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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21)
재석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지난 번 잠시 볼 때, “8월에 다시 보자” 하고 헤어진 것이 훌쩍 2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꼭 보자며 몇 주 전부터 날을 잡고서야,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대학 동창인 재석이와는 같은 문학 동아리 회원이었고, 졸업 후에는 다른 몇몇 친구들과 동호회를 만들어 글 쓰는 걸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기도 했었다.
지금은 모두 생활에 쫓겨 문학은 청년시절의 꿈으로 물러나 있지만,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그를 위해 시집을 두 권 챙겨서 나갔다. “시를 쓰고 싶어 했잖아! 이 책들이 다시 네게 시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민 시집들을 재석이는 정말 즐겁게 받아들었다.
우리는 명동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차도 마셨다.
“여기서 명동성당 가깝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화제를 바꾼 사람은 재석이었다. ‘거기 가보고 싶다’고 덧붙이는 그에게, ‘그럼, 가자’며 난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9월에 접어든 지 여러 날이 지났건만, 여전히 날씨는 한여름처럼 불볕이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명동의 골목길들을 지나, 성당 입구에 다다랐다.
“우리, 이곳에 자주 왔었지? 그리고 여기! 정말 많이 앉아 있었는데!”
입구에 낮고 길게 펼쳐진 계단을 가리키며, 재석이는 명동성당에서 정치집회가 자주 열렸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활짝 웃는다. 나는 그저, “그랬었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난 명동성당을 생각하면, 대학시절보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늘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재석이와 성당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면서도 왼쪽 광장 한편으로 눈을 돌렸다. ‘옛날엔 저기 어딘가 벤치가 있지 않았나?’ 아니, 어쩜 옛날에도 이곳은 이렇게 불볕뿐이었을 지도 몰랐다.
딸의 첫돌이 막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제 아이를 어딘가에 좀 맡기고 일을 하러 다녀야겠다고 마음먹고 신문광고들을 뒤적이며, 일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취업광고를 보고 회사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찾은 곳이 이곳 명동이었다. 설명회는 명동성당 근처 한 사무실에서 열렸다. 나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며, ‘명동성당 안 그늘에 가있으라’고 했다. 빨리 끝날 줄 알았던 설명회는 쉬이 끝이 나지 않고, 게다가 알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외판원 일이라는 것에 실망해, 맥이 빠져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넘은 뒤였다.
날은 정말 더웠다. 처음부터 외판원일이라고 말해주었더라면 오지도 않았을 걸, 더운 날 헛걸음을 치게 한 사람들에게 더욱 화가 났다. 난 속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명동 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성당 뒤편, 그늘에 있을 거라 기대했던 아이와 남편은 어이없게도 불볕의 성당입구 계단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남편은 내가 이렇게 늦게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눈치였다. 근처엔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아이의 똥기저귀가 던져져 있고, 아이는 스트레스에 찬 표정으로 아빠의 손을 끌면서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이보다 더 힘들고 지쳐보였던 사람은 남편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무실에 가려던 남편과 우리는 만사 제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건을 거론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고통을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관계, 우리의 부부관계는 이미 그렇게 금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이혼한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프랑스로 떠나와서야 그날 힘들었을 전남편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날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잘 알고 있다고, 그때 그를 안아주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마음 아파, 울었다.
그 사람을 다 잊은 지금도 가난한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
“재석아! 저 앞 건물, 2층에 중국집 있었던 거 기억나?”
잠시 젖어있던 기억에서 빠져나와, 나는 재석이에게 지금은 다른 상점으로 바뀐 한 건물의 2층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 앞에 앉아 있으면, 어찌나 짜장면이 먹고 싶었는지.... 그런데 돈이 없어서 한 번도 못 사먹었다.”
“그래? 그럼, 우리 있다가 돌아갈 때는 짜장면 사먹자!”
“좋아, 좋아!”
