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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찮은 그녀들의 이야기] 과부와 도깨비

 

유난히 도깨비 씨름판 같았던 지난 선거에서도 멋진 장면이 있었다. ‘아닌 밤중에 도깨비’라더니 난데없이 절반의 유권자를 겁박하던 낮도깨비들을 젊은 여성들이 멈춰 세운 것이다.

 

도깨비와 ‘남성성’

 

옛날부터 도깨비 이야기는 많았다. 디지털 한국구비문학대계에서 ‘도깨비’를 검색하면 1,000편이 넘는 이야기가 올라온다. 도깨비의 모습은 다양하다. 구척장신으로 머리가 구름 위로 솟았다거나, 털이 꺼끌꺼끌 하다거나 부숭부숭하다고 한다. 뿔이 있다는 사람도 있고 없다는 사람도 있는데, 성별은 대부분 남자다.

 

▲ 도깨비 방망이, 도깨비 감투, 도깨비 김서방… 현대에 와서도 수많은 도깨비 이야기에서 묘사되는 이미지는 어떤 ‘남성성’이다.

 

도깨비를 한자로는 정(精)이라고 한다. 정력이나 정액에서처럼 남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글자다.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에서 도깨비 방망이는 남근을 빗대며, 시도 때도 없이 불끈대는 젊은 사내의 성욕을 풍자한다. 형과 동생이 얻은 두 개의 방망이는 성욕의 양면이다. 잘 가꾸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보물이 되지만, 잘못 다루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도깨비는 가부장제에서 대접받는 ‘남성성’을 풍자하기도 한다. 패거리를 모으고, 서열을 짓기 좋아하며, 우쭐대면서 몰려다니는 도깨비들은 남성서열집단의 모습과 흡사하다. 어둠을 틈타 눅눅한 다리 밑에 모여 떠들썩하게 출석 체크를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건달들이다. 밤늦도록 유흥가를 맴돌며 ‘사내들의 술자리’를 이어가는 낯익은 무리들과도 겹친다. 그런 남초 무리에서는 망가지기를 무릅쓰며 ‘분위기’를 살리다가도,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는 말을 잃고 겉도는 가부장처럼 도깨비는 밝은 곳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도깨비 감투는 그들이 얼마나 권력에 취약한지 잘 드러내 준다. 감투나 완장은 위계를 표시하는 물건이다. 그는 감투만 쓰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져서 못하는 장난이 없다. 남의 눈에 개의치 않아도 되고, 애써 타인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힘은 감투의 권력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감투에 구멍이라도 생기고 나면 순식간에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김서방’이라고 불리는 도깨비는 ‘남성성’에 가려진 그의 내면을 드러낸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어리숙하며, 우악스러우나 모질지 않다. 한번 돈을 꾸면 끝없이 이자를 갚고, 메밀묵을 얻어먹으면 은혜를 갚느라 골몰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메밀묵이다. 한 사발을 먹어도 금방 배가 꺼지는 허술한 음식이지만, 쌀이 귀하던 시절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날 해먹었던 겨울 특별식이다. 집 밖을 떠돌던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추운 겨울 아랫목에서 오순도순 나누던 가족의 따뜻한 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아주버니’라고 추어주면 지레 감동하여 장남이나 효자 노릇을 하느라 눈물겹게 애쓰기도 한다.

 

힘과 돈

 

도깨비는 여자를 좋아하지만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 모른다. 사랑은 자신의 가장 취약한 모습마저 내놓고 상대의 공감을 얻는 과정이다. 둘 사이의 밀당은 폭력 없이 상대의 몸에 다가가려는 감정 소모를 동반한 노동으로 이어져 있다. 결혼 제도는 이 힘겨운 노동을 여성에게 몰아주는 구실을 해왔지만,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돌보고 위로하는 것은 ‘여자의 본분’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다. 성폭력이나 성 구매는 아예 이 과정을 생략하거나 폭력과 돈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 불멸의 제도다. 사랑에 ‘빠져’ 상처받거나, ‘사내다움’을 잃지 않고도, 타인의 몸에 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을 열어둔 셈이다. 남성 젠더권력은 이 도깨비 통로를 지금껏 포기한 적이 없다.

 

▲ 힘을 과시하는 ‘남성성’의 이면에는 어리숙하고, 무시당하거나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는 취약성이 있다. (출처: pixabay)

 

<과부와 도깨비>는 위태로운 사랑 대신 힘과 돈으로 여성을 지배하려는 도깨비와, 그를 내쫓고 멋지게 살아남은 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천생 과부가 한나 살았었는데 도깨비한테 인제 홀려가지고 끌려다니다 다니다 못해서

“내가 너한테 어떡하믄은” 밤에 마다 만날 끌려다니고 눈떠 보면 막 치마가 그냥 엉망이고 인제 이러니까 “응, 어떡하믄 좋것냐?” 그러고 하룻저녁은 왔길래 그랬드니

“내 각시가 됐으믄 좋것다.” 그러드래.

