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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제도를 생각하다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가 가진 의미를, 당사자의 경험을 통해 섬세하게 고찰한 글을 소개합니다. 격월간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1년 9·10월호에 실린 글로, 박김영희님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입니다. -편집자 주]
다음 생에도 이 몸을 만날까
“다른 것 다 잊어도 좋습니다. 이것만은 꼭 기억해 주세요. 약속 시간을 꼭 지키셔야 합니다. 밤새도록 화장실 가고 싶었던 이용자가 당신이 올 때까지 시계만 보며 1분 1초 시간을 세우며 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활동보조인 교육시간에 강조하는 말이다. 다양한 연령과 삶의 경험과 차이들이 존재하는 활동보조인들이 교육장에 앉아서 나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활동보조인으로 일하면서 과연 나의 이 말을 얼마나 기억할 런지.
늦은 시간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을 연결해주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활동가가 전화 한 통을 받고 표정이 어두워진다. 중증 장애인에게서 온 전화다. 활동보조인이 연락도 없이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활동보조인이 와야 집에 들어갈 수 있고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밖에는 빗줄기가 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한다. 그 활동가는 급한 마음으로 전화를 여기저기 걸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나고, 그것을 또 실행하고.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고 대책 없는 행동이었다. 지금처럼 활동보조인이 제도화가 되어 있었던 때도 아니어서 믿을 것 하나 없었는데 생리적인 현상 하나 어떻게 처리할지 참 막막했다.
화장실 보조해줄 사람이 없어서, 편의시설이 없어서
생애 처음 집 밖을 나와 혼자 부산에서 동해까지 버스를 타고 갔을 때, 1997년 ‘국제 장애여성 리더십 포럼’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서 미국 워싱턴까지 비행기 안에서 16시간을 견뎌야 했을 때, 2000년 장애여성 성폭력 사건이 장애여성운동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 같아 성폭력상담원 교육을 받겠다고 한국성폭력상담소 문을 두드리고 2주 동안 8시간씩 교육 받을 때, 2003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경찰과의 대치를 벌이고 있을 때, 2005년 장애인 활동보조인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6시간 동안 기어가며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외칠 때, 이 모든 중요한 순간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나에게는 말 할 수 없었던 고통의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것은 화장실이 너무 급한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때로는 편의시설이 안 되어서, 여성이어서, 그래서 선택의 여지없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참는 것이었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것.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비장애인들과는 다르게 항상 먼저 고민해야 했던 것은 바로 화장실 보조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 이동수단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안정적으로 이 고민이 해결되고 어떤 일을 시작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무모하게 또 시작하고 또 참아내는 것을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하고 싶다. 그리고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의 몸은 더 할 수도 없을 만큼 지쳤다.
얼마 전 중증 장애여성 희가 어려운 일이 생겨 우리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어젯밤에 그녀의 활동보조인이 그녀를 이불에 눕혀주고 갔고 아침시간을 담당하는 활동보조인이 와야만 그녀는 일어나서 활동할 수 있다. 그런데 와야 할 시간을 넘겨 전화 한 통이 왔다. 활동보조인이 몸이 아파 올 수가 없다고 한다. 희는 물론이고 누워있는 희를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나 역시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허허허 웃었다.
그리고 희의 머릿속은 생각이 복잡해졌고, 나의 손은 전화기를 들고 있었고, 우리는 말이 많아졌다. 어쨌거나 희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내 마음을 잘 아는 가까운 사람이다. 나의 형편을 잘 알고 있어 구차하게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내 자존심에 상처주지 않으면서 그리고 희의 자존심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달려와 줄 수 있는 사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래도 무조건 부탁할 수는 없다. 그의 형편이 어떤지 먼저 살펴보는 질문을 해본다. 상황이 좋지 않다. 일단 왜 전화했었는지 조심스럽게 말하고 다른 방법을 더 찾아보고 더 안 되면 도와달라고 하겠다고 후퇴한다.
희의 활동보조인을 연결해주는 중계기관의 코디네이터도 비상사태다. 다른 활동보조인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결국 희의 직장동료가 출근하다가 달려와서야 희는 일어날 수 있었고, 목욕을 하고 동료와 함께 출근했다. 나는 전화를 한 것뿐인데 마치 큰 노동을 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지쳤다. 이렇게 에너지가 바닥이 되는 것은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습관처럼 엄습하는 좌절감이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거나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조차 할 곳이 없는 처지가 중증 장애인의 현실이다. 아직도 멀기만 한 장애인의 독립된 삶이다.
우리가 원한 활동보조인 제도는 이런 것이 아닌데
중증 장애인은 자원봉사자가 있어야만 이동가능 하던 1990년대, 한 번 외출하려면 사흘 전에 차량봉사를 부탁해야만 외출이 가능 하던 무렵 어느 날이었다. 모임의 총무를 맡았던 나는 꼭 참석해야만 했다. 사흘 전에 자원봉사자 차량신청을 해두었고 올 시간이 다 되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현관 앞에서 신발까지 신고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렸다. 왜 늦고 있는지 전화도 없다. 마냥 기다린다. 점점 화가 나다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라도?
