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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아시아나케이오 부당해고에 맞서 400일 

 

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여성 저널리스트가 뜨거운 시선으로 발굴한 한국사회. 이 책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국 사회 의제를 어려운 이론을 빌리지 않고 “인간의 긍정적인 힘”이나 “용기”, “믿음”과 같은 가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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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들 이야기'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선 자리를 지키는 일도, 정해진 장소를 떠나는 일도, 너와 내가 머물 공간을 넓히는 일도, 살아가는 일 자체가 투쟁인 세상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세상이 작다거나, 하찮다거나, 또는 ‘기특하다’고 취급하는 싸움이다. 세상이 존중할 줄 모르는 싸움에 존중의 마음을 담아,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공부하고 노동하는 11명의 필자가 인터뷰를 연재한다. [싸우는여자들기록팀]

 

“싸우는 여자를 쓴다고요?”

“네. 케이오 싸움 말고, 싸우는 여자 김계월이요.”

 

김계월은 거리에 농성장을 세우고 1년을 싸우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코로나19 첫 정리해고 사업장>이란 타이틀을 들고 언론이 찾아왔다.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세 번이나 철거된 농성장 사진이 모 신문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기자들의 질문에는 이골이 났을 터였다. 나 또한 그의 해고(복직) 투쟁에 관해 몇 차례 인터뷰를 했다.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인터뷰 제안을 하고 며칠 뒤, 그는 생각을 좀 해봤다고 했다.

“싸운다는 걸 안 좋은 이미지로 보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걸 되게 많이 느껴. 커가면서 주관이나 가치관이 형성되잖아요. 그걸 어필하기 위해 부모랑도 티격태격해야 해. 자아가 형성되는 순간부터 누군가와 싸우는 게 인생인 거야.”

 

아시아나케이오 해고자들의 복직 투쟁 400여 일. 천막농성, 삼보일배, 점거 농성, 법정소송까지. 싸움에 질려버릴 만한데도 이리 말한다.

“특히 우리 여성들은 삶 자체가 싸우면서 사는 거야.”

 

그는 지난해 생일, 딸에게 책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책 속표지에 이리 적혀 있었다. <1963년생 김계월 파이팅!>

“나는 그게 너무 좋았어요. 딸도 나를 엄마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바라본 거잖아.”

 

▲ 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 아시아나케이오 지부장 김계월 씨. 400여일째 부당해고에 맞서 복직 투쟁중이다. (촬영: 박행란)

 

51세 김계월, 서울 재입성, 일하기가 더 나빠진 세상

 

1963년생. 한국 나이로 59세. 김계월 씨가 서울로 (다시) 올라온 것은 8년 전이다. “빚 갚을 게 많았어요.” 돈 벌러 왔다고 했다. 첫 만남이었는데도 그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 말을 하기 전까지 전라도 광주식 김치의 감칠맛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광주에서 스무 해 넘게 살았다. 지역 음식, 자매처럼 지내던 이웃, 자주 가던 무등산과 찜질방, 딸과 같이 가던 시내의 서점들.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그가 두고 온 것들에 대해 말했다.

 

여자 일자리 많다는 서울은 계월 씨에게 공항에 자리 하나를 마련해주었다. 기내 청소였다. 여자 일이라는 게 빤했다. 잘리기 싫으면 성실해야 하는 자리. 그러나 성실에 비해 보잘것없는 월급이 주어지는 자리였다. <아시아나케이오>라는 회사 소속이라 했다.

 

‘아시아나’라는 대기업 이름이 앞에 붙었지만 큰 환상이나 기대는 없었다. 결혼한 이후엔 직장을 가져본 적 없지만, 돈벌이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김계월 씨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지고 살았다. 비정규직, 하청업체라는 말도 제법 들어봤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비행기 안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무거운 모포, 독한 약품, 비좁은 기내, 연장근무 강요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잡힌 일정표에 몸이 닳아도, 열심히 산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사람 없다’며 비행기에 냉난방은 고사하고 전등도 켜주지 않는 야박함 앞에선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바뀐 건지, 세상이 바뀐 건지. 돌아본 곳엔 이십 대의 모토로라(코리아) 사원 김계월이 있었다.

