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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만화 읽는 할머니’…다양한 노년 여성의 서사

쓰루타니 가오리 글 그림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를 읽고



BL(Boys’ Love 준말. 미소년들끼리의 동성애를 다루는 장르) 만화를 보는 할머니가 있다. 일흔다섯 살 이치노이 씨는 땀을 식히러 책방에 들어갔다가 예쁜 그림에 끌려서 만화책을 한 권 산다. <너만 바라보고 싶어> 코메다 유 지음. 왜 그런지 책방 점원들은 잠시 술렁인다.


한자 교실을 운영하면서 혼자 살고 있는 이치노이 씨는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정갈하게 밥을 해서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쳤다. 삼 년 전에 떠난 남편의 위패 앞에 앉아 오늘 겪은 이야기를 이야기하다가 낮에 사 온 책이 있다는 걸 떠올린다. 얼마 만에 보는 만화인가, 편안하게 엎드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응? 아이고야! 어이쿠. 감탄사가 쏟아진다.


소년과 소년의 뺨이 닳아 오르고, 둘이 포옹을 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서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키스를 하는 그림들을 보면서 이치노이 씨는 읊조린다.


-오모나….

쓰루타니 가오리 글 그림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1권 중에서 (현승희 역, 북폴리오, 2019)


다음 권도, 그다음 권도 궁금해서 책방으로 서둘러 간 이치노이 씨를 맞이한 건 책방 알바생 우라치다. 우라치는 이치노이 씨가 맨 처음 BL 만화를 사 가지고 간 날을 기억하고 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온 이치노이 씨를 보고, 우라치는 바로 읽으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마터면 ‘제가 가진 3권을 빌려드릴까요?’ 물을 뻔 한다. 다음 편 이야기가 궁금하고 얼른 보고 싶은 그 마음을 잘 아니까.


우라치는 BL만화 마니아이다. 그런데, 이건 비밀이다. 엄마에게도, 가끔 만나는 아빠에게도, 어릴 적부터 친구인 츠무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방안 깊숙이에 넣어두고 혼자서만 몰래몰래 꺼내 본다. 그러니 이치노이 씨의 다급한 마음을 알아도 빌려드릴 수 없는 노릇.


이치노이 씨가 주문한 만화책을 찾으러 다시 책방에 온 날, 두 사람은 책방에서 일어난 작은 사고를 수습하면서 BL만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치노이 씨는 우라치가 이미 <너만 바라보고 싶어>를 읽고 좋아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반가움이 솟아 불쑥 말하고 만다.


-괜찮다면 차 한 잔 할래요? 집에서 서예 교실을 하는데 아이랑 노인밖에 안 와서, 줄곧 누군가와 만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우!


좋아하는 만화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 싶은 마음, 우라치도 잘 아는 마음이다. 늘 그러고 싶었으니까. 이치노이 씨와 우라치는 함께 만화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드문드문 조심스레 만남을 이어가게 된다. 여느 친구들처럼, 이치노이 씨는 우라치에게 좋아하는 만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고, 우라치는 이치노이 씨가 좋아할 만화가 뭘까, 성애 묘사가 과격한 그림을 싫어하지는 않을까, 고민하면서 만화를 빌려준다. 일흔다섯 이치노이 할머니와 열일곱 우라치 학생은 툇마루에 앉아 만화에 관한 새로운 정보는 공유하고 캐릭터들을 비평한다. 답답해하기도 하고, 흉도 보며, 함께 웃고 새로운 해석을 늘어놓다가 같이 카레를 먹고….



만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1~3권. 쓰루타니 가오리 글 그림, 현승희 역, 북폴리오)의 주인공 이치노이 씨와 우라치 이야기를 두근두근 따라 읽다 보면 웃음이 나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특히 이치노이 할머니의 이런 대사를 만날 때마다 함빡 웃게 된다.


-이런 책이 유행인가요? 남자끼리 그…

-난 이런 거 처음 읽었는데, 뭐라고 해야 좋을까? 응원하고 싶어진다우!


