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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88cc경기보조원, 부당징계무효확인 청구소송 항소심도 승소
"골프장 캐디도 근로자” 인정받기 위한 3년의 싸움
“사장님, 나이스샷~”
경기보조원, 흔히 ‘캐디’라 불리는 이들을 떠올리자 이 말부터 튀어나왔다. 돈 좀 있는 사장님들이 운동으로 유희로 사교로 치는 공이 날아가면 젊고 늘씬한 여자들이 박수를 친다. 대체 누가 이런 천박한 그림을 내 머릿속에 넣어두었을까. 경기보조원들이 3년째 일터를 지키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3년간의 싸움을 몰랐다는 사실에 놀라, ‘잘 알지 못하는’ 그녀들을 만나러 갔다.
경기보조원, ‘독한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못할 일
▲ 88cc 골프장 정문에서 1인시위 중인 조합원 © 희정
나를 태운 차는 산길로 들어서 굽이굽이 한참을 가더니 88cc(컨트리클럽) 골프장에 다다랐다. 햇볕이 강한 날, 정오였다. 챙이 긴 모자로 얼굴을 가린 경기보조원들이 골프카트에 부지런히 짐을 싣고 있었다. 골프카트는 길게 줄지어 있었다. 평일임에도 골프장 고객이 적지 않음에 놀라고 있는 사이, 김은숙 노동조합 분회장이 다가왔다. 어딘가 단단하면서도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가진 이였다. 정문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참이었다. 회사는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단체협약을 거부하고, 그녀를 해고했다. 노동조합의 절반이 해고가 됐다.
그녀는 나를 이끌고 건물 지하에 있는 경기보조원 휴게실로 내려갔다. 노동조합 사무실은 따로 없지만, 조합원 비조합원 사이가 원만해 휴게실 사용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계속된 회사의 탄압에 시달리다가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해 노동조합을 탈퇴한 이들이 많아, 비조합원일지라도 노동조합에 우호적이라 했다.
햇볕 짱짱한 바깥 날씨와 달리 지하 휴게실은 습했다. 앉아 있자니 일을 끝낸 경기보조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상품성’ 있는 외모일거라는 예상을 깨고 그녀들은 키도 체중도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샤워를 했는지 화장을 지운 민낯들이 피곤해보였다.
한 경기보조원이 인터뷰는 손사래 치며 거절하면서도, 캐디 인생은 이 지하실 같다고 한마디를 했다.
“아주 눅눅해요, 눅눅.”
무슨 말이냐고 묻지 않았지만, 머리에서 여러 단상들이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일의 고됨일 수도, 캐디라는 직업이 갖는 사회적 편견일수도, 고객에게 당한 성희롱일수도, 장마로 인해 줄어든 근무일수도, 복직 싸움의 어려움일 수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함일 수도 있을 것이라 막연한 추측을 해본다.
“여기서 일하는 분들 중에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러니까 이 일을 하는 거죠.” 김은숙 분회장의 말에 나는 생각보다 근무연수가 높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하려는 사람이 적으니까요.”
골프장 업주들이야 젊은 사람을 뽑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이 일은 생계를 책임지거나 가족이 있어 독한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못할 일이라 했다. 그만큼 힘이 든다고 했다.
골프 경기 하나가 끝나는데 보통 4-5시간이 걸린다. 거기에 대기시간, 골프채로 파헤쳐 놓은 필드 정리까지 합치면 7시간 정도를 골프장에 잡혀 있어야 한다. 땡볕 아래 몇 시간씩 걷고 뛰어서 받는 캐디피(경기를 보조하고 받는 임금)는 한 경기당 10만원 안팎이다. 야외에서 하는 경기라 궂은 날은 일이 없다. 월급이 아닌 경기마다 캐디피를 받으니 벌이는 계절에 따라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직원을 모집할 때 자유롭다고 홍보하던 출퇴근 시간은 실은 노동자의 통제 밖에서 움직였다. 캐디 일을 나가는 순번은 내 입맛대로 바꿀 수 없다. 오늘은 어느 수만큼 고객이 올지 모르니, 일단 출근을 해 대기를 하고 봐야 한다. 눈비가 내려 고객이 없을 것이 뻔해도 자신의 순번에는 출근을 해야 한다. 종일 대기를 하다가 허탕을 치고 오기도 한다. 그러니 개인 생활이 없다. 당장 며칠 뒤 약속도 내 마음대로 잡을 수가 없다.
한 경기보조원은 해도 뜨지 않는 시간에 어두컴컴한 산길을 달려 출근하는 것이 곤혹이라고 했다. 무섭다고 했다. 대체로 고객들이 이른 아침부터 골프장을 찾기 때문에, 여름 같은 경우는 새벽 4시부터 출근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와서, 한 경기도 캐디일을 못 나갔다고 했다. 그것도 일 년이나. 이 눅눅한 휴게실에 앉아 순번을 기다렸지만, 자신의 순번이 되어도 경기를 나갈 수 없었다.
