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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까미귄 섬①
싼 비행기를 골라 타느라 매번 한밤중 아니면 꼭두새벽에 공항 출입이다. 필리핀 세부(Cebu) 공항에 도착한 것도 역시나 새벽 두 시. 공항 안에서 어정대다가 날 밝거든 길을 나서야지 했는데, 짐 찾아 몇 걸음 나오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공항 바깥 길이다. 미적거릴 틈을 안 주는 참 인색한 공항이다.
일주일에 오직 하루 금요일 밤에만 출발하는 까미귄 행 배표를 가까스로 구해놓고 비자를 연장하러 이민국으로 뛰어갔다. 섬에 들어가고 나면 볼일을 보러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 미리 도장을 받아두려는 것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이민국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권 더미를 손에 미어져라 들고 있는 여행사 직원들이 한 무리, 우리처럼 제 손으로 비자 연장을 하려고 줄을 선 외국인들이 또 한 무리였다. 그런데 우리 줄 앞쪽 덩치 크고 늙수그레한 서양 남자들이 허리춤에 여자 하나씩을 끼고 서 있다. 조그맣고 어린 필리핀 여자들이다. 무엇이든 다 내다 팔라고 부추기는 세상의 뒷골목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헐값이 되어가는 중이다.
까미귄(Camiguin)은 필리핀 민다나오 북쪽 언저리에 콕 찍혀있는 작은 섬. 세부에서 저녁 배를 타고 밤새 열두 시간을 내달리면 아침녘에야 겨우 닿는 곳이다. 우리는 그 섬 한 켠에 있는 에니그마타를 찾아가는 길인데, 전해 듣기로 에니그마타는 커다란 나무집에 새처럼 둥지를 튼 예술 커뮤니티라고 했다.
‘에니그마타’(Enigmata)가 ‘눈을 뜨라(Open Your Eyes)'는 말이라더니, 몇 백 년은 묵었음직한 나무를 빙빙 타고 오른 삼 층짜리 나무집 앞에서 그만 눈이 번쩍 떠졌다. 우리는 잭과 콩나무의 주인공들처럼 나무집 맨 꼭대기 방 ‘독수리 둥지’ (Eagle Nest)로 기어 올라가 짐을 풀었다. 숲이 바로 옆집이었다.
에니그마타에는 여장부 마마로사(Mama Rosa)와 다섯 명의 젊은 스태프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이곳의 리더인 마마로사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환경운동가이며 민다나오 고유의 문화를 지켜나가는 예술가들의 모임 ‘에니그마타 크리에이티브 서클’ (Enigmata Creative Circle) 의 중심 인물이다. 그녀는 또 까미귄 섬 내의 작은 대학에서 에코투어리즘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다.
에니그마타에서 머물던 한 달 간 나는 한 번도 내 것으로 해보지 못한 온전한 쉼을 누렸다. '독수리 둥지'의 해먹에 누워있으면 아침 햇볕과 밤 그늘이 번갈아 발가락을 간질였고, 우거진 숲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소리와 비 온 뒤 수굿하게 내려앉은 공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또 한낮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힐 때면 근처 계곡으로 달려가 수영을 했고 그러다 해가 저물면 스태프들과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일상적이고 평범한 예술을 했다.
긴 실을 엮어 밤새 악몽을 잡아준다는 드림 캐쳐(dream catcher)를 만들기도 하고, 체에 내린 고운 흙을 물감 삼아 소일 페인팅(soil painting)에 도전하기도 하고, 누구 한 명을 가운데 앉혀둔 채 몇 시간 씩 초상화를 그려대기도 하였다. 그도 지겨워지면 친절한 스태프 빈센트에게 기타를 배우고 같이 비틀즈의 노래들을 불렀다.
그렇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느리게 춤을 추듯 한 시절을 보내었다. 아, 물론 그것은 왕개미와 도마뱀과 바퀴벌레와 모기, 그 밖에 이름 모를 온갖 벌레들과 갖가지 나방들을 벗 삼고 나서야 누릴 수 있는 쉼이었다.
우리 집 막내둥이 짜이(승채의 여행 중 별명)는 눈만 뜨면 에니그마타 부엌으로 달려갔다. 끼니때마다 손수 요리를 해먹는 스태프들 옆에서 착실한 조수 노릇을 하고 나더니 부엌살림에 재미가 들린 것이다.