두 시간 만에 나타난 자원봉사자의 얼굴은 뭔가 기분이 언짢은 표정이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사과나 변명 한 마디 없이 “지금이라도 갈 거요?”란다. 난 괜히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며 “네, 늦어도 가야 해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약속장소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내가 돈을 내며 이용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눈치 보며 할 말 못하고 이런 기분이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떤 때는 자원봉사자에게 외출한다고 도움을 청했다. 선선히 도와주겠다고 해서 약속 날 외출준비를 다하고 기다리는데 연락이 없다. 독촉한다고 할까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전화해보면 “깜박 잊었다”거나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어렵단다. 그럴 때면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고 목구멍에서는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데 “네, 할 수 없지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음에 가죠. 다음에 뵈어요.”라고 명랑한 척 밝게 대답했다.
나는 그때 언제인가 이러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무례하고 예의도 없고 무책임하고 그리고 존중받지 못하고 비굴해져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자원봉사가 모두 이랬던 것은 아니다. 자원봉사자로 인해 많은 관계 맺기가 있었다. 장애인의 사회적 활동지원 시스템이 없을 때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자원봉사자들과 관계 맺음은 다양한 만남과 다양한 기회를 갖도록 해주었고 그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내 삶의 지지자들이었다. 진심으로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장애인이 자기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 있어야 했기에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 투쟁을 치열하게 하였다. 2005년 서울 시청광장에서, 대구시청 앞에서, 광주시청 앞에서, 원주시청 앞에서, 경기도청 앞에서 장애인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투쟁했던 중증 장애인들의 헤어스타일은 삭발이었고 모두 단식 다이어트를 했으며 그을린 얼굴로 투쟁을 피서 삼았다.
그렇게 투쟁하면서 장애인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를 요구 하였고 올해는 ‘장애인활동보조인 지원법’이 제정되어 이제야 제도화 되고 시행령도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용대상 장애인을 인정하는데 그 기준은 더 까다롭고 더욱 제한적이다. 사지마비, 와상상태, 수급자가 아니면 그나마 이 제도도 그림의 떡이 되는 생색내기 정책이다. 우리가 바라던 활동보조제도화는 이런 것이 아닌데 말이다.
필요한 만큼 당당하게, 그런 날이 올까?
중증 장애인이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중증 장애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장애 등급 판정을 새로 받아야 한다. 1급 장애여야 하고 누워있을 정도의 와상장애인이거나 손가락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사지마비여야 한다. 심사를 받고 병원 진단서에 장애 정도가 중증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장애판정이 1급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1등급으로 판정 받는 순간, 다행이다 싶지만 또 기분이 나쁘다. 내 몸에 낙인 되는 등급이 사회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제도에서 수급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한정된 예산 때문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 그래서 참아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 이런 방식 말고는 없는 것일까? 인간으로 존중받으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받으면서 사회보장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또 한 차례 보건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인정 기준표에 체크를 해주어야 한다. 이 표의 점수에 따라 활동보조 시간이 결정 된다. 그러니 잘해야 한다. 인정 기준표에 있는 질문을 받는다. 혼자 밥을 먹을 있느냐? 옷을 혼자 입을 수 있느냐? 화장실을 혼자 갈 수 있느냐? ‘혼자 샤워 할 수 있느냐? 이 순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수혜대상이 되려면 참아야 한다. 아니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열심히 설명해야 한다. 활동보조 시간을 한 시간이라도 더 받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래야 살 수가 있다. 수혜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비굴해지는 것이다. 장애인의 일말의 자존심까지 포기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정부의 장애인 정책이다.
1997년 처음 독립해서 살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너, 밥은 어떻게 먹을 거냐? 누가 네게 밥을 갖다 주냐? 화장실은 누가 도와 주냐? 부모 형제 아니고 그걸 누가 하겠냐?”
그때 내 대답은 참 궁색했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살다보면 어떻게든 살아지겠죠. 너무 걱정 마세요. 일단 나가서 살아볼 게요.”
아버지가 생존해계실 때 항상 내가 밥은 먹었는지. 화장실 못 가서 고생하지는 않는지, 걱정을 놓지 못하셨다. 지금 독립생활을 시작하는 장애인은 부모님의 걱정에 나와 같은 대답은 하지 않을 수 있다.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가 있어서 괜찮아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대답할 만큼,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장애인의 입장에서 기대할 만큼 되어있지 않다.
서비스 시간이 적으면 활동보조를 할 사람이 없다. 중증 장애인을 기피한다. ‘활동보조인’이라는 일에 직업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좋은 일도 하고 돈도 버는 아르바이트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활동보조인에게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진행을 하지만 아직 장애인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 인식과 인권의식 부재는 여전히 교육만으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니, 활동보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희가 말한다. 그 말에 충분히 공감이 된다. 활동보조인 중계기관에서도 활동보조인에게도 중증 장애인은 몇 시간짜리 사람이다. 그리고 활동보조인에게는 일하는데 ‘편한 장애인’ ‘힘든 장애인’으로 구분되고 활동보조인 사이에 ‘나쁜 장애인’ ‘좋은 장애인’으로 평판이 생겨난다.
