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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재난지원금, “돈보다 내가 잊혀지지 않았다는 게 좋았어”
‘초록우산X자립팸’ 탈가정 청소년 지원사업에서 엿본 기본소득의 가능성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여러 가지다. 특히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주목 받지 못했던 정책적 이슈가 논의의 중심이 되는 결과도 낳았다. 그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나마 기본소득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 효용성과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나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의 깊이를 한 겹 더 입혀줄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탈가정 여성청소년들에게 자립팸이라는 주거 공간을 지원하는 단체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이하 자립팸)에서 여성 후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 거다.

 

▲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X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재난을 견디는 평등+안전망: 탈가정 후기청소년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사업” 결과 발표회 안내 자료 중에서.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이 있었는데 왜 또 긴급재난지원금이냐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은 1차만 ‘전 국민’에게 지급되었고 이후엔 선별적으로 지급되었으며, ‘가구 단위’로 지급된 탓에 실제로 수령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가정을 벗어났거나, 자립을 했음에도 서류 상으론 여전히 ‘가구’로 묶여 있는 탈가정 청소년들도 그 중 하나였다.

 

정부와 지자체의 선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지켜본 자립팸은 정부를 대신해 긴급재난지원금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함께 2020년 10월,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 없이 1인당 40만원의 현금을, 총 15명의 계좌로 지급하는 프로젝트” <재난을 견디는 평등+안전망: 탈가정 후기청소년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사업>을 진행했다.

 

지난 18일 저녁 온라인으로 열린 사업 결과 발표회는, 프로젝트를 통해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은 당사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또한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함께 의미를 부여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확장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내가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좋았어”

 

사실 자립팸은 앨리스(‘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에 머무는 여성청소년)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관련 기사: “조건없이 월 30만원 지급” 탈가정 청소년에게 미친 영향 http://ildaro.com/8651) 하지만 그 기본소득은 자립팸에 머무는 앨리스에게만 지급되기 때문에 ‘출국 앨리스’(자립팸을 떠난 여성청소년)는 받을 수 없다. 이번 긴급재난지원금은 출국 앨리스들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결과 발표회에서 사회를 맡은 자립팸 한낱 활동가는 코로나 이후 ‘긴급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던 이들을 위해 고심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자기 서사를 드러내지 않고서는 지원금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한 한낱 활동가는 “선별하지 않고 지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별이 이뤄지는 순간, 고립과 배제, 낙오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세간에는 여전히 ‘무조건적인 지급’에 의심의 눈초리가 많다. 자기 서사를 털어놓고 증명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돈을 받으면 그냥 막 쓸 것이라는 거다. 정말 그럴까?

 

▲ 탈가정 후기청소년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사업을 평가하는 집단 인터뷰에 참여한 앨리스들의 기본 정보.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사업 결과 발표를 위한 집단 인터뷰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그런 ‘우려’와 달리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드러냈다. 특히 초록우산X자립팸의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은 청소년들이 지원금을 그냥 돈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소속감’ 그리고 ‘자신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감각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초록우산X자립팸 지원금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좋다고 생각했고요. 지원금을 받아서 좋다기보다는 제가 잊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자립팸과 엑시트(자립팸은 사단법인 들꽃청소년세상이 운영하는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EXIT’ 활동에서 출발했다)에서 날 챙겨주는군. 너무 감사하다. 나는 잊혀진 존재가 아니었어’ 하고 좋아했어요.” (아리, 21세)

 

한낱 활동가는 “경제적 지원으로 출발한 재난지원금이 어떻게 사회적/관계적 의미로 확장될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잊혀지지 않았다’는 관계적 안정감, 자신이 소속 집단으로부터 돌봄과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감각”이 중요했다는 거다.

 

이번 지원금뿐만 아니라 정부의 재난지원금을 수령한 경험이 있는 수현(24세)은 “정부 재난지원금을 받으면서, 국가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과 함께 납세 의무의 보람참이 있었다”고 했다. 아리 사례와 마찬가지로, 지원금을 통해 공동체에 ‘소속감’을 갖게 되었다는 발언이다.

 

일을 하고 있든 아니든, 모두에게 소중했던 지원금

 

지원금을 받을 당시 무직이었던 주희(20세)는 긴급재난지원금을 통해 취업의 욕구가 더 생겼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지원금으로 받은) 이 정도의 돈으로도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얼른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구직도 엄청 알아보고…”

 

주희와 달리 공공근로를 통해 당시 임금노동을 하고 있었던 수현의 경우엔 지원금이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고 했다.

 

“지금 벌고 있는 돈은 생존에 필요한 것 위주로 소비를 하는데, 이 지원금을 통해 생존에서 약간 벗어난 것들의 사용을 계획할 수 있었어요. 꼭 먹고 사는 데가 아니라, 좀 다른 걸 해볼 수 있는 계획을 세워볼 수 있었죠. 생존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 초록우산X자립팸 지원금을 통해 즐긴 마음의 여유, 산책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꼭 특정 기간에 소비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지원금이었기 때문에 저축을 한 청소년도 있었다. 아리는 “한동안 소비가 난장판이 돼서 저축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 지원금은 사용 기한이 없으니까 안 쓰고 남겨둬야겠다 싶어서 저축했다”고 했다. 그는 “저축을 해야 되는 이유와 뿌듯함”을 배웠다고 덧붙였다.