“그땐 다들 날카로웠지. 휴게실에서 서로 얼굴 맞대고 있는 것도 짜증날 정도로 다 날카로워져 가지고.”
경기에 나가지 못한 이는 그녀만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경기보조원들이 일을 얻지 못했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였다.
노조 설립 후 이어진 직장폐쇄, 부당해고
▲ 국가보훈처 앞에서 시위 중인 88cc 조합원들.
1999년 88cc 경기보조원들은 노동조합을 세웠다. 노동부로부터 노동조합 설립필증까지 받았지만, 회사는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기보조원은 원래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조합 설립이 무효라고 했다. 88cc는 이들을 ‘개인사업주’라 했다.
그러나 경기보조원들은 캐디피를 100원 한 푼 임의로 받을 수 없었다. 회사가 정해준 방식과 금액에 따를 뿐이었다. 이를 지키지 않을 시 바로 해고가 됐다. 근무 시간도 경기보조원이 정할 수 없었다. 지각을 하거나 정해진 순번에 나오지 않을 경우, 일주일간 일을 주지 않고 골프장 잔디를 뽑게 하는 등 보복성 징계가 주어졌다. 출퇴근 시간을 결정하는 순번조차 경기보조원이 결정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회사의 통제를 받았다. 그럼에도 회사는 경기보조원을 소사장이라고 했다. 특수고용직이라는 꼬리말이 그녀들에게 붙었다. 그녀들은 허울 좋은 사장이라는 직함을 원하지 않았다. 일당 벌이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빠듯한 현실에, 사장이니 사업주니 하는 말은 말장난일 뿐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완강했다.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은 88cc는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3개월 회사 문을 닫으면 노동자들이 제 풀에 지쳐 나가겠지 하는 생각이었다.(후에 회사 내부문서를 입수해 노동조합은 직장폐쇄가 노동조합 탄압용이었음이 밝혀낸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88cc에 골프장을 위탁한 국가보훈처 앞에서 40일 넘게 싸웠다.
“그때는 당장 벌이가 끊긴다니까 무서웠죠. 그래서 진짜 열심히 싸웠는데…. 무서워서 매일 울고 그랬어요.”
무서운 싸움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두 차례의 직장폐쇄가 있었다. 그때마다 국가보훈처로 달려가 싸웠고 결국 회사는 직장폐쇄를 취하했다. 단체협약도 체결됐다. 한 4년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2008년, 회사가 단체협약 맺기를 거부했다. 또다시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정권이 바뀌었고, 정권 초 특수고용직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했다. 회사는 공공연하게 말했다.
“이제 너희 좋은 시절 다 갔다.”
회사는 고객불친절이라는 주관적 사유를 들어 조합원을 해고했다. 이에 항의하자 명예훼손으로 52명을 집단해고 했다. 당시 조합원이 104명이었는데 딱 절반을 해고시킨 것이다. 본보기였다. 노동조합을 탈퇴하면 바로 복직이 됐다.
회사는 해고되지 않은 조합원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조합원들에게만 일을 주지 않았다. 회사는 회원고객들과 조합원을 캐디로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회원고객들이 골프장 주 이용객이었기에, 조합원들은 일을 잃었다. 대기 상태로 있다가 필드도 한번 못 나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휴게실에 종일 앉아 자기 번호가 호명되기만을 기다리는 일을 1년 가까이 했다. 생활이 쪼들려갔다. 회사의 노골적인 무시에 상처 입었다. 좁은 휴게실에서 생계 걱정에 상처 입은 자존심에, 날카로워진 사람들이 모여 지냈다. 그래서 일부로 더 웃고 지냈다고 한다. 간식을 싸오고 장난을 치고, 더 소리 내어 웃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것은 다른 직원들이었다. 회사에서 조합원에게 일을 주지 않으려고 순번을 엉망으로 만드니, 비조합원들도 그 피해를 보았다. 회사 내 불만이 높아졌다.
결국 회사는 손을 들었다. 회사는 조합원에게 일을 주지 않는 행위를 그만두었다. 일 년 동안 노동조합을 탈퇴한 이는 겨우 1명이다.
복직 위한 싸움은 힘들지만 ‘비굴하지 않아 좋다’
▲ 2009년 88cc분회 김은숙 분회장은 조합원에 대한 집단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국가보훈처 앞에서 ‘단식’농성을 했다. ©조이여울
한 경기보조원을 붙잡고 물었다. 노동조합 세우고 고생한 이야기만 들었다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나니 달라진 점은 없냐고.
