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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철학하는일상] 행복한 공간에 대한 소망 
 
한기는 집안으로 더욱 웅크려 들게 한다. 실내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온갖 물건들이 흩어져 무질서가 극에 이른다. 추위를 핑계로 창문도 잘 열지 않아 먼지가 쌓여가는 데다, 여기저기 물건까지 쏟아져 나와 있으니 제대로 청소하기도 힘들다.
 
더 이상 참지 못해, 복잡한 공간 속에서 질서 찾기를 시작했다. 이미 포화상태이지만, 작은 가구들을 요리조리 옮기고 쌓고, 물건을 재배치하니,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그래도 선비장과 밥상은 둘 곳을 찾지 못해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다.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집의 필요
 

이미지 출처 "타샤의 정원"(윌북. 2006)

지금의 집에 산 지도 벌써 8년째다. 성인이 된 후, 같은 집에서 이렇게 오래 지내는 것도 처음이다. 대개는 한두 해마다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다. 기숙사, 연립주택, 상가건물 같은 집합건물의 방 한 칸을 빌리거나 독립된 집을 구하기도 했다. 수 없는 이사 끝에 구한 집이 바로 현재 살고 있는 집, 아담한 아파트다.

 
아무튼 방이건 집이건 매번 삶의 비용, 교통편의, 주위환경 등을 따져서 결정하긴 했지만, 마음에 쏙 드는 주거공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집이 없어 노숙해야 하는 사람이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비위생적이고 불안정한 주거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면, 내가 그 동안 지내온 집들은 주거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는 지극히 양호한 상태였으니, 그 이상을 바란다면 과욕임을 안다.
 
집이란 원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비바람,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고, 야생동물이나 타인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거나 소유물을 도둑맞은 적도 없으니 안정적인 생활은 보장되어 온 셈이다. 사생활을 침해 당할 때조차, 일상을 꾸려나갈 수 없을 만큼의 불편은 아니었고, 운이 좋을 때는 바람도 잘 통하고, 햇살도 즐길 수 있는 쾌적한 공간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구분하고, 일, 수면, 식사를 분리할 수 있을 정도로 공간적 여유도 생겨났다. 어린 시절의 ‘방 한 칸’의 꿈을 넘어서 있는 내 현재의 주거조건은 과분할 정도다.
 
살 집을 스스로 짓는 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있는 집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젠가부터 소로우나 니어링 부부처럼 내가 살 집을 스스로 짓는 꿈을 꾸고 있다. 정말로 집을 지어 거기서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상상만 하다 그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꿈이다.
 
아무튼 내가 스스로 짓는 집이라면, 내 능력의 한계를 감안할 때 화려하게 기교를 부리거나 사치스럽게 멋을 낸 대단한 주택은 아닐 테고, 그야말로 단촐하고 엉성한 오두막 같은 집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집보다 뭐가 더 나은가?’라는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의 필요와 내 생활에 걸맞는 집이 될 테고, 집 안팎 모두를 내 마음대로 결정해, 당연히 나의 상상력과 욕망이 표현된 집이 되지 않을까? 마치 내 몸에 잘 맞아 어색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개성 있는 옷 같은 공간 말이다.
 
사실 내가 꿈꾸는 집은 매번 같은 집이 아니다. 채소밭을 만들었다, 정원을 만들었다, 단층집을 지었다, 이층집을 지었다가…. 다락방을 두었다 작업실을 두었다가…. 원형 집이었다 사각형 집이었다가…. 이렇게 상상의 집은 내가 그리는 미래에 따라 그때마다 꼴을 바꾼다. 가끔은 내 능력에 넘치는 집, 실현가능성이 없는 황당한 집도 상상하곤 한다.
 
자유롭고 편안한 ‘구석’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 될지언정, 그 모든 꿈의 집들은 소위 ‘구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김진애씨가 말했던가? 집에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를 좀더 자유롭게 만드는, 창조의 에너지를 분출케 하는, 편안하게 꿈꿀 수 있는 공간 말이다.
 
그것은 좀더 내밀한 자신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는 아늑하고 포근한 비밀스런 틈새다. 어린 시절, 달콤한 잠을 청할 수 있었던 ‘장롱 안’ 같은, 맛 좋은 간식이 감춰져 있던 보물창고 같은 ‘벽장 속’, 비밀스럽게 촛불을 밝히던 ‘마루 밑’, 가만히 엎드려 있어도 좋았던 키 낮은 ‘다락방’ 같은 곳. 또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야기 속의 책장 뒤 비밀방과 같은 곳. 그런 구석이 집에는 필요하다.
 
그런데 획일적인 아파트에는 자유로운 상상이 파고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내가 그토록 많은 집을 상상 속에 만들어온 까닭도, 현실적인 ‘구석’의 부재 때문인 듯하다.
 
살아가며 집을 길들이다
 
처음 이사와 창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아파트단지들로 가득한 삭막한 주위풍경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일단 눈을 집안으로 돌렸다. 해가 바뀌며 적응해가는 동안, 집안의 변화는 계속되었다. 공간의 용도도, 가구의 위치도 계속 달라지고, 새로운 물건이 들어와 자리잡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밀쳐지기를 반복했다. 집 길들이기가 수 년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개미굴’이 탄생했다. 우리 집을 들어서면, 우리 동네 그 어떤 아파트에서도 만날 수 없는, 좁은 통로가 얽혀 있는 미로가 펼쳐진다. 살금살금 빈 곳을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구와 물건들이 빽빽이 자리잡고 있는 집. 여느 집과 다른 집, 나를 표현하고 있는 집, 어느덧 우리 집은 그런 집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구석은 말 그대로 은밀히 숨겨진 현실 속의 구석진 공간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구석’은 어린 시절의 장롱이나 다락방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편안하고 행복하고 상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개미굴’도 ‘구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도 나는 내 손으로 집 짓는 꿈을 꾼다. 이루지 못하는 꿈이 되더라도 괜찮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성장하려고 하는 욕망은 그 꿈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꿈은 꿈대로 키워가면서도 현실을 살아가며 집이 삶의 과거, 현재, 미래를 품게 하면 ‘구석’을 만들어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요즘은 창을 통해 하늘도 보고 산도 보고, 눈 덮힌 공터도 보고, 사시사철 다른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도 내려다본다. 집에 머물며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겹겹이 쌓아올려진, 똑같아 보이는 한 층의 한 칸에 불과한 아파트도 생각하고 생활해나가는 동안 추억과 꿈이 쌓여서 남다른 집이 되어간다. 먼 길을 나섰다가도 되돌아오고 싶은 아늑한 곳이다.
 
넓고 화려한 집, 값비싼 집이 아니더라도, 낡고 누추하고 좁은 집이라도, 아니, 방 한 칸에 머물더라도 우리는 편안하고 행복하고 꿈꿀 수 있다. 행복한 공간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니까.
 
오랜 시간 길들인 집일수록 구석도 많아지는 느낌이다. 길들인 집은 필요를 넘어 꿈을 닮아간다. 지금의 집을 떠난 후, 얼마나 많은 상상의 씨앗을 거둬들이게 될까? 
*함께 읽자.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민음사, 1990)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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