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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살인사건,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다 논평] 경찰의 인권의식 부재가 여성에 대한 폭력 키운다
4월 1일 수원에서 한 여성이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성폭행, 살인도 모자라 시신을 훼손한 이번 사건은 내용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일이었지만, 그만큼이나 끔찍한 것은 경찰의 대응이었다. 피해자가 위급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구조 요청을 했음에도 안일하게 대처했을 뿐더러, 이 사실을 축소하고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기 때문이다.
신고전화가 연결되어 있던 시간은 “15”초 정도라더니 “1분 20초”에서, “7분 36초”로 늘어났다. “신고에서 장소가 특정되지 않았다”는 경찰 측 발표와 달리, 피해자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납치된 장소를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이 알려진 후 하루가 다르게 경찰의 거짓말이 추가되었다.
13일 경찰청 감찰담당관실이 경기경찰청 112신고센터 신고전화 녹음파일을 정밀 분석한 결과, 녹음파일 끝부분에서 ‘끊어버려야겠다’라는 등 음성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피해자가 경찰이 자신을 발견해주길 바라며 휴대전화 통화를 끊지 않은 것을, 경찰이 안일하게 대처하며 심지어 ‘먼저’ 끊어버린 것이다.
112 신고센터 직원 개인의 문제 아니다
연쇄살인 등 강력사건을 주로 연구해온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7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번 일이 경찰 내부 문화와 미비한 시스템에서 기인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수원사건 녹취록에서 "112 신고센터에 배치된 지 채 2개월이 되지 않은 경찰관이 전화를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흔적이 역력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미숙한 대응이 단지 경험이 적은 직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표창원 교수가 지적하는 ‘시스템의 부재’의 내용은 심각하다.
“112 신고접수 업무는 경찰에서 그다지 중요한 자리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이 업무를 제대로 하기 위한 전문교육이나 업무집중도 역시 떨어질 우려가 상존해 있다.”
이번 사건의 경찰 대응은 “현장에 출동하는 경찰관이 112센터와 연락하며 빈틈없이 신속하고 효율적인 수색이 이뤄지는 시스템이 구축되거나 훈련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경찰관이 서무, 예산, 회계, 장비 등 모든 분야를 담당하며 이리저리 부서를 옮겨 다니는 현 구조”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112 신고접수 업무는 사건 발생을 최초로 인지하고 그에 따른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중요한 업무이며, 훈련된 전문성이 요구되는 자리다. 그런데 이 자리가 ‘한직’ 취급을 받고 있고, 긴급사건 대응의 전문성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비단 긴급사건 신고와 대응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경찰조직 전체의 체질개선이 필요한 문제라는 점에서 한숨이 나올 뿐이다.
피해자 보호보다 ‘승진’이 전부라는 생각은 경찰의 직업적 윤리의식 부재를 드러낸다. 이는 그간 국민의 인권보호보다 정권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에 매달려왔던 경찰조직 수장들이 보여 온 행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성폭행? 부부싸움? 경찰에게는 너무 ‘사소한’
수원 살인사건의 경찰의 대응에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들은 10일 “수원살인사건, 안일하게 대처한 국가가 살인자다!”를 외치며 기자회견을 가졌다.
▲ 수원 살인사건의 경찰 대응에 항의하며, 여성단체들은 4월 10일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여성단체들은 이번 사건의 경찰 대응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로 “이 모든 안일한 대처 이면에 여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과 여성폭력피해자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12신고 녹취록 상에는 피해자가 “성폭행”, “모르는 아저씨”를 분명히 말하고 비명소리와 테이프 뜯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고가 5분 44초가 경과된 시점에서 “아는 사람인데.. 남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부부싸움 같은데...” 라는 근무자 사이의 대화가 들린다.
또한 이번 사건에 대한 경찰의 대응이 문제로 지적되자 경찰에서는 “단순성폭행인 줄 알았다”는 말을 변명처럼 이야기했다.
경찰의 변명은 성폭력의 위험을 늘 피부로 느끼고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성폭행은 그 자체로 ‘위급한 범죄’이다. 납치나 살해가 동반되지 않더라도 긴급한 구조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오랜 기간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해 온 여성단체들은 “우리는 가해자와 아는 사이였다는 이유로,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 재판으로 대변되는 공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의심당하면서 2차, 3차 피해를 당하는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을 보아왔다”고 증언했다.
“이 모든 엉망진창인 대처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소한 것’과 ‘심각한 것’으로” 보는 인식과 “피해자의 진실성을 의심하면서 피해자에게 모든 범죄사실의 입증을 요구해왔던 우리 사회의 관행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지적이다.
가해자 면피성 발언 보도하는 ‘언론’도 여전해
이러한 관행은 언론의 보도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언론들이 수원살인사건을 처음 보도할 때 ‘어깨를 부딪쳐서 그랬다’는 범인의 말을 발문에 뽑아 실었다. 범인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임을 강조해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은 계획범죄임이 밝혀졌다.
‘어깨를 부딪친 것’과 ‘잔혹한 강간살해’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결코 인과관계가 납득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면 우발성보다는 계획성에 무게를 싣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판단일 것이다.
범인의 면피성 발언만 단순 강조하여 보도하게 되면 피해자에게도 일말의 책임을 묻는 듯한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이미 이전에 여성단체들은 유영철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잔혹한 범죄에 대해 보도할 때 여성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는 듯한 범인의 발언을 강조해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차례 말해왔다. 그럼에도 이러한 보도윤리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문제를 ‘사소하게’ 보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번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CCTV를 확인했다. 사건 내용을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가해자의 진술을 더 우위에 놓은 것이다.
여성폭력이 얼마나 ‘사소하게’ 취급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가정폭력, 성폭력 등 여성폭력에 의해 살해되는 여성들에 대한 기본적인 통계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여성단체들이 단순히 언론 보도된 사건만을 집계해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여성폭력에 의해 살해된 여성의 숫자는 지난 3년간 209명이다. 미수를 포함하면 299명, 주변 가족 등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347명이다.
여성단체들은 “이는 최소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가정폭력, 성폭력으로 살해당하고 있는지 현황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땜질 아닌, 경찰 시스템과 인식 변화를 요구한다
경찰의 안일한 대처와 은폐 시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현오 경찰청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경찰청장의 사임은 늘 반복되어오던 ‘여론 잠재우기’ 용도에 그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가해자의 얼굴을 공개한 것도, 경찰에 집중된 비난 여론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낳게 한다.
이번 수원살인사건을 통해 불거진 경찰의 문제가 경찰 내부의 시스템과 여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에 대한 진정성 있는 대책 논의는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잇따른 아동 성폭행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처벌강화’로만 땜질식의 처방을 내렸다. 현장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해온 활동가들은 이번 사건에서도 이러한 일이 또 되풀이 될까 우려하고 있다.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책임 있는 자세로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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