 

한낱 활동가는 “현금을 지원을 할 경우, ‘무조건 막 쓸 것’이라는 등의 근거 없는 우려가 사회적으로 팽배하지만, 실제로 당사자들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필요한 것을 계획하고, 소비하거나 저축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점은 “생존은 인간 삶의 최저기준일 뿐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최저선 너머, 그 이상을 지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이라고 칭할 수 있다”고 말한 한낱 활동가는 “생존에 급급하지 않을 때 저축을 통해 미래를 대비할 수 있으며, ‘생존 이외의 것’들을 꿈꿀 수 있었던 지점”을 의미 있게 짚었다.

 

개인에게, 자격을 묻지 않고, 기한 제한이 없는 현금

 

청소년들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초록우산X자립팸 지원금은 이들의 삶에 적재적소하게 쓰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그려보는 원동력이 되었다. 단순히 그냥 ‘돈을 줬기 때문’은 아니다. 이 지원금이 “개인에게, 자격을 묻지 않고, 기한 없이 어디서든 쓸 수 있는 현금”이었기 때문이다.

 

▲ 지원금으로 월세를 낼 수 있었다.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경우, 가구 단위로 제공했기에 여러 한계가 있었다. 한낱 활동가는 “많은 탈가정 후기청소년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지 않거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원가정 주소지로부터 행정상 전출하지 못하면, 가구 단위로 지원을 결정하는 정부/민간의 모든 복지정책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래서 ‘개인’이 받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청소년의 경우 “현금 지원의 사용처를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등 권리 주체자로서 권한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자격을 묻지 않는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수급(기초생활 생계급여)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이에겐 ‘심사/자격 유무’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기초생활수급을 받을 땐 자격이 있잖아요. 얼마 이상 벌면 안 되니까 그거 맞추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자격을 유지하는데 힘을 써야 하고 그게 좀 귀찮기도 하고 어쩔 땐 좀 비참하기도 하고. ‘앞으로 좀 더 잘 살라고 이 돈 주는 거 아니었나? 내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이 돈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이번 지원금은 어떤 자격도 없이 받은 거였죠. 그래서 ‘더 잘 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기초생활수급이 ‘너가 힘들게 살아서 받는 돈이니까, 이 돈 계속 받으려면 계속 힘들게 살던지, 아님 그만 받던지’의 느낌이었다면 이번 지원금은 ‘이 돈으로 한번 잘 살아봐라.’ 그런 응원의 메시지로 느껴졌어요.” (아리)

 

현물이나 어떤 서비스가 아니라 현금을 지원하는 건, 당사자들을 의존적이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립심을 길러주는 효과도 있었다.

 

언제까지나 (정부와 지자체 등이 제공하는) 의료, 법률 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반문한 아리는 “아프면 어디 병원을 가야 하는지, 병원비가 보통 얼마인지 알아야 하는데 서비스로 지원을 받다 보면 내가 결제하지 않으니까 나한텐 어떤 지식이 안 쌓이는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힘이 길러졌음 좋겠다”는 거다.

 

한낱 활동가는 물품/서비스 지원과 현금 지원의 특징이 각각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리가 이야기한대로 “결과적으로 서비스(치료)를 받았을지라도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선택, 판단, 결정을 해야 하는지 경험하지 못하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스스로의 역량이 발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사 먹은 밥.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


그리고 “단순히 지원방식을 현금으로 다 전환하는 것이 해결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현금 지원을 적극적으로 시도해 청소년의 주체적 결정 과정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인적 관계망과의 연결을 적극 고민해야 한다.”

 

일회용을 벗어나, 장기적이고 주기적인 기본소득을!

 

지원금을 경험한 이들은 한결같이 “한번이라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는 한편 “왜 애초에 정부가 이런 제도를 마련하지 않고 민간에서 이를 해결하고 있는지 의문”을 드러냈다.

 

자립팸을 통해 기본소득을 받은 경험이 있는 민지(19세)는 “기본소득은 주기성이 있는데 재난지원금은 한 번 주고 끝”이라며 “주기적이면 안정적인 느낌이 있는데, 일회성 재난지원금은 내 계획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수현 또한 “지원이 지속되면 일회용으로 받는 것보다 더 넓은 소비 계획이 가능해서 쓰임과 사용처에 대한 계획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며 한번이라 지원금을 더 넓게 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한낱 활동가도 이번 지원금이 “일회성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긴 어려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도가 의미 있는 건, 단지 ‘긴급’한 상황을 피할 수 있게 한 게 아니라, 이런 지원금이 “장기적이고 주기적인 기본소득으로 발전했을 때 좀 더 안정적인 삶의 계획이 가능할 것”이라는 걸 엿봤다는 것에 있다.

 

발표회가 끝날 무렵, 아리는 “(지원금을 통해) 행복의 맛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자”고 말했다. 코로나 시대에 좀처럼 들을 수 없는 ‘행복’이라는 말이 ‘함께’라는 말과 어우러졌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향한 도전이 곳곳에서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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