 

“그때는 일은 힘든 거 없이 다녔는데. 세월이 갔잖아. 그런데 사람 일하기가 더 나빠진 거야.”

 

24세 김계월, 다국적 기업 모토로라 취직

 

공항에서 일한 이야기를 할 때는 ‘빨리빨리’ ‘쪼그려 앉아서’ ‘힘줘서’ ‘이고 지고’ ‘쎄가 빠지게’ ‘땡볕 아래’ 같은 단어를 잔뜩 넣어 말하던 사람이, 30년 전 모토로라 생산공정에서 일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니 별 것 없다고 한다.

 

“다 자동이었어요.”

 

당시 모토로라는 30여 개국에 100여 개의 생산업체를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통신장비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주로 만들었다. 당시로는 최첨단 설비라 불렀을 것이다.

 

“칩을 가져오면 그걸 기계에 넣어. 기계가 불량 거르면 박스에 넣고 컴퓨터로 입력하면 돼요.”

 

편하게 일했다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 “무려 30년 전인데?” 그러자 그가 말한다. “20대들이 중노동하는 데가 어디 있어?” 2021년의 50대 노동과 1987년의 20대의 노동을 혼란스럽게 비교하는데, 그 자신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젊어서 그랬나?” 한다.

 

김계월 씨는 충남 홍성군에서 어리굴젓 장사를 하던 집 막내딸로 태어났다. 넘치게 사랑받았으나, 없는 살림에 대학 등록금을 탈 처지는 아니었다. 언니가 있는 서울로 와서, 친구들이 근무하던 모토로라(코리아)에 원서를 넣었다.

 

“600% 보너스 받으며 명동에서 산 메이커옷 입고” 출퇴근했다. 외국계 기업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다. 그렇게 좋은 회사가 노조는 못 만들게 했다.

 

1987년에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회사로부터 위험인물로 찍혔고, 아무도 그 곁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계월 씨는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노조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겁 없이 그 사람을 만나서 얘기한 거지.”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의 영향이라고 했다. 김지하라는 시인도 알게 되고, [말](1985년에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로 창간하여 1989년 정기간행물로 등록한 진보적 성격의 월간지.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의 기능을 수행하며 한때 독보적인 진보 매체로 성장했고 많은 언론인을 배출하였다. 2009년 3월로 발행이 중단되었다)지도 읽었다고 했다.

 

“우연히 보게 됐는데,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는 걸 깨달은 거에요. 텔레비에서 87년도 노동자들 투쟁(1987년 6월항쟁 이후, 전지역과 업종에 걸쳐 폭발적으로 노조가 설립되고 파업 투쟁이 벌어진 일을 두고 87년 노동자 대투쟁이라 부른다)을 다루는데, [말]지하고 전혀 내용이 다른 거야.”

 

게다가 사내 ‘위험인물’ 중 한 명이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인 김재호 씨였다. 당시 계월 씨는 회사 사보에도 종종 시를 써내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중이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문학상 수상자를 만나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수개월 뒤, 노동조합 설립 발기인 12명에 계월 씨도 속하게 된다.

 

“몰래 했지. 대학로 흥사단 이런 데 가서 몰래몰래 모의도 하고, [노동법 해설]이라는 책을 8천 원인가 얼마에 사 가지고 공부했어요.”

 

▲ 모토로라 재직 시절 20대 김계월 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잡지. 전국노동자문화운동단체협의회가 만든 <노동자 문화창조>(1989년, 현장문학사)에 실린 김계월 씨 인터뷰 중.


26세 김계월, 노조 설립을 위한 140일의 싸움

 

1988년 12월 19일, 노조를 공개했다. 결성식을 치르는 날, 회사는 대회 장소인 식당 문을 용접해 막아 버렸다. 노조를 만들겠다고 모인 백여 명이 그 안에 있는 상태였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회사는 전기와 물을 차단하고, 에어컨을 가동했다. 한겨울이었다. 일하는 사람은 자부심을 품고 일했지만, 다국적기업 입장에선 노동력이 값싼 지역에 생산기지를 세운 것뿐이었다. 값싸다고 취급한 사람들이 비싼 권리를 찾으려 하니 폭력으로 응답했다.