줄곧 마녀가 되기를 희망해왔던 꼬맹이 짜이에게 그곳은 ‘꿈의 부엌’이 될 만하였다. 벽에는 온통 묵은 곰팡이들이 검게 얼룩져 있고, 때가 덕지덕지 앉은 조리 기구들은 나만큼이나 나이 들어 보였으며, 쓰다 남은 음식 재료들 속에서 고양이와 쥐들이 번갈아 잠을 자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앞마당 어디서나 파파야가 자라나고 부엌문 옆 코코넛 나무에는 아기 머리통만한 코코넛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그림책 속 마녀의 부엌도 이보다 더 근사하진 않았겠다.
부엌일이 한가해지고 나면 아떼 깅(Ate Ging)이나 꾸야 뚜뻬(Kuya Tupe)를 졸졸 따라다니는 눈치였다.(필리핀 말 따갈로그어로 ‘아떼’는 언니, ‘꾸야’는 오빠라는 뜻. 그러니까 깅 언니, 뚜뻬 오빠 라고 부르는 셈이다.)
에니그마타의 살림꾼 아떼 깅은 군만두처럼 생긴 룸피아나 고기찜 요리 아도보 같이 손 많이 가는 필리핀 음식을 부러 아이들과 같이 만들어주었고, 시내 맘바하오에 다녀올 때마다 잊지 않고 계피 빵을 사다 안겨주는 정 많고 수다스런 언니였다.
반면 꾸야 뚜뻬는 말수가 적었다. 하루 종일 안팎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고 밤이면 현란한 손재주로 별것별것 다 만들어내는 뚜뻬가 딱 하나 못하는 것은 미주알고주알 사람들과 떠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짜이와 뚜뻬가 틈만 나면 체스 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다. 별다른 말도 없이 가끔 탁, 탁, 소리 내어 체스 말을 움직이면서 뚜뻬는 소일거리 삼아 또 뭔가를 만들고 짜이는 무릎 위에 아기고양이 캐서린을 올려놓고 쓰다듬어 잠을 재우곤 하는 것이다. (캐서린Catherine은 고양이cat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에니그마타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거미줄처럼 엮어놓은 드림캐쳐 덕분에 정말로 나쁜 꿈들이 걸러진 것일까.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달게 잤다. 살면서 연연한 것들로 인해 얕고 어지러웠던 잠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든 것이다. 삶에 되돌림이란 게 있을까마는 어쩐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릇 쉼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진형민)
-> 아주 특별한 위로, 아잔(adhan) | 힐라 아이들이 울던 날 ⓒwww.ildaro.com
필리핀 민다나오 까미귄 섬①
에니그마타 나무집, 문이 열렸다
일주일에 오직 하루 금요일 밤에만 출발하는 까미귄 행 배표를 가까스로 구해놓고 비자를 연장하러 이민국으로 뛰어갔다. 섬에 들어가고 나면 볼일을 보러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 미리 도장을 받아두려는 것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이민국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권 더미를 손에 미어져라 들고 있는 여행사 직원들이 한 무리, 우리처럼 제 손으로 비자 연장을 하려고 줄을 선 외국인들이 또 한 무리였다. 그런데 우리 줄 앞쪽 덩치 크고 늙수그레한 서양 남자들이 허리춤에 여자 하나씩을 끼고 서 있다. 조그맣고 어린 필리핀 여자들이다. 무엇이든 다 내다 팔라고 부추기는 세상의 뒷골목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헐값이 되어가는 중이다.
까미귄(Camiguin)은 필리핀 민다나오 북쪽 언저리에 콕 찍혀있는 작은 섬. 세부에서 저녁 배를 타고 밤새 열두 시간을 내달리면 아침녘에야 겨우 닿는 곳이다. 우리는 그 섬 한 켠에 있는 에니그마타를 찾아가는 길인데, 전해 듣기로 에니그마타는 커다란 나무집에 새처럼 둥지를 튼 예술 커뮤니티라고 했다.
나쁜 꿈을 막아준다는 드림캐쳐
에니그마타에는 여장부 마마로사(Mama Rosa)와 다섯 명의 젊은 스태프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이곳의 리더인 마마로사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환경운동가이며 민다나오 고유의 문화를 지켜나가는 예술가들의 모임 ‘에니그마타 크리에이티브 서클’ (Enigmata Creative Circle) 의 중심 인물이다. 그녀는 또 까미귄 섬 내의 작은 대학에서 에코투어리즘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다.