처음부터 나의 몸을 잘 이해하고 보조를 할 수 있는 활동보조인을 만나기란 대단히 어렵다. 먼저 낯선 사람과 신체접촉을 해야 한다. 동성이라고 해도 서로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목욕 보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몸을 보여야 한다. 활동 조건에 따라 시간대에 맞는 활동보조인이 다르게 배치되었을 때 또는 활동보조인이 바뀔 때마다 낯선 사람에게 내 몸을 보인다는 것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쉽지 않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중증장애가 있는 내 몸에 대한 우울한 인정이다.
갈수록 활동보조인서비스제도화가 나의 몸을 상업적 대상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이 많은 장애인을 활동보조인들은 선호한다. 목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들지 않는 장애인을 원한다.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려면 내 몸을 최소한 가볍게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활동보조를 잘 받기 위해서 활동보조인이 일하기 좋은 몸이 되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뚱뚱한 장애인은 다들 힘들다고 할 테니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평등한 관계 맺기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의 사적 공간에 들어온다. 그리고 장애인의 모든 생활은 물론 장애인의 몸을 알게 된다. 그렇게 활동보조인과 장애인은 매우 긴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적인 관계다. 그래서 공과 사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관계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장애인이 공적 관계를 넘어서는 요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활동보조인이 가끔 공적 관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한다면 당장 그에게 몸을 맡겨야 하는 장애인 입장에서는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활동보조인이 장애인 이용자와 함께 하는 시간은 바로 이윤의 만들어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책임성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이를 문제제기하는 장애인은 까다로운 장애인 취급을 받고는 한다. 활동보조인들 사이에서 기피하는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장애인들 사이에서 기피되는 활동보조인도 마찬가지로 생겨난다.
장애인도 활동보조인도 각자 살아온 환경과 경험의 차이가 있고 가치기준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맞추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양쪽 모두 만족하는 관계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서로 만족하는 관계인 것 같은데 한 발짝 가까이 들어가 보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희생을 하고 있거나 어느 한 편이 의존하고 있거나 이용하는 관계를 보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평등한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해서 불화가 없는 관계가 평등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용한 관계가 평등하고 좋은 관계는 아니다. 장애인이 보조받으면서도 자기 권리가 보장되고 동시에 활동보조인의 자율적인 노동이 보장되는 평등한 관계 맺기가 필요하다. 무척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제도의 불완전과 예산부족, 인식부족, 인력부재 등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장애인과 활동보조인만의 문제로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장애인의 사적 공간과 모든 정보를 알게 되는 활동보조인은 아는 것만큼 힘이 되고 일정 정도 권력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일정기간을 지나면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의 관계를 끊으라고 할 수도 없다. 장애인은 모두 다른 몸을 가지고 있고, 활동보조인이 이것을 익히고 장애인의 몸을 이해하고, 이제 겨우 편한 보조를 받게 되었는데 또 다시 새로운 활동보조인과 만나 다시 시작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과연 장애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
또한 활동보조인에게 노동권이 확보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불안정한 노동현장에 있는 활동보인에게 책임 있고 인권적이고 존중감 있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인권침해가 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거듭 평등한 관계 맺기를 고민해야 한다.
어느 장애인이 비장애인 친구와 즐겁게 얘기를 나눈다.
“나 화장실 좀 도와 줘.”
“오늘은 활동보조인과 같이 안 왔니?”
어느 장애운동 단체에서 장애인 활동가가 비장애인 활동가에게 말한다.
“나 화장실 좀 도와줘요.”
“업무 중에 활동보조인을 이용하는 것으로 신청 안 했어요?”
왜 서운함이 생길까? 단순히 서운함만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다. 친구에게 장애를 가진 내 몸을, 그런 나를 이해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장애를 가진 나를 친구로, 동지로 생각한다면 나를 보조하는 것 또한 나의 특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의 연장선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충분히 감정적인 것일 수 있다. 친구, 동지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반면 평등한 관계를 위해서 이런 보조를 바라는 것도 의존성을 높이는 것이기에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함께하는 동지로서 장애가 있는 동지를 보조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도 아니다. 단순히 보조의 유무가 아니라 서로 지지하는 동지애가 필요하다.
장애인 활동가의 의존적이지 않고 독립된 활동가로서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활동보조를 받는다고 독립되지 않는 활동가라고 규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장애를 가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 몸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장애를 부정하고 장애인을 인정하기는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한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제도화가 된다고 하여도 활동보조인을 동행하고 싶지 않는 순간이 있다. 친구를 만나러 혼자 나서고 싶다. 그리고 가끔은 혼자 서점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놀고 싶다.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생리적인 보조의 필요성은 남아 있다. 그래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도 다양한 형태로 사회전반에 걸쳐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한 여러 방안들이 필요하다.
장애인의 정체성을 장애운동을 하고 있는 나에게 스스로 물어 본다. 다음 생에서도 장애를 가진 몸을 만나고 싶으냐고. 그런데 아직은 대답이 망설여진다. (박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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