 

“밤 열 시경, 서울 광장동에 있는 미국계 회사인 모토로라 한국 지사 정문 앞에 노동자와 학생, 재야 인사 3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 구사대는 물러가라! 하며 대치하던 조합원 중 4명이 위협용으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맞섰는데 갑자기 누군가 켠 불이 그들의 몸에 확 옮아 붙었던 것이다. 구사대 쪽에서 ‘어디 불붙여 봐라’ ‘신나인지 확인해 보자’ 등의 비웃음 소리가 나온 직후였다.” (김근태, <겨울속의 풀뿌리>, 노동문학 1호(89.3), 실천문학사)

 

재야인사였던 고 김근태 씨가 기록한 글에서 당시 상황을 엿본다. 12월 29일, 회사의 도발로 노조 조합원 중 3명이 화상을 입는다. 한 명은 의식불명에서 깨어난 뒤에도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노조 위원장마저 구속됐다. 하지만 파업은 멈추지 않았고, 140일을 싸운 결과 노동조합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직원들은 구사대와 노조 조합원으로 갈렸다. 노조가 생기면 회사를 철수하겠다는 회사의 말에, 구사대(직원으로 구성된 파업파괴자)가 생긴 것이다. 계월 씨는 구사대가 가장 많은 부서로 조 이동을 당했다. 이제 그가 ‘불순한’ 사람이 되었다. 1년 넘게, 수백 명이 들어가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고 했다.

 

그래도 스물일곱 김계월은 이리 말했다.

“무릎 꿇지 않겠다는 각오로 버텼습니다. ... 내가 쓰러지면 동료도 쓰러진다는 결의로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나는 노동자가 자랑스럽다: 모토롤라 조합원 김계월씨를 찾아서>, 노동자 문화창조, 1989년, 현장문학사)

 

그로부터 30년 후, 쉰 아흔이 된 계월 씨는 수백 명이 있는 식당에서 혼자 밥 먹던 시절보다 지금이 더 외롭다고 했다. 해고자 다섯이 작은 농성장에서 1년을 보내고 있다.

 

58세 김계월, 다시 농성장에 서다

 

기내 청소 2년 차, 병가를 내고 한 달만에 공항에 왔는데 회사가 소란했다. “출근했는데 웅성웅성하고 난리도 아니야. 노조 생긴다고. 빨리 가입서 달라고 해서 얼른 썼죠.” 그 후로 공항 허허벌판에서 선전전을 해도 춥지도 않고, 밤늦게까지 회의를 해도 피곤하지 않았다고 했다. 노조 부지부장까지 맡았다. 그렇게 달뜬 기분이 2년을 갔단다.

 

하지만 파업을 앞두고 복수노조가 생겼다. 사람들은 회사가 밀어주는 새 노조로 대부분 옮겨갔다. 그가 속한 민주노총(공항항만운송본부 아시아나케이오지부)은 소수 노조가 됐다. 소수가 되어도 노조가 할 것들을 했다. 청소용품으로 독성물질을 사용한 것을 밝혀냈다. 휴게 시간 위반 등으로 발생한 체불임금을 신고했다. 그러자 기내에 에어컨이 틀어졌다. 이제 불 켜진 곳에서 일하게 됐다. 회사가 더는 비행기 안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김계월 씨는 이를 존엄이라 여겼는데, 회사는 비용이라 계산했다. 결국 비용논리 앞에 그와 조합원들은 코로나19를 빌미로 해고됐다. 그때도 계월 씨는 ‘무릎 꿇지 않겠다’는 각오로 농성장을 세웠다고 했다.

