸으로 이사하며 밤에 불을 켜놓지 않게 되었다. 보증금이 올라간 만큼 빌라는 2중의 잠금장치가 있었고, 고층이라 길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발자국 소리나 소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5년 만에 밤에 불을 끄고 불안하지 않은 마음으로 잘 수 있게 되었다. 또 웃풍이 덜해 겨울에 보일러와 수도 동파 방지를 위해 온수를 틀어놓지 않아도 되는 등 여러모로 좋았다.


이사한 집에서 혼자 욕실에 갔다가 넘어져 못 일어났다. 활동지원사가 올 시간이 될 때까지 넘어진 상태로 기다리며, 앞으로는 혼자 못 움직이게 될 것을 직감했다. 내 몸의 근육병이 더욱 진행된 것이다. 이후 내 몸은 돌부처마냥 활동지원사가 바닥에 앉혀주면 그 자리에서 조금도 옆으로 이동하지 못했다. 혼자선 눕거나 일어나는 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집에 있어도 활동지원사가 없으면 화장실, 식사,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욕실에서 넘어진 그 날 이후 중증장애인이 아닌 최중증장애인이 됐다. 


나의 근육병은 치료되지 않는 질병이고, 증세가 악화됨에 따라 장애도 심화되는 병이다. 몸의 근육양이 점점 줄어들어 팔, 다리는 가늘어져 갔다. 날이 갈수록 힘도 약해졌다. 이러다 더이상 움직이지 못할 순간이 오게 될 줄 예상됐기에 담담했다. 때맞춰 활동보조서비스 시간도 더 늘어나 야간에도 서비스 이용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질병과 함께 춤을> 연극워크샵을 마무리하며 동료들이 써준 마음을 읽고 있다. (촬영: 조한진희)


지역사회 일원으로,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내 삶의 질은 장애운동 투쟁의 성과만큼 생활면에서는 나아졌으나 장애인권운동활동가로서 노동하는 삶은 벅차졌다. 투쟁 사안은 늘어갔고, 퇴근이나 휴일의 의미는 없다시피 한 활동가의 노동 강도는 점차 증가했다. 집회 현장에서 쿵쾅거리는 큰 앰프 소리 앞에서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피로는 점점 더 누적돼갔다. 사람과의 관계도 일이 되어버리는 게 활동이기도 했다. 일로 사람으로 지쳐 장애운동에 속하는 모든 활동을 일순간 정리했다. 


퇴직금도 실업급여도 받을 수 없는 최저임금의 노동자였던 활동가의 통장 잔액은 가벼웠다. 가벼운 통장으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됐고, 그동안 꾸준히 쌓은 청약 저축 횟수로 임대아파트를 신청해 당첨되어 근처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매달 나오는 수급비, 안정적인 주거환경과 활동보조서비스 등으로 일상생활은 백수가 되어도 큰 흔들림 없이 잘 유지될 수 있었다. 


일을 그만둘 당시 번아웃이 찾아왔었다. 독립해 잘 살아내기 위해 일하고 공부하며 애썼던 나는 가시 돋친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사는 마을을 산책하며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 서울에 10년 넘게 살면서도 못 해본 서울 명소를 구경하고 여행도 가고 친구와 가족도 자주 만나며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동네에서 백수로 몇 년 살다 보니 달리 옆집이나 윗집 등과 마주치면 인사나 가벼운 얘기, 먹거리를 나누는 평범한 동네 주민이 되어 살고 있다. 


마을에 사는 중증장애인은 의도치 않게 부각되기도 하고, 쉽사리 관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전동휠체어를 탄 할아버지는 무심코 지나치지만 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되돌아와서 신기함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어른의 몸집도 아니고, 어르신이라고 할 만큼 나이든 외모도 아니라 익숙지 않은 모습인 거다. 몸집이 작은데 어린이 같지 않은 사람이 타고 있는 휠체어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유모차나 자전거로 쉽게 오인된다. 아이들이 물어보기도 하는데, 그러면 나는 웃으며 설명해준다. 내게는 소소한 재밋거리다.


어릴 때는 지금보다 장애가 경했지만 신변처리, 이동 등이 어려워 대문 밖을 꿈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질병이 심화되고, 장애도 최중증 상태인 40대 장애여성인 나는 독립해서 살고 있다. 15년 전, 죽기 전에 ‘방한칸의 존재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 인생을 한 번 살아보고 죽자’라는 절박함으로 집을 떠나왔다. 살기 위해 필요한 의식주, 사회서비스 등으로 안정된 삶을 만들고자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절박함이 만들어낸 힘으로 버틸 수밖에 없던 힘든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삶이 사람처럼 사는 거 같아 좋다. 이제는 더이상 누군가의 입에 걱정거리로, 부담으로, 한숨으로 오르내리지 않는다. 비로소 주체적인 존재로 인정받으며 살게 되었다. 남은 삶은 이 뿌듯함을 좀 누리며 살고 싶다.  은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세상을 바꾸는 작은 변화, 이 연재는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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