이치노이 할머니는 처음 하는 경험에 대해 폐쇄적이지 않다. 난생처음 본 BL에, 내가 알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니까 사랑이 아니라고, 혹은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거부하지 않는다. 응원해줘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다.


<너만 바라보고 싶어>의 작가가 도쿄 전시장에 와서 직접 동인지를 판매한다는 소식에 둘은 함께 만화 이벤트에 가는데, 나이도 체력도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이 그곳에서 겪는 에피소드와 대화들, 생각의 변화들도 흥미롭지만, 이치노이 할머니의 반응과 표정, 동작이 무척 현실적이면서도 따스하다. 요즘 젊은 것들은 이런 곳에 돈을 쓰냐고 잔소리하는 어른을 나는 매스컴에서 더 많이 봤는데, 오모나-하면서 함께 경험하는 마음, 설레며 조심스럽게 수용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그동안 막연히 갖고 있던 ‘나는 아마 고약한 할머니가 될 거야’ 하는 불안이 조금 수그러든다. 그런데 나는 왜 고약한 할머니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을까.


이 책에서 만난 이치노이 씨도 할머니다. 페트병 음료를 따서 꿀걸꿀꺽 마시는 것도 힘이 드는 일흔다섯 노인. 딸은 멀리 비행기로 열 몇 시간 가야 하는 곳에 떨어져 살고 있다. 혼자 일어나 혼자 잠들고 새해를 혼자 맞이한다. 단단한 호박을 한 번에 자르는 것이 힘들어서 쉬었다 해야 하고, 한번 잠에서 깨면 더 자고 싶어도 다시 잠드는 게 어렵고, QR코드를 읽는 법을 모른다. 한 달에 두 번 병원에 가서 약을 타 먹어야 하고, 계단을 오르기가 어렵고, 미용실만 다녀와도 지쳐 쓰러진다. 그런데 이치노이 할머니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노년의 외로움과 사회 부적응 관련해선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혼자서 요리책을 보며 음식을 정갈하게 해서 먹는 것이 편안하고, 병원에 긴 대기 줄이 지루하니까 십자말풀이를 준비해가는 센스가 있다. 새해에 딸을 보러 가는 것보다, 설 연휴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잠을 실컷 자는 것이 즐겁다. 그건 딸 내외가 이치노이 씨 집을 찾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여력이 된다면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기쁘게 만들어 주지만, 명절이라거나 딸과 사위에게 전통적인 엄마 노릇을 하느라 피곤할 때 무리해서 음식을 하거나 돌봄 노동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치노이 씨는 자신이나 딸이나 피차 이제 왔다 갔다 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이 머리카락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는 섬세함이 있고, 예전에는 풍성했던 머리가 이제는 듬성듬성해서 흉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예전을 그리워하느라 지금 발견할 수 있는 예쁨을 모른 채 지나치지 않는다. 기다리던 연재 잡지 발행일 날에는 아침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고, 우라치와 BL 만화 이야기를 실컷 하고 나면 ‘주변을 확 달리고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이치노이 할머니는 있을 줄 알았던 ‘다음’이 없기도 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한다. 앞으로 대충 85세에 죽는다 치고, 좋아하는 BL 작가 신간이 1년 반에 1권씩 나온다 치면 몇 권을 읽을 수 있을까, 헤아려보다가 아흔까지 힘내볼게요, 외치기도 하고, 시력이 좋아진다는 쓰리디 사진 눈운동 책을 떠올리기도 한다. 몸이 힘들고 숨이 턱턱 차고 남들이 나잇값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만화 전시 이벤트에도 가고, 딸에게 어린 친구 우라치를 ‘친구’라고 말하고, 하고 싶은 걸 계속하려고 노력한다.


쓰루타니 가오리 글 그림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중에서


이 만화는 우라치의 성장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라치는 왕따는 아니지만, 학교에서 말이 거의 없다. 반 아이들이 저들끼리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고는 ‘나도 저렇게 좋아하는 관심사로 신나게 수다 떨고 싶다’고 느끼지만, 우라치의 선택은 ‘언제나 바라만 볼 뿐’이다. 또래 문화가 만든 분위기는 더 활발하고 예쁘고 표현을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우라치는 ‘성격상 대박, 쩔어, 이거 읽어봐,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라치 역시 BL 만화에 대해 마음껏 떠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BL 만화를 좋아하는 자신을 잘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를 “나 같은 거”라고 낮게 평가한다.


