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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눌렀던 슬픔이 처음 몸 바깥으로 흘러나올 때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③ 더는 내 감정을 짓누르지 않겠다


※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기사보기 


아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질병을 안고 살다


2014년 7월, 수험생활 중에 크론병 진단을 받았다. 크론병을 가진 연예인들이 있어서 그 이름 자체는 어느 정도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크론병이 실제로 어떤 병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크론병은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로, 주로 소화기에서 염증을 발생시킨다. 자가면역질환이 대체로 그렇듯 크론병도 원인 불명의 난치 질환이다. 왜 걸렸는지, 아픈 게 정말 내 책임인지, 어떻게 나을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나처럼 운 좋게 병을 초기에 발견해서 관해기(증상이 거의 없는 상태)에 빠르게 진입한 20대 ‘청년’이라면, 겉보기에 건강한 모습 때문에 아픈 사람으로 인식조차 안 되곤 한다. 아플 때 내가 꾹 참기만 하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질병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어느 정도 노력하면 질병을 감출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과 씨름하면서 열심히 통증을 참았다.


책들이 놓인 나무 책상 위에 알약이 늘어져 있다. ‘아자비오’라고 적힌 흰색 알약들, 이름 모를 약통 둘과 그 앞에 떨어진 흰색, 하늘색, 노란색의 알약들. 노란색 알약이 담긴 포장지와 약통에는 약이 거의 남지 않았다. (출처: 안희제)


나부터 나의 질병을 부정하며 지내다 보니, 주변에서는 나의 질병을 외면했다. 더이상 참기 힘들어졌을 때에도, 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질병을 계속 다시 설명해야 했다. 그러다가 질병이 단지 나의 어려움이 아닌, 내 삶을 설명하는 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동녘, 2019)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전, 나는 <낭독극: 아파도미안하지않습니다>라는 연극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읽었다. 내가 ‘질병 세계의 언어’와 ‘질병권’을 고민하게 해 준 책이었기에, 나는 바로 신청서와 함께 에세이를 제출했다. 그리고 낭독극에 함께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신청 https://socialfunch.org/dontbesorry

춤을 추다,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사실 내가 이 낭독극에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것이 ‘연극’이라는 말 대신 ‘낭독극’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이유가 크다. 정말 무대에 나가서 읽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연습을 이끌어 주는 연출자 ‘빠빠’가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연극임을 분명히 밝혀주신 덕분에, 이 기회에 몸을 다루는 법을 배워 보자는 마음으로 연습에 임했다.


아파서 빠진 첫째 주 이후, 둘째 주에는 아직 어색함이 많아서 연습에 충분히 몰입하지 못했고, 셋째 주에는 감기 기운과 서울시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인해 빠졌다. 아쉽기도 하고, 내가 사람들과 충분히 편해지지 못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넷째 주에 그런 걱정은 모두 사라졌다. 종일 우리는 춤을 췄다. 정교한 형식을 갖춘 무용이 아니라, 틀어져 있는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그저 몸을 맡겼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초등학교 학예회 이후로 연극이나 춤 같은 건 처음이었고, 평소에도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일상의 거의 전부이니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는 그냥 머뭇거리며 걷는 척만 했다. 그 이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너무 어색했는데, 나의 몸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걱정되어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한 곡, 두 곡, 세 곡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사람들도 점점 다양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쪼그리기도 했다. 나는 주로 어딘가에 기대거나 앉아서 몸을 움직였는데, 그러다가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진 순간이 있었다. 함께 연습하던 한 분이 연습공간을 가로질러 빠르게 걷다가 점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편안함이나 안도감을 느꼈다. 그 사람의 점프가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였다.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연습실에서. (출처: 다른몸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몸의 아픈 부분을 인식했다. 연출자 선생님은 지금 가장 불편하거나 거슬리는 몸의 부분을 짚어 보라고 했다. 어깨, 허리, 목 뒤… 내 경우는 목 뒤와 어깨 사이였는데, 목 뒤와 조금 더 가까웠다. 선생님은 바로 그 아픈 부분이 몸을 이끌게 하라고, 그 부분이 가고 싶은 곳으로 온몸이 가게 하라고 얘기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습 초반에 연출자 선생님은 춤을 추지 않고 몸의 뻐근한 부분을 풀어줘도 된다고 했는데, 몸을 풀어주는 것과 아픈 부분이 내 몸을 이끌게 하는 것은 내 몸의 힘들 안에서 연결되고 있었다. 나의 몸은 특정한 방식으로 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몸의 아픈 부분을 풀어주는 일은 몸의 부분들 사이의 긴장을 안 아픈 부분의 입장에서 해소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픈 부분에 온몸을 맡기는 일은 그 긴장을 아픈 부분의 입장에서 해소하는 일이었다. 나는 왼쪽 어깨와 목 뒤 사이의 어느 근육에 이끌려 가듯, 때로 그 근육을 풀어주듯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아마 그것은 모두가 각자의 몸에 집중하고 있기에 타인의 시선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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