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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마시고 마음이 좋으면 ‘좋은 와인’
<일다> 여라의 와이너리(winery) 9. 밥짓기
4월 말부터 런던에 잠시 머물고 있다. 몇 주 전 버스 타고 집 근처 공원을 지나가다 직거래장(farmers market)이 선다는 플랜카드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 시간에 맞춰 나갔다. 다른 곳에 가면 내가 있는 곳을 새로 알게 된다는 여행의 진리를 거기서 다시 만났다.
런던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요리생활을 그리며
영국은 음식이 맛이 없기로 유명하다. 아마도 비가 많고 스산한 기후로 인해 우리처럼 뜨거운 햇볕을 받고 자란 다양하고 맛 좋은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 오기도 전부터 난 여기서 뭘 먹고 사나 걱정했다. 하지만 막상 몇 주 지내보니 국제도시라 다양한 음식이 있고, 맛있는 건 -비싸지만- 꽤 맛있다. 다만 전통음식이라 할만한 것들이 소시지, 고기 파이, 스콘, 생선과 감자튀김 등일 뿐이다. (아, 맥주도 있구나!)
여튼, 저번에 갔던 직거래장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실망이 컸다. 일단 규모도 생각보다 너무 작았고 구경거리도 별 것 없었다. 거기서 사온 채소가 맛있기는 했다. 또 직거래장에 가면 잘 모르는 재료로 어떤 음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인들이나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고, “이거 당신이 재배한 건가요?” 물었을 때 당당하게 “그럼요!” 하는 대답과 함께 자부심 가득한 농부의 표정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슈퍼마켓에 가면 남아공에서 온 사과를 살까, 프랑스에서 온 사과를 살까를 골라야 하니, 비록 작은 규모라고 해도 직거래장이 훨씬 좋은 것은 두말 해봐야 입 아프다. 제일 아쉬웠던 점은 그런 시장이 한 달에 딱 두 번 열린다는 것이었다.
▲ 스페인 리오하 지역 한 와이너리에서 갓 추수해 트랙터에 싣고 온 포도를 내려 선별작업대에 올리고 있다. © 여라
엄마의 부엌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한국음식이 비싼데 맛도 없는 지역에 살게 되었다. 엄마와 같이 살 때는 엄마가 해주는 것만 날름 받아먹었는데, 막상 내 부엌이 생기고 보니 엄마는 없고 기교 없이 재료에 충실한 음식은 무척 먹고 싶다는 갈등상황을 맞이했다. 해결책은 스스로 만들어 먹는 것밖에 없었다. 대단한 행운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사람들은 맛있는 것에 ‘환장’한 인간들이다. 분위기가 진취적이라 음식문화도 앞서가는데, 풍부한 농수산물이 가까운 곳에서 생산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버클리에만 길 한 블록을 가득 채우는 규모의 직거래장이 일주일에 세 번 선다. 그 중 한 번은 유기농만 판다. 그것도 일년 내내!
런던 시내 주택가에 한 달에 두 번 직거래장이 서는 것과 비교하니, 돌이켜보면 참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지역의 제철음식을 많이 먹게 되었고, 내가 먹는 과일과 반찬재료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알게 되었고, 여러 해 거듭되니 장에 나온 농수산물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재료는 엄청 싼데 사먹으려면 완전 비싸고 조미료도 많이 들어가 먹을 때마다 찜찜한 한인식품점 김치 대신, 직접 담그는 일부터 시작했다. 요리책을 들여다보고 김치 재료의 분량을 일일이 재어가며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기술이 늘면서는 온갖 반찬은 물론이고, 나중엔 족발도 삶고, 밤새도록 국물 내서 월남국수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밥은 한국에서 공수해온 무쇠솥에 지었고, 부엌에는 전자레인지를 두지 않았다. 심심하면 청국장도 띄우고, 빈대떡은 녹두 사다 불려서 거피부터 직접 했다. 내 삶 자체가 두 가지 문화를 걸치고 있는 데다가 다문화의 상징 샌프란시스코 아닌가! 온갖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내 맘대로 퓨전음식도 ‘작렬’했다.
포도가 와인이 되기까지, 그 다양한 갈래길
음식 만드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와 느낌이다. 재료가 좋으면 맛은 일단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 아니다, 절반 아니라 90%까지 좌우한다. 그리고,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같은 재료, 같은 레시피로도 어떤 사람은 참 맛있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걸 만드는 사람이 가진 느낌이라고 하고, 흔히는 ‘손맛’이라 한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포도의 질이 개떡같으면 아무리 훌륭한 기술과 시설로도 맛있는 와인을 만들 수 없다. 와인은 땅에 심어 가꾸고 수확한 과일로 만드는 농산물 가공품이니 말이다. 그리고 재료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해서 만드는 이의 ‘느낌’에 따라 와인을 상품화하는 것은 와이너리의 철학일 것이다.
▲ 스페인 리오하 지역 또다른 와이너리에서 기초발효가 끝난 레드와인. 포도껍질과 씨가 위에 떠올라있다. ©여라
포도가 와인이 되는 과정 자체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포도알을 으깨면 흘러나오는 포도즙 속 당분이 포도껍질에 묻어있는 효모를 만나 발효한다. 발효라는 과정은 당분이 효모에 의해 분해되면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가 생기고 약간의 열을 내는 화학작용이다. 그러니까 발효를 조금만 시키면 알코올은 조금만 생기고 포도즙의 당분은 많이 남아있다. 반대로, 효모가 당분을 다 먹어 치우도록 놔두면 단맛이 거의 남지 않는 만큼 알코올이 많이 생기는 이치다.
