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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아저씨는 내게 작은 소포꾸러미를 안겨주고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찌그러진 종이상자에는 박스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었다. ‘도대체 누가 보낸 걸까?’하며 살펴보니, 이제는 완전히 시골사람이 다 된 대학선배가 보낸 것이었다.
 
겨우 테이프를 떼어내고 상자를 여는 순간, 편지와 함께, 곶감 한 봉지와 책 한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렇게 손수 쓴 편지를 받은 것이 얼마만인가? 게다가 곶감은 선배가 손수 말려 만든 것이라니, 정말 감동적이다. 곶감을 앞에 놓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음 깊은 곳이 훈훈해져 왔다.
 
시간을 들이기보다 돈을 들여서
 

*추천서 - 해리 데이비스 "타샤의 크리스마스" (윌북, 2007)

언젠가부터 손으로 직접 편지쓰기를 멈추었다. 아마도, 인터넷 없이 사는 일본인 친구 편지에 답장 쓸 기회를 놓쳐버린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또 더 이상 성탄절 카드나 새해 연하장도 만들지 않게 되었다. 유학 첫 해,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 카드를 만들어 보냈을 때, 동생의 반응이 시큰둥해 기운이 빠졌기 때문이었을까?

 
인터넷 메일의 편리함에 길들여지고 핸드폰 문자의 신속함에 익숙해지면서, 더 이상 손글씨로 소식을 전하거나 독특한 카드제작을 고심하는 일은 내 생활 속에서 사라져갔다. 나만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편지를 쓰고 카드를 만드는 동안에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손수 만들어 건넬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선물은 꼭 돈을 주고 구입해야 되는 것처럼, 또 돈을 들여 멋진 포장을 해서 줘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돈을 들이지 않으면 시시하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손뜨개 털스웨터가 내가 받은, 손정성이 담긴 첫 선물이었나? 어쩌면 할머니의 선물이 먼저였을지도 모르겠다. 중학생이 되어 겨울에도 스커트를 입어야만 하는 내게 털실로 속바지를 떠서 주셨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어쨌거나 좋긴 했지만, 큰 감동을 받진 못했다. 시중에 팔고 있는 옷들보다 촌스러운 것이 마음에 쏙 들지 않았던 까닭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만들어 선물해 본 경험이 없어 그 마음을 읽어낼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더 본질적인 이유리라.
 
아무튼 어머니나 할머니가 털실로 짠 옷 선물도 각각 일회성에 그친 특별한 사건이었을 뿐, 내 일상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선물을 하려면 받을 사람에게 물어봐서 필요한 것을 사주거나, 아니면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주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다. 이런 식으로 돈을 들여 선물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주장, 놀라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물이야말로 상대방을 얼마나 잘 알고 있고,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표현에 걸맞는 선물, 시간과 노력, 정성, 마음을 모두 담은 선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마음 한 귀퉁이에 붙들어 매놓고 있다.
 
그래서 올케가 뜨개질해 준 숄과 동생이 그려준 초상화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들이 그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쓰고 애썼을지 깊이 느끼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도 마음을 쏟고 힘과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었을 때, 그들이 내 마음을 받아 안으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손수 만든 선물을 나누면, 어떨까?’
 
그러나 다들 시간에 쫓길 뿐만 아니라, 넘쳐나는 상품을 돈만 주면 손쉽게, 심지어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선물은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기 어렵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기도 힘들고, 그런 선물이 환영 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씁쓸하지만, 잘 알고 있다.
 
그래서 6개월 전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한다는 타샤 할머니 이야기에 마음 깊이 공감하고, 진한 감동을 받으며, 그토록 부러웠나 보다. 함께 ‘타샤의 크리스마스’를 읽었던, 같이 사는 친구도 그랬던 것일까? ‘올 크리스마스에는 손수 만든 선물을 나누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으니... 미리 선물을 준비하고 나누는 일,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훨씬 따뜻한 연말이 될 듯 하다.
 

낡은 티셔츠를 모아 욕실 발판으로 만들어 친구에게 선물했다.


친구의 낡은 티셔츠를 모아 욕실 발판을 뜨고 있던 중이었던 나는, 부엌 개수대 발판까지 완성해 세트로 그녀에게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는 내가 상상한 이상으로 나의 선물에 감동하는 듯했다. 나 역시도 친구가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그것이 무엇이건 기쁘게 받을 것이다. 우리의 선물은 서로에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고,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훈훈한 올 연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용기를 얻은 나는 동생들에게도 같은 제안을 해 보았다. 내 제안에 대한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돈벌이가 신통치 않은, 시간 많은 동생은 어떤 선물을 할지 생각해 보겠다며 환영한 반면, 돈벌이로 쉴 시간도 부족한 동생은 선물 만들 짬이 없다며 정색을 했다. 바쁠 뿐만 아니라,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도 큰 관심이 없는 동생에게 선물을 스스로 만들어 주고 받자는 요구는 너무 무리한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선물에 대한 생각도 개개인의 삶의 방식과 결부된 하나의 표현일 수 밖에 없다. 상대방이 원하는 선물을 읽어낼 시간, 그런 선물을 알아내기 위해 그와 함께 나눠야 하는 시간, 선물을 준비하는 시간, 준비된 선물을 주고 받는 시간, 그리고 선물을 나눴던 시간을 회상하는 시간, 등. 이토록 적지 않은 시간을 어떤 사람과 나눌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느린 속도로 살 수 없는 사람이라면, 상대를 위해 기꺼이 몸수고하는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꿈꾸는 선물에 대한 이상을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손수 만든 선물을 나누고 싶다는 바램은, 그런 선물을 나눌 수 있는 삶, 바로 그 삶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그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런 사람이 주변에 몇 명은 있어 정말 다행이다.
 
아, 곶감이 달다. 삼백초로 염색한 명주 스카프에 공구르기를 해야겠다. 오랜만에 편지도 써보고…. (이경신) -> 뜨개질을 통한 시간의 사색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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