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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망치지 않았어’  (이미정)
 

3代 모녀관계를 다룬 연극 "엘리모시너리"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사랑해야 하는 딸들>에는 3대에 걸친 모녀관계가 나온다. 할머니는 딸이 외모에 대한 자만심을 갖게 될까 봐, 절대로 용모에 대해 칭찬의 말을 하지 않은 채 엄마를 키운다. 오히려 외모에 대한 결점을 지적하며 나무랐기 때문에, 엄마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며 성장하게 된다.
 
“쟤는 왜 이렇게 안 예쁜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는 할머니를 보면서, 엄마는 나중에 딸을 낳게 되면 절대 외모 가지고 뭐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 다짐대로, 딸이 태어나자 언제나 ‘예쁘다’, ‘어울린다’, ‘근사하다’는 말만 하며 키운다. 외모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차갑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말을 하지만, 외모만큼은 절대로 칭찬하는 엄마. 딸이 엄마를 이해하게 된 것은 할머니의 교육방침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모든 엄마들은 자신이 딸이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딸을 키우게 된다. ‘나는 이런 엄마는 되지 않겠어’ 내지는 ‘나는 이런 엄마가 되어야지’ 라는 결심은, 자신이 딸이었을 때 엄마와 구축했던 관계로부터 유래하게 된다. 그렇게 따진다면 딸이 엄마와 갖게 될 관계의 패턴은 할머니와 엄마에 의해서, 즉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되는 셈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만들어놓은 경험의 역사가 그 다음에 태어나는 딸에게 유전되는 것이다.
 
엄마 역시 누군가의 딸이었음을
 
연극 <엘리모시너리>는 할머니, 엄마, 딸의 3대에 걸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들이 최선을 다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왜 어긋나게 되는가에 대해, 담담하고 조용하게 이야기한다. 몹시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애잔하면서도 서늘하다.
 
시공간을 넘나 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간단하게 한 여인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아주 똑똑하고 재능이 많은 소녀가 있다. 그녀는 사회제도의 한계 때문에 재능을 꽃피지 못하고, 결혼을 해야 했다. 학교에 가기를 소망했지만 아버지는 딸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을 해 세 아들과 딸을 낳는다.
 
그녀 안에 있는 열정은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그녀는 딸에게 공부를 시키고 대학을 보내고 싶어한다. ‘날아. 날아올라. 너는 나처럼 되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 네 일을 갖고, 가정에 묶이지마.’ 그러나 소녀의 딸은 날아오르라는 엄마의 희망이 무거워, 날개를 버린다. 엄마의 사랑과 기대가 무거워서 도망친다.
 
그 딸이 자라서 또 딸을 낳게 된다.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항상 곁에 있으려고 하며, 소망을 대신 실현시켜 주기를 강요하던 엄마의 모습에 질렸던 딸은 자신의 딸을 방치한다.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고, 곁에 있지도 않고, 짓눌릴까 봐 무서워 애정표현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 외에 달리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엄마처럼 하지는 않겠어’ 외에는 달리 엄마가 되는 방법을 모르지 않던가. 부정법으로 시작한 사랑은 길을 잃는다. 엄마가 왜 어린 자신을 두고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딸이 홀로 상처받을 뿐이다.
 
딸로서 존재할 때, 엄마로서 존재할 때
 
마샤 노먼의 연극 <잘자요, 엄마>에 대한 리뷰를 썼을 때, 한 독자가 말했다. 딸로서 보았을 때와 엄마로서 보았을 때가 다르다고. 이 연극은 그런 연극인 것 같다고. 옳은 지적이었다. 이제 그만 나를 놓아달라고, 나는 그만 죽겠다고 말하며 엄마를 설득하는 딸의 이야기를 딸의 입장에서 읽었을 때야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딸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지만, 그걸 바라봐야 하는 엄마의 시선이라면 또 얼마나 잔인한 이야기가 되겠는가.
 
재미있는 것은 많은 여성들이 딸이면서 동시에 엄마라는 점이다. 딸로서는 엄마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엄마로서는 내 딸이 나를 지긋지긋해한다는 것이 소름 끼치게 두렵다. 
 
