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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희영씨 이야기 “자립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지”
[일다www.ildaro.com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과 공동으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시설장애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기획 연재를 시작합니다. 장애당사자들의 구술 기록과 수기, 그리고 장애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의 글을 통해 ‘탈시설’의 의미와 현안을 짚어봅니다. 이 기사는 탈시설한 희영씨의 구술을 토대로, 발바닥행동 활동가 효정씨가 기록한 것입니다.]
‘갈 데 없는 나에게 시설은 유일한 선택이었어’
뇌성마비로 어릴 적부터 손은 몸 뒤로 뒤틀려 있었고, 얼굴은 항상 찡그리고 있었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1년 전부터 몸이 약한 날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부모님이 출장소를 찾아다녔고, 다행히 이듬해에 입학통지서를 받고 학교에 들어가게 됐지. 바닥에 엎드려서 받아쓰기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나네.
그러던 중 큰오빠가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고 군 면제를 받게 됐어. 처음엔 그냥 디스크이거니 했는데, 점점 허리랑 다리에 힘이 없어지더니 지팡이를 써서 걸어야 했지. 서울의 한 대학병원까지 와서 진료를 받았지만 결국 병명은 찾을 수가 없었어. 그냥 신경성질환으로 나오더라고.
가정의 불화는 큰오빠의 증상이 심해지면서 일기 시작했지. 그때 아버지의 시선이 흡사 사탄의 그것과 같았고, 그게 너무 싫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왔어. 일산에 있는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2주 코스 컴퓨터 교육을 받았고, 국립재활원에 들어가서 제과교육도 받았어. 직업훈련원에서 남편을 만나게 됐거든. 나이차이가 조금 났지만, 그 사람이 숟가락만 들고 오라는 프러포즈를 했고, 양가 반대를 헤치고 결혼을 했어. 1년 후 아이를 낳게 되면서 몸이 무척 안 좋아졌어. 다니던 회사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남편이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면서 아이와 나를 돌봐야 했거든. 남편은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그 땐 그 사람의 힘듦을 잘 몰랐어.
벌이에는 한계가 있었고, 내 몸은 점점 안 좋아졌으니 국립재활원에 얼마간 입원해 있다가 결국 시설을 알아보고 철원의 시설로 들어갔어. 그때가 1996년,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지. 누가 시설에 들어가 살고 싶겠어. 식구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갈 데 없는 나에게 시설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곳이었어. 어린 딸아이도 떼어 놓고 갔으니, 독한 마음으로 들어갔지. 그때도 지금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뼛속까지 스며든 절망과 외로움
내가 살던 시설은 요양원이었어. 나 같은 신체장애인이랑 지적장애인들이 함께 살았지. 예상은 했지만 시설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어.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하나같이 짱뚱하게 밀려있었고, 남자는 파랑, 여자는 분홍색 똑같은 나일론 추리닝을 입고 있더라고. 정확히는 직원들이 관리하기 쉽도록 머리카락 밀어놓고, 단체복을 입혀 놓은 거지. 그런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아, 이곳에서, 이렇게 처박혀 살아야 하는구나.’ 절망했지.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시간이 지나니 적응이 되더라. 요양원 생활은 정말 외롭거든. 어디가든 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마는, 적응이 되지 전까지 뼛속까지 외로워야 했어. 힘들기도 했지만 직원들이나 그곳에 살고 있는 동료들과 친해지면서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지. 가끔은 ‘이런 것도 행복이구나!’ 싶기도 했어.
하지만 그 곳은 시설. 비포장도로를 차로 30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그 곳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곳이 분명하지. 15년 살면서, 눈치 보지 않고 외출하는 것 따위는 사실 불가능했어. 첫 외출은 노조가 생긴 다음이었지. 그 전에는 휠체어 타고 나가려면 사람들 손이 필요한데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이동에 문제도 있으니까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도 있었고. 그래도 나는 낫지. 싫은 것, 좋은 것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나 같은 장애인(신체)은 지적장애인들과 짝을 이뤄서 살았어. 늘 부족했던 직원들 대신 그이들은 우리의 손이고 발이 되었지. 모든 것이 시설에서 지급대로, 딱 그만큼만 주어졌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어.
