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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첫째 이야기. 그 모든 것의 시작①
[일다 www.ildaro.com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글쓴이 자야.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일다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귀촌(歸村), 그 헛된 작심
▲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 포도나무
인도로 떠나던 2004년 여름. 나는 1년 후 한국에 돌아오면 더 이상 도시에서 살지 않으리라 작심했다. 그래서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십 년 내 손때가 묻은 것들을 다른 이에게 주거나 ‘아름다운재단’에 넘기고, 더러는 버리기도 했다.
그때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도대체 왜? 시골에 갈 데는 있고? 거기 가면 뭐 먹고 살 건데? 하지만 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연고도 대안도 없이 무작정 시골에 가겠다는 내 작심의 이유를, 사실은 나도 잘 몰랐으니까. 그래서 아름다운재단 관계자가 차를 몰고 와 내 짐들을 실어 나를 때는 잠시 긴장하기도 했다. "저기요, 죄송한데 그냥 가시면 안 될까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 나올까 봐 입 단속에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내 짐을 잔뜩 실은 차는 무사히 떠났고, 내 곁엔 부모님 집에 맡길 작은 가방 몇 개만 달랑 남았다. 누굴 줄 수도, 재활용가게 넘길 수도 없을 만큼 허접하고 사소한 것들. 내가 살아온 흔적이 너무 짙게 묻어 있어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것들. 따지고 보면 도시든 시골이든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다 주거나 버리고, 정작 쓸 데 없는 물건만 남겨둔 셈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처럼 ‘가벼운’ 상태로 인도에 갔고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구들을 만난 기쁨보다는 당장 머물 데가 부모님 집밖에 없다는 현실이 부담스러웠다. 미쳤지, 내가. 명륜동 전세 집을 남겨놨어야 했는데. 물건은 또 왜 전부 처분한 거야. 하여간 대책 없는 인간이라니까.
이런 생각들로 복잡한 내 머리 속에서 시골에서 살리라는 작심 따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부모님 집에 머무는 3개월 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줄기차게 고민했지만, 시골로 내려가는 방안은 그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울로 가자니 그것도 싫었다. 결국 나는 적당한 체념과 스스로에 대한 위무가 뒤섞인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인도 행 비행기에 오르고 만다. 2005년 10월의 일이다.
그 후 또 1년이 지나 이젠 정말 한국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점이 됐을 때, 나는 아차산 아래에 자리한 보증금 낀 월세 집을 구했다. 위치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그 동네는 산동네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그 아우라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가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전철역에서 20분이 넘게 걸어야 하는 오르막길, 미로처럼 얽힌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 집들, 거기서 풍기는 결코 향기롭다고는 할 수 없는 생활의 냄새.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보는 별빛이 유난히 선명하고 달빛은 마냥 고왔기에, 다른 것들은 용서가 됐다. 게다가 신발만 꿰차고 나가면 옆구리에 바싹 산이 다가서는데 뭘 더 바랄 것인가.
1년을 채 못 살았지만 나는 그 집을 나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타고 금산으로 내려가던 날, 흩뿌리는 빗물보다 조금 짠 눈물을 찔끔 흘렸는지도.
간신히 먹고는 살아도 가슴은 안 뛰더라
▲ 남원에 머물던 시절, 나의 거처
아차산 아래 머물던 시절, 나는 요가를 가르쳤다. 내 체력과 정신 수양 정도에 비추어 한꺼번에 많은 시간을 뛸 수 없기도 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일 자체가 많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기코스든 장기코스든 인도로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 차고 넘치는 때였고, 그 중에서도 나는 이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심지어 요가는 근본적으로 명상이니 어쩌니 하며 주제넘게 철학적 명제를 들이미는 강사였으니까.
그래서 나중엔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직(前職)의 경험과 인맥을 살려 출판 관련 아르바이트에 손을 댔으나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내 주머니는 여전히 가볍고 마음은 헛헛했으며 몸은 고됐다. 무엇보다도 요가와 책 만드는 일, 이 두 가지야말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또 무척 사랑하는 일임에도 그것이 재미있거나 신나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결국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진 나는 극도로 피곤함을 느끼며 모든 일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백수들이 왜 산을 찾게 되는가를 뼛속 깊이 이해하며(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또한 매일같이 아차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잡다한 생각들은 비워지는 대신 하나의 물음이 따라붙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데도 나는 왜 즐겁고 가슴이 뛰고 행복하지 않을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시선을 돌려 가난한 집들을 잇는 좁은 길을 내려다볼 때마다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던 그 물음과 동행하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아차산을 오르다 바위에 걸터앉아 쉬는 중에 나는 인도에 가기 전에 꿈꾸고 그려오던 어떤 것을 기억해 냈다. 그건 바로 시골로 가는 것, 즉 귀촌(歸村)이었다.
하지만 처음 그것을 꿈꿀 때와는 다른 게 있었다. 더 이상은 작심의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실 마음을 짓는다(作心)는 건, 강해 보이는 한편 얼마나 허약한가. 저 혼자 짓다가 풀다가 홀연히 사라지기도 하는, 한마디로 찧고 까부는 장난을 치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본래 속성이 아니던가. 그날, 아차산을 내려오는 내 발걸음이 가벼웠던 이유는 귀촌을 위해 내가 굳이 마음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믿음, 그리고 때가 되어 떠올랐으니 그것이 이제 내 삶을 이끌어 가리라는 낙관 때문이었다.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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