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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  엄마를 믿어도 될까? 
 
*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동티모르④ 소모초
 

소모초(Somocho)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길에서 빠운(paun)을 한 소쿠리 샀다. 아침부터 서둘러 클라라스를 떠나오느라 정오가 가깝도록 다들 먹은 것이 없다. 둥그스름한 모양에 바게트 맛이 나는 빠운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동티모르 빵이다. 빵집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집에서 만든 빵을 길에 들고 나와 파는 이들에게 사먹는 것이다. 나무화덕에다 구워냈는지 빵에서 구수한 나무냄새가 났다.
  
▲ 바게트 맛이 나는 빠운(paun). 동티모르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빵.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빠운은 동티모르 식으로 조금 바꾼 포르투갈 빵이다. ‘빠운’이라는 말도 빵을 뜻하는 포르투갈 말 ‘빠옹(pão)’에서 온 것이라 했다. (우리가 쓰는 말 ‘빵’ 역시 포르투갈어 ‘빠옹’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침략 이전에도 동티모르는 4백년이 넘는 포르투갈 식민시대를 거쳐 왔다. 그 지난한 세월 동안 삶을 파고든 것이 어디 먹을거리뿐이겠는가.
 
동티모르의 공식 언어는 떼뚬(tetum)어와 포르투갈어이다. 속속들이 배어든 식민지배 권력의 언어를 하루아침에 다 내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일본말을 쓰지 맙시다’가 학급회의 단골 건의사항일 만큼 벤또(도시락)나 바께쓰(양동이) 같은 말들이 흔하게 쓰였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삼십 년이 훌쩍 넘어가던 때였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할 침략자의 언어를 여태 국가의 공식어로 인정하고 사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떼뚬어를 비롯한 각 지방의 고유한 말들이 온전히 살아있는데, 굳이 오래된 식민 잔재를 끌어안고 가려는 이유는 무얼까. 그런데 사정 얘기를 듣고 나니 속이 더욱 답답해온다.
 
떼뚬어 안에는 행정용어나 전문용어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냥 일상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말들은 있지만 관공서나 학교에서 쓰기에는 어휘가 너무 단순하고 부족하단다. 법과 행정, 학문의 주도권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빼앗기고 산 탓에 나랏말이 세분화되거나 필요에 의해 생성 혹은 발전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세상을 조목조목 설명해 낼 수 있는 말인 포르투갈어 없이 버티기 어렵겠다.
 
떼뚬어 안에도 포르투갈어의 영향을 받은 ‘빠운(paun)’ 같은 말들이 넘쳐나고, 인도네시아어와 유사하게 정리된 어휘들 역시 그 양이 꽤 된다고 들었다. 한자어와 외래어가 넘쳐나는 우리말까지 더듬어 생각하고 나니, 제 나라의 말을 곧게 이어가는 일은 어쩌면 가장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겠구나 싶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NGO가 난립해 있는 소모초
  
▲ 소모초 마을 한가운데 설치된 손펌프로 물을 긷고 있는 우노(Uno). 우노는 인도네시아 쿠팡 출신의 자원활동가이다.     © '개척자들' 이황우 

소모초(Somocho)에서 젊은 한국여성 둘을 만난 것은 좀 뜻밖이었다. 아직 이십 대라는 이 앳된 아가씨들은 ‘지구촌나눔운동(GCS)’이라는 단체 소속으로 이곳 현장에서 여섯 달 째 살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덕분에 한국식 카레 밥을 실컷 얻어먹고 나니 뭘 먹어도 가시지 않던 해묵은 허기가 달래졌다.

 
소모초는 예로부터 물 없기로 소문난 동네였다고 한다. 물을 긷기 위해 매번 왕복 8킬로미터의 길을 오가야 했다는데, 아이들 걸음으로는 얼추 세 시간이 넘는 거리였겠다. 그러던 마을 한가운데에 손 펌프가 생겼다. 발전기로 끌어올린 물을 원하는 만큼 펌프질을 해서 길어 갈수 있게 된 것이다.
 