시설에 들어와서도 시간이 한 참 흘렀으니까 지금은 딸아이도 많이 컸겠지? 시설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제 사춘기 소녀가 되었어. 웬일인지 내 몸은 갈수록 안 좋아지는데, 딸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니까 남편과는 이혼을 했어. 가족들도 여유롭게 살고 있지 않으니 나를 좀 도와 달라고 이야기 하긴 어려웠고, ‘그냥 나는 이렇게 살아야하는구나’ 생각했지. 그냥 시설에선 그랬어. 15년이나 살았는데, 별로 할 말이 없네.
“어깨에 날개가 달린 기분 알아?”
▲ "나 혼자 어딘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답답한 생활에 나조차 무기력해지고 있을 때, 시설에서 나가서 결혼해 잘 살고 있는 지영과 정혁은 나에게 큰 힘이 됐어. TV에 두 사람 사는 모습이 방송된 적 있는데, ‘나도 저렇게 살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 하지만 시설에서 자립을 결심하고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어. 엄살일지 모르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버거워. 목부터 온 몸이 저리고, 마비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내가 밖에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수년 동안 나를 시설에 묶어두었지.
작년여름에 시설에서 나와 시설에서 같이 살았던 경남이랑 종로에 살고 있어. 이제 1년이 됐는데, 아직까지는 밖에 나와서 살기 정말 잘한 것 같아. 활동보조가 모자라서 활동보조인 오는 시간에 맞춰서 화장실에 가야하는 거, 돈이 부족하니까 늘 돈 걱정해야 하는 거, 내년이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과 월세지원이 끝나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거 말고. 하하.
시설에서 나와서 연극을 시작했어.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뇌병변장애가 아니라 근이양증(골격근이 점차로 변성되고 위축되어 악화되어 가는 진행성 질환)이더라고. 갈수록 몸에 힘이 없고 움직이기도 힘들겠지. 숨도 쉬기 힘들어질 때가 올 거야.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가끔은 죽음이 나를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해. 몸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무대에서 공연을 해보고 싶어. 아주 예전에 [사랑의 굴레]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고두심이 “잘났어 정말”을 외치는 그런 역할, 아주아주 표독스러운 악역도 해보고 싶은데. 얼마 전엔 전동휠체어를 개조했어. 자꾸만 목이 넘어가기는 하지만, 나 혼자 어딘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줄 몰라. 어깨에 날개가 달린 기분 알아? 이게 정말 자유다 싶다.
효정의 편지 ‘말속에 담지 못한 이야기’
언니가 살았던 시설은 재단의 횡령이 심각했던 동양 최대 규모의 사회복지법인이었습니다. 때문에 시설비리척결과 민주화를 위한 노조투쟁이 2000년도 초반부터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이 법인체의 비리척결을 요구하며 종로구청앞에서 진행한 143일 동안의 노숙농성이 제 활동의 처음이기도 했습니다.
한 여성노조원은 “한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안 나왔다. 장애인들을 씻기는데 손이 너무 시려 고무장갑을 끼고 목욕을 시켜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시설의 이런 일화들은 많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20-30도까지 떨어지는 이곳에서 직원들과 시설거주 장애인들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복도 끝 난로 하나에 의지해 겨울을 났습니다. 이불을 세 개, 네 개 덮어도 온 몸이 얼어서 동이 트고 아침 해의 기운을 받는 그제야 잠이 들 수 있는 곳, 그렇게 힘들게 매 해 겨울을 넘기고 나면 사망하는 장애인의 수는 전국 장애인시설 중 최고였습니다.
대접에 밥, 국, 반찬을 섞은 한 그릇 밥이 식사의 전부. 직원이고 장애인이고 몸이 성한 사람은 이사장 개인 땅에 나가 땅을 일궜습니다. 밭일을 나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장애인들은 시설에선 사주지 않아 직원들 주머닛돈 털어 동네 천집에서 끊어온 기저귀를 차고 종일을 방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곳의 열악함은 거주인과 직원들에게 들어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만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녀 인생 42년. 이 시설에서 15년을 보냈습니다.