그래서 그럼 그래준다고 그랬는데(...) 저녁마다 문턱에다 뭐를 갖다 놓드래. 그래갖고 그 여자가 인제 과부가 부자가 됐대거든.>

(한국구비문학대계, 2017년 전남 순천시 윤화자의 이야기)

 

<젊은 과부던갑다. 하릿저녁에 참 비가 부실부실 오는데, 도깨빈가 뭣인가, 도깨비가 오거든. 그래 와가 그래 마 즈그꺼정 우옛던갑더라. 그래 우옛는데,

“뭐가 제일로 소원이고?”카이꺼네,

“돈이 소원이다.” 캐 놓이 돈을 자꾸 갖다 죠(주어) (...) 없이몬 비단도 갖다 주제. 이거 마마 없는 기 없이 자꾸 갖다 죠.>

(한국구비문학대계 1984년 경남 울주군 우두남의 이야기)

 

그는 ‘비가 오는 밤’ ‘과부’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처럼 예나 지금이나 혼자인 가난한 여성은 날씨만 궂어도 도깨비를 걱정해야 하기 일쑤다. 도깨비에게 사랑은 침략과 같은 말이다. 상대의 몸에 다가가려면 먼저 마음을 얻어야 하지만 도깨비는 그 길을 모른다.

 

도깨비의 ‘소원거리’가 돼버린 여자는 혼돈과 무력함과 고립감이라는 공포 삼종세트에 갇혔을 것이다. 우악스레 밀고 들어온 놈이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는지 가늠이 안 되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현실에서 도깨비는 멀쩡하게 알던 남자의 돌변한 모습이기 쉽다. 실제로 (성)폭력 가해자의 대부분은 낯선 사람이 아니며, 범행 장소 또한 피해자의 익숙한 공간일 때가 많다. 부부나 교제 사이라면 (성)폭력 후의 선물세례 또한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암흑 속에서도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잊지 않는다.

 

<인자 과부가 싫증이 나는 기라. (...)

“그래 당신은 뭣을 제일로 싫어하노? 무섭노?” 카이 도깨비는 (...)

“나는 백말피하고 골매이 당산님한테 줄치는 거(금줄禁繩). 그거 제일로 싫지 뭐 딴 거는 싫은 기 없다.” 이 카거든. 그래 인자 또 남자는 또 여자한테 그 카는 기라.

“당신은 뭣이 제일로 싫노?” 카이,

“나는 마 돈만 마 꽉 갖다 놓으몬 마 무섭어 아이고 나 질색이다.” 이라는 기라. 

 그래 가 마 인자 백말로 한 마리 잡아가지고 피로 마 사방에 헡고 금구로(금줄을) 쳤다. (...) 마 뭇 도깨비가 와가 돈으로 마 (...) 온 집안에 (...) 던지 놓고 새벽녁에 되이 인자 뒷동산에 올라가머,

“아이고, 기집이라고 심중의 말 마래이(말아라). 기집이라고 심중의 말 하몬 낭패다.” 카더란다.>

 

그녀가 찾아낸 것은 질문이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공포의 실체를 향해 너는 누구냐고 묻게 된 것이다. 도깨비가 가장 무서워한다는 말의 죽음은 힘의 상실이며, 금줄은 거절을 뜻한다. 요샛말로 ‘고개 숙인 남자’가 될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며, 여자로부터 ‘내게 다가오지 말라’는 통고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편 여자는 가장 바란다던 돈이 가장 무섭다고 대답한다. 도깨비를 벗어나려다가도 번번이 주저앉은 까닭이 돈이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도깨비도 여자도 처음으로 자기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솔직하게 고백한 셈이다.

 

하지만 여자는 연민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다. 폭력을 숭배하고 거절이 불가능한 상대와는 공존할 수 없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호하게 그를 내보낸다. 쫓겨난 도깨비는 도리어 자기가 피해자라며 소란을 떤다. 이른바 ‘꽃뱀’한테 억울하게 당했다는 소린데, 떠들어댄들 여자가 대문을 다시 열어줄 리는 없다.

 

▲ 도깨비가 아무리 방망이를 들고 기세등등해도, 신통방통한 감투를 써도, 그는 새 아침을 맞을 수 없다. 도깨비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긴 밤을 버티고 살아남아 이야기하는 당신이다. (출처: pixabay)

 

도깨비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

 

도깨비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른다. 예고 없이 불쑥 솟구치고, 와락 덮치며, 거칠고 왕성하여 어디로 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화와 공포같이 불현듯 생기는 감정과, 성욕같이 다루기 힘든 욕망은 몸에 사는 도깨비다. 책갈피에도 올라타고 눈꺼풀에도 내려앉으며, 붓이나 싸리비로도 둔갑하는데, 이때의 도깨비는 씨름해야 할 대상을 상징한다. 눈을 감고 피하고 싶어도 풀어야 할 숙제는 내 앞을 가로막은 도깨비와 다르지 않다. 그는 언제나 쉬운 상대가 아니지만 알고 보면 하체가 부실하다. 어르고 달래며 밤새 버티다 보면 동이 틀 때쯤 빈틈을 보이게 마련인데, 바로 그때 왼다리를 걸면 넘어간다. 끙끙 씨름하던 문제가 문득 풀리는 순간 도깨비는 사라진다.

 

도깨비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결말에서는 반드시 도깨비가 쫓겨난다. 아무리 기세등등해도,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신통방통한 감투를 써도 그는 아침을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긴 밤을 버티고 살아남아 이야기하는 당신이다.

 

[필자 소개] 심조원. 어린이책 작가, 편집자로 이십 년 남짓 지냈다. 요즘은 고전과 옛이야기에 빠져 늙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옛이야기 공부 모임인 팥죽할머니의 회원이다.  일다 

 

집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12가지: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제 삶을 따뜻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열두 명이 밀도 있게 들려주는 주거생애사이자, 물려받은 자산 없이는 나다움을 지키면서 살아갈 곳을 찾기 어려워 고개를 떨구는 독자들에게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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