펌프 얘기를 듣고 구경삼아 가보니 물 받던 아이들이 낯선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동글동글한 눈들이 수줍게 웃고 있다. 마중물 부은 뒤 긴 손잡이에 힘을 실어 위 아래로 들었다 내렸다 하는 펌프는 어릴 적 우리 집에 있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 콸콸콸 쏟아져 내리는 물을 보니, 물통 이고지고 먼짓길 걸어가고 있을 클라라스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전쟁과 독립이라는 드라마틱한 현대사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동티모르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NGO들이 난립해 있다. 수도 딜리에 있다 보면 호주나 일본 또는 유럽에서 온 활동가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고, 치안유지를 위해 아직 주둔 중인 유엔 차량이 택시보다 더 자주 오가는 걸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NGO들끼리의 사전조율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사업들이 저마다 진행되고 있고, 개발 중심 성과 중심의 NGO 사업들이 남긴 폐해가 되레 걱정거리가 되고 있나 보다.
 
소모초의 젊은 활동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을 펌프를 세울 때도 정작 마을 사람들은 뒷짐 지고 구경만 하려 했단다. 같이 일을 좀 하자 하면 일당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고, 물을 자유롭게 쓰는 대신 물값을 조금씩 모아 마을기금으로 쓰자는 제안에도 다들 달갑지 않아 했던 모양이다. 짧은 시간 많은 물질적 혜택을 쏟아 붓고 사라진 NGO들의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이곳 사람들의 오래된 품앗이 문화를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것이다.
 
또 다시 국경을 넘으며

▲ 둘째 빈이는 밤마다 촛불 아래서 일기를 써내려갔다.     
 
날 저물고 하루를 마감하는 모임이 끝나자 둘째 빈이가 어김없이 일기장을 펴든다. 소모초 마을 역시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 옆에 그림자를 늘이고 앉았다. 하품하며 은근슬쩍 모기장 속으로 파고드는 막내는 오늘도 까짓 일기쯤 건너뛸 태세이고, 큰 아이는 기타 치며 노래하는 삼촌들 옆에서 어른들 세계를 기웃거리는 재미에 빠져 있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빈이의 일기장은 갈수록 두툼해지는 중이다. 예쁜 꽃잎이랑 잎사귀들 끼워 말리고, 맘에 드는 사탕봉지며 초콜릿 껍질 같은 것 오려 붙이고, 온갖 입장권과 안내문들까지 사이사이 빼곡하니, 내 보기엔 보물 상자가 따로 없다. 책 보는 것도 즐겨하고 가만히 사람들 얘기 듣는 것도 좋아하는 우리 빈이가 하루는 걱정스럽게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공부할 것 좀 들고 올걸 그랬어. 이렇게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면 나중에 어떻게 해?”
 
나는 아이가 매일같이 제가 먹은 것에 대해서, 본 것에 대해서, 불편하고 힘들었거나 재미나고 기분 좋았던 것에 대해서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만큼 훌륭한 공부는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공부 걱정을 하는 딸아이에게 공부는 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고, 또 나중 일은 나중에 열심히 생각하면 된다고 큰 소리 뻥뻥 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눈을 새치름히 뜨고 나를 본다. 아무래도 우리 엄만 좀 이상해, 엄마만 믿고 살다간 큰일 나겠어 하는 얼굴이다.
 
우리는 다시 열세 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우리 여행의 길동무가 되어주었던 청년들은 앞으로 일 년 동안 이곳 동티모르의 자원 활동가로 살아갈 것이다. 에디(Edy)가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껍질을 고운 색실에 꿰어 “선물이야” 하며 내민다. 나는 아무리 뒤져도 마땅히 줄 것이 없어 그냥 인도네시아 말로 “고마워” 하고 인사를 했다. 이제 에디에게 차를 끓여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좀 슬퍼졌다.
 
버스가 힘겹게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동티모르 길가의 마른 먼지들이 춤을 추며 따라왔다.  (진형민)   [이전 기사 보기] 옛날 옛적에 악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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