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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여성주의 미술가 이충열(2)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나의 페미니즘”.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개인들이 경험으로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두번째 필자 이충열씨는 여성주의와 삶, 그리고 교육을 연결하는 미술작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의 페미니즘”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www.ildaro.com
성장하는 미술가로, 삶을 놀이로 삼다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다. 해야 하는 것만 하며 사는 삶이란 죽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생각이 나를 현재에 이르게 한 것 같다.
실연의 아픔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졸업이 다가왔다. 학생 신분이라는 안전망까지 사라진 후의 세상이 너무 무섭고 막막했다. 목표도 꿈도 없이 살아온 세월이 나를 너무 작게 만들었다. 안정감을 위해 학교를 다니고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만 하며 살아왔을 뿐, 나의 삶은 방향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면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경험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야 무언가 진짜 시작이 가능할거라 생각했다. 내가 알았던 나를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나를 경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현대미술’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현대미술은 전통적인 미술처럼 작가가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과시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옹호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세상에 딴죽을 건 ‘아방가르드 미술’작가들처럼 용감해지고 싶었다. 불안정한 인생을 받아들이며 미술을 해보기로 했다. 스물일곱 살의 일이었다.
▲ 정상가족이데올로기에 대한 입장을 담아 제작한 드로잉 [market] 부분 컷(2009년) © 이충열
‘성공한’ 미술가보다는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적인 힘을 가진, 자율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키우기로 했다. 내가 나의 지지자가 되기로 했고, 보호자가 되고, 스승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하려면 심각하고 무거운 나의 태도부터 고쳐야 했다.
삶을 ‘놀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도전’처럼 거창하게 이름붙이면 결과에 대한 부담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놀이’라고 생각하면 감정이 밀착되어 두렵거나 괴로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내가 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삶 자체가 ‘미술 작업’이자, 작업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경험들에 조금이나마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나에 대한 ‘발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무서워서 못 해 본 것들,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던 것들을 하나씩 해보는 놀이를 시작했다. 생일날 머리 밀기. 혼자 놀이동산 가기. 소년처럼 입고 행동하기. 욕을 유창하게 할 수 있도록 연습하기. 혼자 노래방 가서 나만의 앨범 만들기. 매일 다니는 길을 처음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기. 한 번도 안 가본 동네에 가서 길 잃기. 지하철에서 쳐다보는 아저씨와 눈싸움 이기기. 하루에 한번 이상 ‘싫다’고 거절하기. 사람들(사실은 나)의 고정관념을 비웃으며 따가운 시선을 즐기기...
해방감이 느껴졌다. 내가 못할 것 같았던 것을 해낸 것이 너무 신기하고 대견하고 재미있었다. 외부의 시선에 기준을 둘 때보다 더 자유롭고 멋진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뿌듯했다. 차이에 대한 이해도 조금은 생기는 것 같았다. 친구를 믿고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것들도 이야기해보았다. 모든 두려움은 내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것을 배워나갔다.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왜’ 그런지 생각해보았다. 나의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어린 내가 받았던 상처들을 어루만져주는 시간들을 가졌다. 무엇이든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들을 기록했다. 표현하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에너지 넘치고 강한 사람이 되어갔다.
내 안의 오만함과 권위적인 태도에 직면하고
현대미술을 공부하고 싶어서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는 시설을 이용하고, 자극을 받고, 좋은 교육을 큰 수고 없이 받을 수 있는 ‘제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뭐든 최대한 많이 배워나가야겠다는 의욕으로 가득 찼다.
작업을 서로 비평하는 시간에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친구들의 작업을 분석했다. 한번은 ‘게임 만들기’ 과제에서 큰 고민 없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게임에 대해 많은 것을 고려한 것처럼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딱 봐도 가위바위보 몇 번이면 끝날 것 같은데, 절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직접 게임을 해보자고 했고, 가위바위보를 계속 이겨서 1분도 안 돼 게임을 끝내버렸다.
집요하게 분석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내 태도는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에게 공격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무언가를 물어볼 때만 나를 찾았고, 평소에는 나를 불편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열심히 하는 내가 왜 문제인지 억울했다. 덜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이는 친구들을 탓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에게 하는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도 해대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내가 먼저 답을 찾아 결론 내린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은 공격이 맞았다. ‘나는 이미 맞고, 네가 내 답에 맞나 틀리나‘를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도 문제였다. 노력은 스스로 선택할 일이지 강요할 것은 아니다. 실망도 상대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나의 기대 때문이므로 내가 만들어낸 마음일 뿐이었다.
나는 나의 오만함과 권위적인 태도를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나를 믿는 상태에서 하는 끊임없는 성찰은 나의 단점이나 현재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나아질 것이 너무 많아서 노력할 게 많고, 그것은 나에게 부담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었다.
‘폭력’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파트너와의 관계 뿐 아니라, 학교에서의 내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내가 제대로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이야기만 하고 싶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술의 안과 밖에서 ‘소통’을 고민하다
막연히 ‘현대미술’만 생각하며 달려온 나에게 ‘소통’이라는 단어가 더 크게 자리 잡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소통은 ‘오고, 가는’ 것이다. 내가 내린 결론을 관객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건네는 작업. 관객이 참여하고 해석하고 또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 관객들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여 발전하는 작업. 그런 작업을 하고 싶어졌다.