에니그마타에서 머물던 한 달 간 나는 한 번도 내 것으로 해보지 못한 온전한 쉼을 누렸다. '독수리 둥지'의 해먹에 누워있으면 아침 햇볕과 밤 그늘이 번갈아 발가락을 간질였고, 우거진 숲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소리와 비 온 뒤 수굿하게 내려앉은 공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또 한낮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힐 때면 근처 계곡으로 달려가 수영을 했고 그러다 해가 저물면 스태프들과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일상적이고 평범한 예술을 했다.
긴 실을 엮어 밤새 악몽을 잡아준다는 드림 캐쳐(dream catcher)를 만들기도 하고, 체에 내린 고운 흙을 물감 삼아 소일 페인팅(soil painting)에 도전하기도 하고, 누구 한 명을 가운데 앉혀둔 채 몇 시간 씩 초상화를 그려대기도 하였다. 그도 지겨워지면 친절한 스태프 빈센트에게 기타를 배우고 같이 비틀즈의 노래들을 불렀다.
그렇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느리게 춤을 추듯 한 시절을 보내었다. 아, 물론 그것은 왕개미와 도마뱀과 바퀴벌레와 모기, 그 밖에 이름 모를 온갖 벌레들과 갖가지 나방들을 벗 삼고 나서야 누릴 수 있는 쉼이었다.
우리 집 막내둥이 짜이(승채의 여행 중 별명)는 눈만 뜨면 에니그마타 부엌으로 달려갔다. 끼니때마다 손수 요리를 해먹는 스태프들 옆에서 착실한 조수 노릇을 하고 나더니 부엌살림에 재미가 들린 것이다.
줄곧 마녀가 되기를 희망해왔던 꼬맹이 짜이에게 그곳은 ‘꿈의 부엌’이 될 만하였다. 벽에는 온통 묵은 곰팡이들이 검게 얼룩져 있고, 때가 덕지덕지 앉은 조리 기구들은 나만큼이나 나이 들어 보였으며, 쓰다 남은 음식 재료들 속에서 고양이와 쥐들이 번갈아 잠을 자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앞마당 어디서나 파파야가 자라나고 부엌문 옆 코코넛 나무에는 아기 머리통만한 코코넛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그림책 속 마녀의 부엌도 이보다 더 근사하진 않았겠다.
부엌일이 한가해지고 나면 아떼 깅(Ate Ging)이나 꾸야 뚜뻬(Kuya Tupe)를 졸졸 따라다니는 눈치였다.(필리핀 말 따갈로그어로 ‘아떼’는 언니, ‘꾸야’는 오빠라는 뜻. 그러니까 깅 언니, 뚜뻬 오빠 라고 부르는 셈이다.)
에니그마타의 살림꾼 아떼 깅은 군만두처럼 생긴 룸피아나 고기찜 요리 아도보 같이 손 많이 가는 필리핀 음식을 부러 아이들과 같이 만들어주었고, 시내 맘바하오에 다녀올 때마다 잊지 않고 계피 빵을 사다 안겨주는 정 많고 수다스런 언니였다.
반면 꾸야 뚜뻬는 말수가 적었다. 하루 종일 안팎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고 밤이면 현란한 손재주로 별것별것 다 만들어내는 뚜뻬가 딱 하나 못하는 것은 미주알고주알 사람들과 떠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짜이와 뚜뻬가 틈만 나면 체스 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다. 별다른 말도 없이 가끔 탁, 탁, 소리 내어 체스 말을 움직이면서 뚜뻬는 소일거리 삼아 또 뭔가를 만들고 짜이는 무릎 위에 아기고양이 캐서린을 올려놓고 쓰다듬어 잠을 재우곤 하는 것이다. (캐서린Catherine은 고양이cat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에니그마타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거미줄처럼 엮어놓은 드림캐쳐 덕분에 정말로 나쁜 꿈들이 걸러진 것일까.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달게 잤다. 살면서 연연한 것들로 인해 얕고 어지러웠던 잠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든 것이다. 삶에 되돌림이란 게 있을까마는 어쩐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릇 쉼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진형민)
-> 아주 특별한 위로, 아잔(adhan) | 힐라 아이들이 울던 날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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