 

마음은 같으나 몸이 달랐다. 겨울 농성장에서 그는 갱년기로 열이 올라 버틸 수 있다고 농을 했다. 손발이 찼던 젊은 시절은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노동자로 다시 돌아온” 계월 씨는 그 시절을 복기했다. 잊기 힘든 기억이었다. 힘든 만큼 간절했고, 간절한 만큼 애정 넘쳤다. 그 간절함과 고됨, 그리고 노조에 대한 애정을 30년만에 다시 체감했을 때, 그는 어쩌면 운명 아닐까 말하곤 했다. 그런 그에게 딸은 말했다.

 

‘엄마는 88년에 머물고 있는 거 같아.’

거리 투쟁 1년이 지나가던 때였다.

 

▲ 코로나19를 빌미로 해고된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들은 인천.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로부터 두 번이나 ‘불법 해고’임을 인정받았다. 김계월 씨는 고용노동청 앞에서 매일 같이 아침, 점심, 저녁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촬영: 기선)


29세 김계월, 퇴직과 결혼, 엄마가 되다

 

노조를 몰래 준비하던 여름, 휴가를 맞아 시 습작 교실에 갔는데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연애를 할 때도 애인보다는 동료가, 동료보다는 노조 ‘동지’랑 같이 있는 것이 좋았다고 했다. 노조가 생긴 후, 글쓰기 열망은 노조 소식지로 옮겨갔다. 홍보부장 직책을 맡았다. 흥미롭게 그의 노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이리 전개됐다.

 

“회사 그만두고 결혼해 광주로 간 거지.”

 

내게는 공주가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보다 더 급작스러웠다. 내 표정을 읽은 계월 씨는 말했다. “노조하면서 잠자는 게 소원이었어. 너무 힘들어서.” 쉬고 싶었다고 했다. 내 의아한 표정이 풀렸을 리 없다. 1991년에 결혼을 했다. 여자가 결혼하고‘도’ 회사 다니기 쉽지 않은 시절임을 모르진 않았다. 다만 계월 씨의 표정이 너무 개운해 보여 내 쪽에서 섭섭함을 느꼈을 뿐이다. 그는 나를 설득하듯 말했다.

 

“그때 내가 결혼하고 <태백산맥>을 읽은 거야. 마지막 장을 넘기기가 너무 싫어서 엉엉 울었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어, 그때는.”

 

질리도록 책 읽기, 하루 내내 자기, 그리고 또 하고 싶던 일은 딸을 ‘잘 키우는’ 거였다. 계월 씨는 자신이 공부한 육아책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어릴 적부터 영민했던 딸 자랑을 했다. 둘이 함께 읽은 무수한 책들에 대해 말했다. 평생 장사로 자녀들을 먹여 살린 엄마를 존경하지만, 자신은 ‘집에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여자도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통념(물론 여자들은 그전부터 일하고 있었다)이 형성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 자란 나는 직장을 다닌 엄마를 둔 심정이 어떤지 알았다. 왜 ‘집에 있는’ 이가 꼭 여성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감정을 정리하기엔, 수십 년간 맺어온 모녀의 관계가 내밀하다.

 

계월 씨는 딸이 자신을 엄마만이 아닌 ‘63년생 김계월’로 인정해준 것이 좋다. 인생 멘토 중 한 명으로 외동딸을 거론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엄마’가 아닌 무엇이 되긴 쉽지 않다. 종종 계월 씨는 반찬 할 시간이 없다는 걱정을 했다. 그의 자책 앞에서 ‘반찬 없는 게 뭐 어때셔요’ 같은 내 반박은 힘이 없다. 최근 그의 딸은 일을 늘렸고, 계월 씨는 농성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

 

63년생 김계월의 인생을 응원해

 

‘63년생 김계월 파이팅’이라 말해주던 딸은 해고 1년이 된 날, 계월 씨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가 노조 지부장으로 전화 인터뷰를 한 내용을 들은 다음날이었다.

 

<엄마의 싸움을 예전처럼 응원만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

 

몸을 사리지 않는 투쟁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살살 하라’는 말로 걱정을 누른 시간이 1년이다. 게다가 빚을 지고 올라온 서울이었다. 경제적 여건이 빤한 집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은 다른 구성원들의 협조나 희생을 동반하지 않고 가능하지 않다. 싸우는 동안 그의 몫의 벌이와 돌봄이 멈출 수밖에 없다.