작업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새로운 경험과 발견을 나누고 싶었다. 나와 다른 차이들을 발견하고, 그 차이를 이해해나가고 싶었다. 나는 미술 안과 밖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내가 관계맺음을 통해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는 확신에 찬 공격적인 태도부터 바꿔야 했다. 내 안의 어린 나를 키울 때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필요했다. 칭찬과 격려도 필요했다. 인내심도 필요했다. 친절함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했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며 내 뜻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오해되는 부분은 상대의 잘못이라기보다 나의 부족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집중해서 들으려고 노력했다. 상대의 역사와 경험을 아는 것이 중요해졌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졌다.
사람들은 다시 나를 여성스럽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 소통하고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태도였다. 또한, 너무 단단하고 뾰족한 내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작업의 주제나 형식도 나를 표현하고 의견을 주장하는 게 의도였던 닫힌 작업에서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고 해석할 수 있는 열린 작업으로 바뀌어갔다.
캔버스 회화나 조각처럼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것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물질로 가득 찬 세상에 또 하나의 (언젠가는 쓰레기가 될) 물질을 보태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려 하는 것도 미술가를 높게 위치시키는 권위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여 조심한다. 또한 내가 모든 것을 지휘하고 통제하며 진행하는 작업의 방식도 피하려 한다. 특별하거나 위대한 미술가가 아니라, 관객과 동등한 위치에서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전업 작가의 길도 포기했다. 자율적으로 작업을 하려면 작품판매 외의 경제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미술’이라는 틀 바깥의 경험은 다양한 고민을 가능하게 하고, 보다 많은 사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술적으로 놀며 소통해온 나의 실험들
▲ 한 가지 공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소통과 판단이 일어나도록 하는 [링가링가놀이]는 2007에 만들어서 여러번 플레이되었다. © 이충열
작업을 하는 태도가 구체화되면서 나는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다.
한 가지 공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소통과 판단이 일어나도록 하는 놀이를 만들었다. 나에게 여분이 되어버린 옷을 내어놓음으로써 다른 이가 가진 다른 옷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놀이를 만들고 설치했는데, 개인의 욕망을 존중하면서 집단적 차원의 소통과 절약을 실천하며 서로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작업이었다. 나의 역할은 놀이의 방법을 만들고 진행할 뿐, 참여자들의 선택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
학교 안팎에서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발언하고 예술로서 행동해보자는 의지를 모아 협업으로 웹진을 만들기도 했고, 시국에 대한 개인적인 발언들을 편지로 받아 성명서로 바꾸는 시도도 해보았다.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치고 요청하고 거절당하며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을 통해 작은 세상을 경험했다.
재개발 위기에 놓인 재래시장과 그 지역의 관계를 표현한 설치 작업은 규모가 크고 많은 노동을 들여 뿌듯함이 있었는데, 화려한 이미지는 주제를 감추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나의 입장을 표현한 드로잉 시리즈를 통해서도 작업에 대한 작가의 의도나 입장보다 흥미로운 표현이 보는 이들에게 더 크게 다가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인이 듣고 싶은 ‘인정’과 ‘위로’의 말을 적어서 서로 나눠가지는 놀이도 진행했다. ‘미술작품’이라는 무게와 틀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소통을 도울 수 있는 작업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은 대중매체를 관찰하고 궁금한 것들을 공부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사람들의 욕망에 대해 배우고 있다. 또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쓰레기들 중 몇몇을 분류하고 모으는 작업도 몇 년째 진행 중이다. 노동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나의 노동을 기록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하기 싫은 일이었던 설거지를 사진으로 담는 작업을 시작해 이제 일 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만들었던 놀이나 교육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미술적으로 놀기]도 첫 번째 시도를 마무리 하고 있다.
여성주의 미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공부를 하면서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좋다. 교만한 내가 나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은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는 중요한 힘이 된다. 너무 훌륭한 여성주의 미술 작업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너무 기쁘다.
하지만 여성주의 작가들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남성중심의 사회제도와 자본주의 욕망이 기대하는 것은 여전히 ‘천재’ 예술가의 ‘대단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기대하는 것은 대중매체에서 쉽게 발견되고, 작품 또한 규모가 크거나, 아름답거나, 특별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일상에 지친 많은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흥미롭고 감상이 쉬운 작업들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성찰로 시작되는 여성주의적 태도는 주제 뿐 아니라, 작업의 전 과정을 세심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지배 논리에 대해 경계하지 않고 예술작품이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 작품, 그리고 자기표현과 타인의 인정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면 고려할 필요 없는 것들이 여성주의 미술에서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사회적인 ‘성공’이 아닌, 개인들의 ‘성장’과 ‘소통’에 가치를 두는 나는 불평하는 마음이나 불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성주의 미술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다는 것은 아쉽다. 그래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다.
하고 싶은 것만을 하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더 많이 하며 살 수는 있다. 그리고 잘 들여다보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나의 어떤 욕망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모두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이다.
변명하고 싶고 뭔가 억울할 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내가 모두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를 더 주체적으로 만들어주고 자유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남을 탓하거나 후회하며 사는 것이 더 싫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연습한다.
하지만 모두가 나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말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가능한 선택에 대해서까지 그 기회를 놓치거나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생긴다.
나는 지금도 너무 권위적이고 어설프다. 작업도, 공부도 더디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계속 나아질 것이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지는 않으려 한다. 또한 ‘(절대적인) 옳고 그름’으로 생각하던 습관을 바꿔서 ‘(나의) 좋고 싫음’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도 연습한다. 그것이 나를 유연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것 같고 행복하다.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준이나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경험과 고민의 여정이 나를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나에게 이런 힘을 준 ‘여성주의’와 ‘미술’이 너무나 좋다. (이충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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