그런 언니가 삶에 특별한 굴곡 따위 없었다는 듯, A4 몇 장 채우지 않을 분량의 이야기를 밋밋하게 풀어냅니다. 깊지 않은 호흡, 작은 목소리로 언니가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날개를 단 새 전동휠체어로 문 앞까지 첫 배웅하며 설레고 슬픈 웃음소리를 흩날립니다. 그 후, 언니는 요즘 연극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실에서 12월에 열리는 연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말들이 무대에서 울려나오겠죠. (효정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대안언론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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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데 없는 나에게 시설은 유일한 선택이었어’
▲ "식구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갈 데 없는 나에게 시설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어"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뇌성마비로 어릴 적부터 손은 몸 뒤로 뒤틀려 있었고, 얼굴은 항상 찡그리고 있었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1년 전부터 몸이 약한 날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부모님이 출장소를 찾아다녔고, 다행히 이듬해에 입학통지서를 받고 학교에 들어가게 됐지. 바닥에 엎드려서 받아쓰기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나네.
그러던 중 큰오빠가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고 군 면제를 받게 됐어. 처음엔 그냥 디스크이거니 했는데, 점점 허리랑 다리에 힘이 없어지더니 지팡이를 써서 걸어야 했지. 서울의 한 대학병원까지 와서 진료를 받았지만 결국 병명은 찾을 수가 없었어. 그냥 신경성질환으로 나오더라고.
가정의 불화는 큰오빠의 증상이 심해지면서 일기 시작했지. 그때 아버지의 시선이 흡사 사탄의 그것과 같았고, 그게 너무 싫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왔어. 일산에 있는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2주 코스 컴퓨터 교육을 받았고, 국립재활원에 들어가서 제과교육도 받았어. 직업훈련원에서 남편을 만나게 됐거든. 나이차이가 조금 났지만, 그 사람이 숟가락만 들고 오라는 프러포즈를 했고, 양가 반대를 헤치고 결혼을 했어. 1년 후 아이를 낳게 되면서 몸이 무척 안 좋아졌어. 다니던 회사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남편이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면서 아이와 나를 돌봐야 했거든. 남편은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그 땐 그 사람의 힘듦을 잘 몰랐어.
벌이에는 한계가 있었고, 내 몸은 점점 안 좋아졌으니 국립재활원에 얼마간 입원해 있다가 결국 시설을 알아보고 철원의 시설로 들어갔어. 그때가 1996년,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지. 누가 시설에 들어가 살고 싶겠어. 식구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갈 데 없는 나에게 시설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곳이었어. 어린 딸아이도 떼어 놓고 갔으니, 독한 마음으로 들어갔지. 그때도 지금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뼛속까지 스며든 절망과 외로움
내가 살던 시설은 요양원이었어. 나 같은 신체장애인이랑 지적장애인들이 함께 살았지. 예상은 했지만 시설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어.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하나같이 짱뚱하게 밀려있었고, 남자는 파랑, 여자는 분홍색 똑같은 나일론 추리닝을 입고 있더라고. 정확히는 직원들이 관리하기 쉽도록 머리카락 밀어놓고, 단체복을 입혀 놓은 거지. 그런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아, 이곳에서, 이렇게 처박혀 살아야 하는구나.’ 절망했지.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시간이 지나니 적응이 되더라. 요양원 생활은 정말 외롭거든. 어디가든 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마는, 적응이 되지 전까지 뼛속까지 외로워야 했어. 힘들기도 했지만 직원들이나 그곳에 살고 있는 동료들과 친해지면서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지. 가끔은 ‘이런 것도 행복이구나!’ 싶기도 했어.
하지만 그 곳은 시설. 비포장도로를 차로 30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그 곳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곳이 분명하지. 15년 살면서, 눈치 보지 않고 외출하는 것 따위는 사실 불가능했어. 첫 외출은 노조가 생긴 다음이었지. 그 전에는 휠체어 타고 나가려면 사람들 손이 필요한데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이동에 문제도 있으니까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도 있었고. 그래도 나는 낫지. 싫은 것, 좋은 것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나 같은 장애인(신체)은 지적장애인들과 짝을 이뤄서 살았어. 늘 부족했던 직원들 대신 그이들은 우리의 손이고 발이 되었지. 모든 것이 시설에서 지급대로, 딱 그만큼만 주어졌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어.