“좀 당당해졌지”
10년 넘게 경기보조원으로 일했다는 양소영 씨는 말했다. “예전에는 회사에 늘 잘 보여야 하고 늘 비굴해야 하고 그랬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그녀는 20대 후반에 이곳에 들어왔다고 했다. 어머니 병이 위중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병간호를 하다 보니 일반 회사에 취직할 나이가 지나버렸다. 직장을 찾다보니 사촌언니들이 하고 있던 캐디 일이 눈에 들어왔다. 정작 사촌언니들은 그녀를 만류했다.
“이 일이 소문이 안 좋잖아요.”
젊은 여성들이 골프를 칠 재력이 되는 남성들과 함께 일한다는 이유로 경기보조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소영씨는 그런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하니 보통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보듯 웃으며 골프장 고객 옆에 서 있는 것이 업무가 아니었다. 경험과 경력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일이었다.
회사에는 대기인원이 많아지지 않게 필드의 경기가 원활히 진행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고객들 입장에서는 전후 경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안전한 경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필요들을 맞추며 경기를 보조하는 것이 그녀의 업무였다.
“우리 일이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손님의 기분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경기 흐름을 조절해야 해요. 경기 흐름이 너무 뒤처지면 뒤의 일행들이랑 거리 차이가 나지 않아 공을 치는 것도 위험하고 하니, 그럴 때는 서둘러 주세요. 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일단 듣는 입장에서는 싫은 소리를 하는 거니까 그전에 다른 보조업무들을 더 잘해야 하는 거예요. 고객 마음에 딱 들게. 그래야지 우리가 요구를 할 때는 그게 받아들여지니까.”
김은숙 분회장도 말을 거든다. “골프장마다 지형이 다르기 때문에 고객이 거리를 가늠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때 우리가 몇 킬로 정도 됩니다, 알려주는 거예요. 손님 중에는 우리가 잘 안 알려줘서 경기가 안 됐다고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경기 룰은 물론이고 지형 파악도 해야 하고, 경기 흐름도 읽어야 하고.”
오랜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근무시간이 일정치 않고 장시간 근무를 해야 하니, 다들 오래 일을 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그만두는 것이 관례였다. 자연스레 젊은 여성들이 몇 년 일하고 떠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단체교섭에서 노동조합이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은 육아휴직이었다. 비록 무급휴가이긴 해도, 그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경기보조원들은 휴직을 해 아이를 키우고 다시 골프장으로 돌아왔다. 장기근무가 가능해졌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15년, 20년을 근무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별스럽지 않은 이유로 해고가 됐다. 그러니 인정할 수 없었다.
김은숙 분회장은 노동조합 탄압사를 말하다가 ‘우리 참 많이 싸운 거 같아요’ 하며 스스로 놀라워한다. “진짜 오래 싸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노동조합 하나를 인정받겠다고, 그리 오랜 시간을 싸워내고 있다. 힘드냐고 물으려던 나는 김은숙 분회장의 다음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싸우다니, 우리 진짜 잘하고 있는 거 같아요. 이렇게 오래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힘든 시기이니까, 이렇게 지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장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를 두고 나는 웃었다. “장기 투쟁사업장 인터뷰를 하면서, 오래 싸운 게 잘한 일이라고 말하는 분은 처음 봐요.”
싸우기 전 그녀들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장은 더욱 아니었다. 노동자가 아닌 자리에서 그녀들은 무언가를 빼앗겨 왔을 것이다. 싸움은 힘들지만 비굴하지 않아 좋다는, 오래 싸워 잘하고 있다는 그녀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보조원 노동자성 재차 인정한 고등법원 판결
이들을 다시 만난 것은 8월 29일, 국가보훈처 앞에서였다. 매달 국가보훈처 앞에서 이뤄지는 항의집회였다. 그러나 이날따라 그녀들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말끝마다 웃음이 이어졌다. 이틀 전, 고등법원이 88cc경기보조원의 노동조합 합법성과 회사의 부당해고를 인정한 것이다.
법원은 ‘경기보조원들이 골프장 측의 구체적인 지휘와 감독을 받고 있는 점, 이들의 수입 역시 골프장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들의)노조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특수고용직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판결이다.
법이 이렇게 노동조합의 정당함을 인정하는데, 과연 회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이을까. 조합원들은 복직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김은숙 분회자은 주변으로부터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한편,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며 담담하려 했다. 그녀들은 노동자가 아닌 적이 없다.
이날 사회를 보던 조합원은 국가보훈처의 간판에 달린 말을 인용해 말했다. “88cc 경기보조원들은 전국의 여성 노동자들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입니다.(국가보훈처는 ‘국가보훈은 국가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입니다’라고 쓰인 간판을 달았다.)”
허울 좋은 개인사업자라는 이름 앞에, 노동조합 하나 번번이 만들지 못하는 모든 경기보조원들에게 자신들의 싸움이 의미가 있길 바란다는 그녀들은 싸운다. 그리고 성과를 만들어 낸다. 그 싸움 속에서 경기보조원들의,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의 미래가 조금 더 밝아지고 있다. (르포 작가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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