 

계월 씨가 해고(복직) 투쟁을 결심한 그해, 딸은 입사 1년 차였다. 응원받고 싶던 사회초년생 시기를 홀로 보냈다. 싸우는 사람의 시간은 농성장에서 멈춰도, 곁에 있는 이들의 시간은 제 속도를 흐른다. 그러니 묻게 된다. 엄마의 시간은 멈춰버린 것인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20대라고 없을 리 없다. 모든 것을 개인 능력으로 헤쳐가라는 세상에서 20대로 살아가기 위한 계획과 분투의 무게가 가벼울 리 없다. 사는 게 싸움이라면, 딸의 ‘싸움’은 어떻게 지켜보고 있느냐고 질문을 해, 나는 기어코 김계월 씨를 울렸다.

 

<하지만 김계월의 인생을 응원해.>

 

“(아빠랑) 싸워도 돼. 그거 흉 아니야.” 엄마에게 짐짓 조언을 하던 딸은 이제 나이가 들어 김계월이라는 사람의 싸움을 응원한다고 했다. 투쟁하는 이의 가족은 감당하기도, 메워주기도, 기다려주기도, 응원하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지켜나간다. 그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싸우는 사람 옆에 있는 이들의 몫이다. 덕분에 계월 씨의 투쟁은 하루 더 꿋꿋하게 유지됐다.

 

▲아시아나케이오 해고자 복직 요구 3보1배 중에 여성 ‘동지’들과 즐거운 표정으로 포즈를 잡은 김계월 씨. (촬영: 희정)


하지만, 누구의 시간도 멈춰있지 않는다. 딸이 엄마보다 먼저 ‘해고’를 당해 인생 선배가 되고 고용노동센터를 찾기도 했다.(“인턴 기간에 해고되고 그랬어요. 너무 속상해 하더라구. 나보다 해고를 먼저 맛본 애야.”) 그 바람에 지금은 ‘선수’가 되었단다. 그때의 분함을 알기에 엄마의 싸움을 이해한다. 응원하고 기다려주고 메워주는 것은, 단지 가족이어서만은 아니다.

 

‘친구 같은’ 딸이었다. 수다가 멈추지 않았고, 좋은 곳에 가면 서로를 생각했다. 선거날이면 함께 투표 인증샷도 찍었다. 무엇이든 같이 해온 모녀가 이제는 서로가 지닌 시계의 초침이 같은 속도가 아님을 인정하며, 대신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며 간다.

 

30년 전도, 지금도 가진 자의 횡포에 굴하고 싶지 않아

 

다시 돌아와 오늘의 ‘투쟁’ 이야기. 그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하면 ‘아시아나케이오지부(노조) 김계월 지부장’이라 할 터이니, 해고 투쟁에 임하는 자세를 물었다.

 

“내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이유? 부당한 해고니까요.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거지. 예전의 김계월을 찾는 거지. 누명을 벗어야 되는 거야. 그건 뭐 거대한 생각이 아니에요. 굉장히 소박한 거야.”

 

이 소박한 생각이 긴 싸움으로 이어졌다.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들은 노동위원회로부터 두 차례나 부당해고라 판정받았다. 회사는 그 판정을 수용하는 대신 과태료를 냈다. 판정에 불복하는 행정소송에 들어갔다. 수임료만 수억원 대라 알려진 대형 로펌(김앤장)이 변론을 맡았다. 김앤장 측 변호사는 회사가 부당해고자 다섯 명을 복직시킬 수 없는 이유로 ‘경영난’을 들었다.

 

“(30년 전) 거기서도 내가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잖아요.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정당함, 옳고 그름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였어요. 가진 자가 횡포를 부리거나 노동자들을 이렇게 취급하는 건, 못 참는 거야. 그때 나는 굴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도 굴하고 싶지 않아.”

 

[필자 소개] 희정. 기록노동자. 싸우고 견뎌내고 살아가는 일을 기록한다. 『노동자 쓰러지다』,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등을 썼고 올해 [회사가 사라졌다』(공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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