이론은 간단하다. 그런데 이런저런 와인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이유는 일단 포도의 종류가 많기 때문이지만, 같은 포도도 어떤 기후, 어떤 땅에서 어떻게 자랐느냐, 수확을 어느 시기에 무슨 방식으로 했느냐, 포도즙을 어떻게 냈느냐, 발효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그리고 발효과정이 끝난 포도주를 어떻게 얼마나 숙성시켰는지 등등 갈 수 있는 길이 오만 가지 갈래로 갈라진다. (그 이후에 병에 든 와인 한 병이 와이너리에서 와인시장을 거쳐 우리 식탁에 이르기까지에도 물론 얽히고 설킨 와인업계의 많은 손들이 있다.)
발효 과정에 있는 갈래길을 조금만 들여다보자. 화이트와인은 대개 청포도로 만들고 까만 포도로는 레드와인을 만든다. 레드와인의 색은 포도의 껍질 안에 붙어있는 속살에서 온다. 그러니까 까만 포도로 화이트 와인도 만들 수 있다. 어떻게? 까만 포도라도 포도알은 까맣지 않고, 즙을 내면 맑은 색이다. 으깬 포도에서 흘러나오는 즙으로만 와인을 만들면 와인에 붉은 빛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시중에 파는 포도 주스는 왜 까만 포도색인지 좀 의아하지만, 아마도 껍질 안쪽의 속살까지 짜내서 그렇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까만 포도로 어중간하게 즙을 내면 살짝 붉은 빛이 돌겠네? 그렇다. 로제와인이 핑크 빛이 도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리고 화이트와인에 레드와인을 살짝 섞어 만들기도 한다.
레드와인은 대개 포도껍질과 씨를 함께 넣어 발효시켜서 탄닌 성분이 우러나오게 한다. 예를 들어 가볍고 산뜻한 스타일의 소비뇽블랑 와인에 비해 이 탄닌이 와인의 진한 과일 맛과 산도를 버텨주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오래도록 숙성할 수 있는 기운이 되어주기도 한다. 보졸레누보는 포도알을 터뜨려 즙을 내 발효시키는 방법 말고, 포도알 째 단기간 발효시킨다. 그러면 싱그러운 과일 맛은 살아있고 탄닌도 적어 그 해 추수한 포도를 바로 몇 달 안에 맛보며 즐길 수 있다.
모든 와인은 각자의 이야기와 존재 이유가 있다
포도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효모의 종류도 많다. 포도껍질과 와이너리 공기 중에 있는 자연 효모에 의지하여 만드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다. 요즘도 이 방법을 고수하거나 다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한다. 대량생산되는 와인은 처음부터 자연효모는 깨끗이 제거하고 인위적이지만 예측할 수 있고 통제가 쉬운 효모를 사용하여 상품화한다. 같은 곳에서 자란 포도라 해도 어떤 효모를 사용했는지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와인 만들기에는 자연이 제공하는 요소와 사람이 관여하는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자연은 우리에게 기후, 토양 그리고 결정적으로 포도를 내어 주고, 사람은 포도를 가꾸고 와인을 만들고 숙성시킨다.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와인 한 병 한 병 안에 이것이 다 들어있다.
한 20년 숙성시켜야 그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와인도,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와인도,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든다. 비싼 와인, 덜 비싼 와인, 싸구려 와인은 주머니사정과 경우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 ‘가격’이 반드시 좋은 와인의 척도는 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싸구려에서 덜 싼 와인에 이르기까지는 대개 시장의 원리로 인해 가격이 와인의 질을 대변한다. 그래서 그 틈새를 노리는 것이 와인 고르는 재미이기도 하다.)
▲ 런던 남부에 있는 와이너리에 봄이 왔다. 지구온난화의 선물(?)일까. 과거에는 와인을 위한 포도 경작이 불가능했던 영국에서도 요즘엔 남부 지역에서 프랑스 북부의 샴페인 지역처럼 스파클링 와인을 만든다. © 여라
태어난 지역도, 자라난 땅도 아닌 그저 어쩌다 살게 된 버클리에서 밥을 지어먹으며 수도 없는 실패와 성공을 거두었다. 뭐, 음식 만드는 데에 성공이라는 것은 별 것 아니다. 그저 맛있게 먹고 마음이 좋았다는 말이다. 재료가 좋고 비싸다고 반드시 ‘성공’하진 않는다. 그 곳이 나에게 준 한 가지 가르침이 있다면 그건, ‘그래도 괜찮아’였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 그런 곳이다. 닷새를 세수하지 않고 돌아다녀도, 그닥 춥지 않은데 목도리 두르고 두꺼운 오리털 파카 입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눈 여겨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에서 살면서 성격도 좀 무난해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예전엔 못됐다거나 지금은 성격이 정말 좋다는 소리가 아니라, 전에는 좀 편안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남도 못살게 굴고 나 자신에게도 못되게 굴었다.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세상의 다양한 와인은 모두 각자의 이야기와 존재 이유가 있다. 맛있게 마시고 마음이 좋으면 좋은 와인이다. (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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