시설에 들어와서도 시간이 한 참 흘렀으니까 지금은 딸아이도 많이 컸겠지? 시설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제 사춘기 소녀가 되었어. 웬일인지 내 몸은 갈수록 안 좋아지는데, 딸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니까 남편과는 이혼을 했어. 가족들도 여유롭게 살고 있지 않으니 나를 좀 도와 달라고 이야기 하긴 어려웠고, ‘그냥 나는 이렇게 살아야하는구나’ 생각했지. 그냥 시설에선 그랬어. 15년이나 살았는데, 별로 할 말이 없네.
“어깨에 날개가 달린 기분 알아?”
▲ "나 혼자 어딘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답답한 생활에 나조차 무기력해지고 있을 때, 시설에서 나가서 결혼해 잘 살고 있는 지영과 정혁은 나에게 큰 힘이 됐어. TV에 두 사람 사는 모습이 방송된 적 있는데, ‘나도 저렇게 살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 하지만 시설에서 자립을 결심하고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어. 엄살일지 모르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버거워. 목부터 온 몸이 저리고, 마비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내가 밖에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수년 동안 나를 시설에 묶어두었지.
작년여름에 시설에서 나와 시설에서 같이 살았던 경남이랑 종로에 살고 있어. 이제 1년이 됐는데, 아직까지는 밖에 나와서 살기 정말 잘한 것 같아. 활동보조가 모자라서 활동보조인 오는 시간에 맞춰서 화장실에 가야하는 거, 돈이 부족하니까 늘 돈 걱정해야 하는 거, 내년이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과 월세지원이 끝나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거 말고. 하하.
시설에서 나와서 연극을 시작했어.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뇌병변장애가 아니라 근이양증(골격근이 점차로 변성되고 위축되어 악화되어 가는 진행성 질환)이더라고. 갈수록 몸에 힘이 없고 움직이기도 힘들겠지. 숨도 쉬기 힘들어질 때가 올 거야.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가끔은 죽음이 나를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해. 몸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무대에서 공연을 해보고 싶어. 아주 예전에 [사랑의 굴레]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고두심이 “잘났어 정말”을 외치는 그런 역할, 아주아주 표독스러운 악역도 해보고 싶은데. 얼마 전엔 전동휠체어를 개조했어. 자꾸만 목이 넘어가기는 하지만, 나 혼자 어딘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줄 몰라. 어깨에 날개가 달린 기분 알아? 이게 정말 자유다 싶다.
효정의 편지 ‘말속에 담지 못한 이야기’
언니가 살았던 시설은 재단의 횡령이 심각했던 동양 최대 규모의 사회복지법인이었습니다. 때문에 시설비리척결과 민주화를 위한 노조투쟁이 2000년도 초반부터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이 법인체의 비리척결을 요구하며 종로구청앞에서 진행한 143일 동안의 노숙농성이 제 활동의 처음이기도 했습니다.
한 여성노조원은 “한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안 나왔다. 장애인들을 씻기는데 손이 너무 시려 고무장갑을 끼고 목욕을 시켜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시설의 이런 일화들은 많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20-30도까지 떨어지는 이곳에서 직원들과 시설거주 장애인들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복도 끝 난로 하나에 의지해 겨울을 났습니다. 이불을 세 개, 네 개 덮어도 온 몸이 얼어서 동이 트고 아침 해의 기운을 받는 그제야 잠이 들 수 있는 곳, 그렇게 힘들게 매 해 겨울을 넘기고 나면 사망하는 장애인의 수는 전국 장애인시설 중 최고였습니다.
대접에 밥, 국, 반찬을 섞은 한 그릇 밥이 식사의 전부. 직원이고 장애인이고 몸이 성한 사람은 이사장 개인 땅에 나가 땅을 일궜습니다. 밭일을 나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장애인들은 시설에선 사주지 않아 직원들 주머닛돈 털어 동네 천집에서 끊어온 기저귀를 차고 종일을 방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곳의 열악함은 거주인과 직원들에게 들어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만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녀 인생 42년. 이 시설에서 15년을 보냈습니다.
그런 언니가 삶에 특별한 굴곡 따위 없었다는 듯, A4 몇 장 채우지 않을 분량의 이야기를 밋밋하게 풀어냅니다. 깊지 않은 호흡, 작은 목소리로 언니가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날개를 단 새 전동휠체어로 문 앞까지 첫 배웅하며 설레고 슬픈 웃음소리를 흩날립니다. 그 후, 언니는 요즘 연극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실에서 12월에 열리는 연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말들이 무대에서 울려나오겠죠. (효정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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