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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21) 자연의 색과 함께 하는 일상 
 
새벽 나절, 한차례 세찬 비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비 그친 뒤, 이런 날 문 밖을 나서면 어김없이 연초록빛 동그란 땡감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해서 감알이 자그맣다. 이번에도 눈을 떼지 못하고 얼른 감을 주워든다. 지난 해 감을 줍지 못했던 탓일까…….
 
태풍을 피해 갔던 작년에는 감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주홍색 감이 가지가 부러질 듯, 악착같이 대롱거렸다. 잎을 잃고 눈밭에 선 주홍빛 감나무가 얼마나 낯설었는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수년 전부터 여름 행사처럼 해오던 감물염색을 한 해 거를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봄부터 ‘여름이 오면 꼭 감물염색을 해야지’하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여름 문턱에 들어서자 폭우가 쏟아진 날이면, 감이 채 자라지도 않았는데 감나무 밑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비온 다음, 길 위에 땡감이 하나, 둘 나뒹굴기 시작했다. 같이 사는 친구가 땡감 다섯 개를 주워온 날, 마침내 난 올 여름 감물염색의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
 
버리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고운 색들 
 

▲ 비온 후 길 위에 뒹구는 땡감은 훌륭한 천연염색 재료가 된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천연염색에 관심이 많았다. 천연염색은 자연을 해치지도 않고 우리 몸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색깔이 은은하고 고운 것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천연염색장을 직접 찾아가 배울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다가 천연염색에 열광해 있던 친구의 염색보조를 하면서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홍화, 괴화, 치자, 코치닐, 오배자 같이 돈을 들여 구입해야 하는 염색재료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이 더 끌렸다. 예를 들어, 하천가나 산에서 채취할 수 있는 애기똥풀, 칡, 쑥뿐만 아니라,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인 양파껍질, 밤껍질, 그리고 차를 마시고 나서 남은 홍차찌꺼기 등.
 
자연에서 염료를 구하는 경우에도, 채취하는 일이 수고로운 데 비해, 견뢰도(햇빛, 땀, 세탁, 마찰과 같은 외부조건에 색이 변하지 않고 견디는 힘)가 높질 않아 노력이 아깝다 생각되었다.
 
결국 일상적인 천연염색의 염료로는 쓰레기로 간주되는 것들 가운데 견뢰도가 높은 것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으로 여겨졌다. 겨울철에는 요리하고 버리는 양파껍질이나 평소 즐겨 마시는 홍차찌꺼기를 끓여 염색하고, 여름철에는 길가에 떨어져 뒹구는 땡감을 주워 염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그것만으로도 노란색, 카키색, 갈색, 회색을 얻을 수 있으니, 색에 대해서도 큰 불만이 없다.
 
최고의 천연염료, 땡감
 
내 염색스승인 친구와 나는 천연염색 중에서도 단연 ‘감물염색’이 최고라고 서로 합의를 보았다.
 
“(감의) 주성분은 타닌이다. 타닌 성분의 염료로 염색한 옷감은 통기성이 좋다. 염색 전에 비해 2-3배 증가한다. 이는 타닌이 섬유 사이의 작은 틈새를 막고 섬유를 뭉치게 하여 오히려 큰 틈을 많이 형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타닌 염료 가운데서도 감물 염색은 견뢰도가 가장 높고 물도 잘 빠지지 않으며 열전도율이 낮아 시원하며, 자외선도 차단해 준다. 코팅 효과가 좋아 비를 맞거나 땀에 젖어도 옷이 몸에 달라붙지 않고, 좀벌레가 슬지 않는다. 또 방추도가 좋아서 풀을 먹이거나 다림질을 할 필요가 없다.” (이승철, <자연염색>, 학고재, 2004,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감물염색’)
 
이처럼 감물염색은 좋은 점이 많다. 그런데 감물염색을 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감꼭지를 이용하는 법, 땡감을 이용하는 법, 발효된 감즙을 이용하는 법이 있다. 감물염색으로 장사를 할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필요한 수준에서 조금 염색하는 것이라면, ‘땡감으로 염색하라’고 권하고 싶다.
 

▲ 땡감을 절구에 찧거나 곱게 간 후 면포에 물을 붓고 주물러 염료를 뽑아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염액에 염색할 옷을 담가 여름날 물장난 하듯 30분 정도 주물럭거린다. 

땡감염색은 여름 한철만 가능하다. 감을 직접 따서 한다면 8월 햇살 좋은 날이 가장 적당하겠지만, 우리처럼 비바람에 떨어져 길가에서 그냥 썩고 마는 땡감을 이용한다면 여름철 아무 때나 땡감이 많이 떨어진 날을 선택하면 된다.
 
잔뜩 주워온 감을 물에 잘 씻어 먼지를 떨어내고 믹서에 곱게 간다. 만약 믹서가 없다면 절구에 찧으면 된다. 면포에 곱게 간 감을 싸서 대야에 물을 붓고 주물러 염료를 뽑아 염액을 만든다. 염색할 옷을 염액에 담가서 ‘물장난하듯’, 빨래하듯 약 30분 정도 주물럭거린다. 그리고 짜서 말린다.
 
감물염색은 마르면서 발색이 되는데, 다 마르고 나면 다시 물을 적셔 발색을 시킨다. 이 때 볕 좋은 날 직사광선에 너는 것이 좋다. 이렇게 반복해서 (약 10-15회) 발색하면 멋진 ‘갈옷(감물염색 옷)’이 탄생한다. 제주 해녀들이 즐겨 입었던 옷이 바로 이 갈옷이라고 한다. 
 
감물염색과정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몸수고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원하는 색상을 얻을 때까지 염색한 천을 물에 적셔 햇살에 말리기를 수차례 반복해야 하니 말이다. 물론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산다면, 햇살 아래 발색시키는 일이 즐거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좁은 아파트에서 발색하는 일은 다소 번거롭다. 그래서 여름 한철 속옷, 베갯잇, 티셔츠, 양말 등을 조금 염색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올여름에는 러닝셔츠 몇 벌, 베갯잇을 다시 염색했다. 4년 전에 염색했던 것들이라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탈색되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낡은 속옷이었는데 감물 염색을 하니 천이 두터워져서 충분히 입을 만 했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염색을 하니 그 전 상태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색깔도 다시 예뻐졌다.
 
땡감으로 염색하고 있으면 더운 여름날 물장난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풋과일인 땡감이 내뿜는 향내도 좋다. 풋사과향 만큼이나 신선하다. 매번 햇살 아래 빛깔이 변하는 모습은 바라만 보아도 감탄스럽다. 게다가 잘 염색된 천이 살에 닿는 감촉도 좋다. 까슬까슬한 느낌이 산뜻하다.
 
이렇게 땡감으로 염색하는 일이 감각적인 즐거움만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떨어져 썩어버릴 감을 유익하게 쓰니 그것도 좋다. 또 매염제 없이도 발색이 잘되어 물을 오염시킬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서 마음 편하다. 여름 한철만 할 수 있는 염색이니 계절의 순환을 좇아 살아가는 데도 한몫 한다.
 
감물염색이 여름철 즐거움이긴 하지만, 하고 나면 팔뚝이 욱신거려 하루는 고생을 한다. 염액을 충분히 추출해내기 위해서는 제대로 주물러줘야 하니, 평소 잘 사용하지 않은 근육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도 또 땡감이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보물이라도 놓칠 새라 얼른 줍는다. 올여름 감물염색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면서도 또 땡감을 주워들고 오는 내게 난 조용히 타이른다. ‘땡감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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