그런데 어느 날 우라치는 이치노이 할머니를 만났고, BL만화에 대해 신나게 떠드는 경험을 한다. 이치노이 할머니가 BL 만화를 더 보고 싶어서 멀리까지 외출을 하거나, 정성들여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라치도 조금씩 달라진다. 금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야기하는 해방감, “이 나이면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오는 걸까”하고 막연히 생각하던 규율에서 벗어나 “그냥 아무 때나 지금 해도 괜찮은 거구나, 싶어서…”라고 말하게 되고, 조금씩 새로운 시도들을 시작한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해방감은 우라치가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시작점이 된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를 보고 가장 크게 든 감정은 해방감이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한데, 우라치와 이치노이 씨의 캐릭터를 보며 얻는 자유로움, 둘의 모습들이 묘사된 그림을 보는 자유로움이 있다. 청소년 우라치와 쪽진 머리 이치노이 할머니가 손을 잡고 가는 이미지에서 ‘친구’는 어떻다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자유, 편견이 깨지는 해방감이 있다.


무엇보다 늦은 밤, 혼자 사는 할머니가 늙고 주름지고 가느다란 몸으로 샤워를 하고 숱 없는 머리카락들이 물에 젖어 머리통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초라하고 외로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헐렁한 옷을 입고 누워서 편안한 모습으로 비엘 만화를 보는 밤 풍경은 쓸쓸하지 않고 평화롭다. 돋보기를 쓴 채 집중해서 보다가, 오모나-하며 입을 가리며 감탄사를 내 뿜는 얼굴과 눈빛을 보노라면, 깊은 공감과 함께 자유로운 마음이 든다.


이 만화를 볼 때마다, 나는 이치노이 할머니의 이런 모습을 자꾸 눈에 더 담고 싶어진다. 초라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할머니의 모습을 자꾸 보는 건 늙음에 대한 조금 다른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준다. 미화도 과장도 아닌, 주름지고 늙은 모습을 담은 이미지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늙음에 대한 환상이나 불안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꾸 볼 때 두려움 대신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쓰루타니 가오리 글 그림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현승희 역, 북폴리오, 2019)


이런 해방감은 얼마 전 읽은 『여자들의 섹스북』(한채윤 저)을 보면서도 느꼈다. ‘우리 모두 잘 모르는 여자들의 성과 사랑’이라는 부제처럼 여자들의 성과 몸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우라치가 BL만화 마니아인 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남자와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그림으로도 그리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자들 간의 성과 사랑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을 말한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해방감은, 우라치가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이미지들도 좋았는데, 여자들의 몸과 색깔, 사랑을 나누는 자세들이 미화도 과장도 없이 다양해서 내가 내 몸을 수용하게 되는 자유로움을 주었다. 특히 <그림16 할머니의 사랑과 성>이 아주 흥미로웠다. 두 할머니가 사랑을 나누는 그림 맡에는 “나이가 든다고 해서 성생활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이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위를 하거나 사랑하는 이하고 나누는 따스한 스킨쉽을 떠올리면 점점 변해가는 자신의 몸을 긍정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할배의 탄생』,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작별일기』 등을 쓴 작가 최현숙은 늙음에 대한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라고 했다. 두려움을 줄이고, 변화하고 늙어가는 내 몸을 긍정하려면 좋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건 늙어가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겐 청소년의 성장기뿐만이 아니라 노년의 성장담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현명하거나 고통받거나 헌신하거나 고약하지 않고, 혹은 이 모든 것이 다 있는 할머니 모델을 더 많이 알고 싶다. 아프고 약하지만 욕망하고 노력하며 자유로운 이치노이 할머니들을 더 많이, 더 자주 만나고 싶다.


※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을 쓴 작가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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