그런 의미에서 모녀관계를 당사자 둘만의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것은 많은 오류를 범하게 만드는 것 같다. 우리가 엄마의 엄마였던 할머니를 보게 될 때, 그리고 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모녀관계 패턴을 보게 될 때, 그때서야 나와 엄마가 갖는 관계의 본질이 보이게 될 지도 모른다.
 
딸은 엄마가 되는 순간, 자신의 엄마에 대해 새로운 이해의 시각을 갖게 된다. 그녀가 누군가의 딸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각인되어 전해지는 DNA 이전의 무언가가 모녀들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고 조용하게 말이다. 이 연극이 힘을 갖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이다.
 
텅 빈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기억의 편린들은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온다. 시공간을 왔다 갔다 하는데다가 사건도 일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사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 특별할 것도 없는 대사와 순간이지만, 마음으로 이해가 되는 순간이 있다. 모든 딸과 엄마에게 피에서 피를 타고 이어져 내려오는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보았다.
 
작품이 끝날 무렵에야 뚜렷하게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엄마에게 방치되어 커왔던 딸이 말하는 순간에 말이다.
 
“난 널 사랑한다, 하지만 내가 널 망쳤어.” 그 소리가 정말 싫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왜냐면 아무도 날 망치지 않았기 때문이야. 아무도 날 망친 적 없어. 아무도 날 망칠 수 없어. 할머니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야. 난 여자들을 위한 선물이야. 엄마 딸이야. 그건 엄마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야. 엄마를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로. 엄마가 사랑을 쏟도록 하는 존재가 되기로. 언제나 항상.
 
모든 딸들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어!”라고 다짐하면서 결국엔 엄마와 똑같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말에 대해 전면 반발한다. 딸은 엄마를 망치지 않고, 엄마도 딸을 망치지 않는다. 그냥 서로 함께 살아갈 뿐이다. 사랑하니까 영향 받는 거고, 소중하니까 굴절도 되는 거다. 목례만 겨우 건네는 타인이었다면 상처받지도, 왜곡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낯선 타인일 뿐이다. 이것은 관계의 아이러니이다.
 
연극의 제목인 <엘리모시너리 Eleemosynary>는 ‘관대한’이라는 뜻을 지닌 낱말이다. 부디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관계에 대해 관대할 수 있기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숨이 막히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자비로울 수 있기를.
 
매력적인 세 명의 여성캐릭터와 만나기
 
이 이야기는 남다른 개성을 가진 세 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재’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기억력과 재능을 가진 여성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에 의해 결혼을 해야 했고, 여성이라는 굴레에 갇혀 살아야 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초현실적인 세계에 탐닉하는 할머니 도로시아. 자신에게 쏟아지는 과도한 엄마의 기대와 애정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결국 스스로마저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 아티. 할머니와 엄마를 모두 사랑하며, 그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자신만만한 에코. 저마다 각기 다른 색깔로 스스로의 재능과 고민을 드러내는 인물들이다.
 
여타 다른 장치들 없이 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많이 의존하는 연극이어서,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에 기대는 면이 많다. 배우들이 보여주는 개성적인 캐릭터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도로시아 역을 맡은 이정은은 뮤지컬 <빨래>에서 지체장애인 딸을 돌보는 할머니 역으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배우다. 이번에는 괴짜이면서도 유머가 넘치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사랑스러운 도로시아를 그처럼 꼭 맞게 연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배우라고 여겨질 정도다.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생각나는 아테 역은 김수진이다. 나는 그녀를 까마 낀까스 연출의 <갈매기>에서 마샤 역으로 만난 적이 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가을낙엽처럼 공허한 느낌이 전달된다. 몹시 슬픈데, 우는 것도 버거운 인물이라는 느낌이 목소리나 표정에서 묻어난다. 자신만만하고, 승부욕 강한 에코 역은 김신혜가 맡았다. 활자 맞추기 우승대회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연극 <엘리모시너리> 상연정보
ㆍ일시와 장소: 2009년 12월 3일~20일까지 (성북구 아리랑 아트홀)
                      2010년 1월 18일~ 31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ㆍ원작: 리 블레싱(Lee Blessing)
ㆍ번역/연출: 이동선
ㆍ배우: 이정은, 김수진, 김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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