재석이의 뜻밖의 제안이 너무 즐거웠다. 지난 시절의 아쉬움과 상처들은 이렇게 회복될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그냥 가슴 속에 묻고 살아가기도 한다. 내겐 그날 기억이 그렇겠지. 그렇게 세월이 흐르겠지. (윤하)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대안언론 <일다> 바로가기
재석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지난 번 잠시 볼 때, “8월에 다시 보자” 하고 헤어진 것이 훌쩍 2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꼭 보자며 몇 주 전부터 날을 잡고서야,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대학 동창인 재석이와는 같은 문학 동아리 회원이었고, 졸업 후에는 다른 몇몇 친구들과 동호회를 만들어 글 쓰는 걸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기도 했었다.
지금은 모두 생활에 쫓겨 문학은 청년시절의 꿈으로 물러나 있지만,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그를 위해 시집을 두 권 챙겨서 나갔다. “시를 쓰고 싶어 했잖아! 이 책들이 다시 네게 시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민 시집들을 재석이는 정말 즐겁게 받아들었다.
우리는 명동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차도 마셨다.
“여기서 명동성당 가깝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화제를 바꾼 사람은 재석이었다. ‘거기 가보고 싶다’고 덧붙이는 그에게, ‘그럼, 가자’며 난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9월에 접어든 지 여러 날이 지났건만, 여전히 날씨는 한여름처럼 불볕이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명동의 골목길들을 지나, 성당 입구에 다다랐다.
“우리, 이곳에 자주 왔었지? 그리고 여기! 정말 많이 앉아 있었는데!”
입구에 낮고 길게 펼쳐진 계단을 가리키며, 재석이는 명동성당에서 정치집회가 자주 열렸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활짝 웃는다. 나는 그저, “그랬었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난 명동성당을 생각하면, 대학시절보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늘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재석이와 성당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면서도 왼쪽 광장 한편으로 눈을 돌렸다. ‘옛날엔 저기 어딘가 벤치가 있지 않았나?’ 아니, 어쩜 옛날에도 이곳은 이렇게 불볕뿐이었을 지도 몰랐다.
딸의 첫돌이 막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제 아이를 어딘가에 좀 맡기고 일을 하러 다녀야겠다고 마음먹고 신문광고들을 뒤적이며, 일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취업광고를 보고 회사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찾은 곳이 이곳 명동이었다. 설명회는 명동성당 근처 한 사무실에서 열렸다. 나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며, ‘명동성당 안 그늘에 가있으라’고 했다. 빨리 끝날 줄 알았던 설명회는 쉬이 끝이 나지 않고, 게다가 알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외판원 일이라는 것에 실망해, 맥이 빠져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넘은 뒤였다.
날은 정말 더웠다. 처음부터 외판원일이라고 말해주었더라면 오지도 않았을 걸, 더운 날 헛걸음을 치게 한 사람들에게 더욱 화가 났다. 난 속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명동 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성당 뒤편, 그늘에 있을 거라 기대했던 아이와 남편은 어이없게도 불볕의 성당입구 계단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남편은 내가 이렇게 늦게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눈치였다. 근처엔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아이의 똥기저귀가 던져져 있고, 아이는 스트레스에 찬 표정으로 아빠의 손을 끌면서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이보다 더 힘들고 지쳐보였던 사람은 남편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무실에 가려던 남편과 우리는 만사 제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건을 거론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고통을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관계, 우리의 부부관계는 이미 그렇게 금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이혼한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프랑스로 떠나와서야 그날 힘들었을 전남편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날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잘 알고 있다고, 그때 그를 안아주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마음 아파, 울었다.
그 사람을 다 잊은 지금도 가난한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
“재석아! 저 앞 건물, 2층에 중국집 있었던 거 기억나?”
잠시 젖어있던 기억에서 빠져나와, 나는 재석이에게 지금은 다른 상점으로 바뀐 한 건물의 2층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 앞에 앉아 있으면, 어찌나 짜장면이 먹고 싶었는지.... 그런데 돈이 없어서 한 번도 못 사먹었다.”
“그래? 그럼, 우리 있다가 돌아갈 때는 짜장면 사먹자!”
“좋아, 좋아!”
재석이의 뜻밖의 제안이 너무 즐거웠다. 지난 시절의 아쉬움과 상처들은 이렇게 회복될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그냥 가슴 속에 묻고 살아가기도 한다. 내겐 그날 기억이 그렇겠지. 그렇게 세월이 흐르겠지.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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