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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나의 페미니즘> 미디어교육 활동가 혜경(2)
여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개인들이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와 사회적 영향을 독자들과 공유하며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첫 필자 혜경님은 여성주의 미디어교육 활동가이며 성공회대 실천여성학 석사과정에 있습니다. “나의 페미니즘”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www.ildaro.com
가부장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직장과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애썼던 나의 노력은, 사실상 많은 여성들이 경험해본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페미니즘을 생각하며 내가 살아온 삶을 회고해보면, 기억에도 남지 않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수현’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되다
거울을 본다. 낯설다. 어색하다. 지난주 짧게 자른 머리가 자꾸 신경이 쓰인다. 초등학교 때 머리에 이가 생겨서(30대 후반 이후 나이라면 이런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강제로 잘리고 대성통곡한 이후 이렇게 짧은 머리는 처음이다. 문득, 기억엔 없지만 사진으로 남은 나의 어린 시절 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짧게 자른 커트 머리, 밤색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고동색 남자아이 구두를 신고 불편한 미소를 띠고 있다.
위로 언니가 둘인 나는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 세 자매를 데리고 외출 하셨는데 “아유, 쓸데없는 지지배들이 셋이나 있네!” 라는 말을 남모르는 할머니에게 듣고 집으로 돌아와 분한 마음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으셨다 했다. 아빠도 아들 욕심이 별로 없으셨고, 할머니도 막내 며느리인 엄마에게까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성화가 없으셔서, 아들이 없는 것은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던 엄마에겐 꽤나 충격이셨다고 했다.
또 주위에서 ‘지금은 젊어서 그렇지 나중에 나이 들면 아들 없는 남자들 바람 핀다’는 말로 엄마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 같다. 엄마는 굉장히 강인한 분이셨지만,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던 1970년대 초 한국사회에서 엄마 스스로 초연하긴 힘드셨을 것 같다. 그래서 엄마가 선택한 것은 바로 셋째 딸인 나를 아들로 만드는 것이었다.
외모만 남자인 것이 아니라 이름도 중성적인 이름인 ‘수현’으로 바꾸고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부르라고 강요하셨다. (그 동안 잊고 있었다. ‘수현’.) 지금도 어릴 적 엄마친구들이나 친척들, 사촌들은 나를 ‘수현’이라고 부른다. 어릴 적 그 이름이 너무 싫었지만, 모두들 이미 익숙해진 터라 내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또 ‘수현’이다. 지금은 그냥 그 이름도 받아들인다.
물론 남장한 나의 모습은 내 기억에 없다. 엄마가 딸 둘과 아들 하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당당한 척하셨겠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자괴감과 비참함과 나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을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리다. 여자인 딸을 여자의 모습이 아닌 남자의 모습과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엄마의 선택이었지만, 가부장제 하에서 엄마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셨을 테니 말이다.
여자의 모습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다
다섯 살 때 동생이 태어났다. 천만다행으로 남자아이였다. 엄마는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과 나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별로 기억에 없다.
아마 그때 동생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나의 남장은 계속되었을 것이고, 성별 정체성의 혼란으로 힘든 기억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여자의 모습을 찾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남아용 검정구두를 갖다 버리라고 하며 빨간 구두를 사달라고 하였다나? 그 후로도 예쁜 것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다. 친구들은 빨간 구두나 검정 구두가 고작이었지만, 난 남들이 신지 않는 노란 구두를 신고 다녔다.
언니들은 짧은 머리에 바지차림이었지만 난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머리는 길게 길러 땋거나, 묶거나 쪽지거나 하였다. 엄마도 유독 나에게만 예쁜 것들을 입히셨고, 언니들도 예쁜 것들은 모두 내게 양보하였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게 겪었을 상처를 그것들로 치유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동생과의 차별도 없었다. 물론, 우리 딸들에게는 50원짜리 하드 바를 사주셨고, 동생에게는 150원짜리 브라보 콘을 사주셨지만, 그 외 교육의 기회나 경제의 기회는 똑같이 해주셨다. 참, 남들이 딸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예쁜 동생에게 나는 무지 질투를 했고, 엄마는 아들을 향해 “딸이냐?”고 묻는 질문에 분노하셨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는 언니들과는 달리 나에게 늘 예쁘게 하고 다니라고 말씀하셨다. 결혼 후에 집에 올 때도, 화장 곱게 하고 제일 좋은 옷으로 입고 오라고 하셨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지만 엄마에게도 그때의 일이 자리잡고 계셨던 것이다.
나 역시 잊고 살았지만, 이유 없이 싫었던 짧은 머리를 40여년이 지난 지금 아무 생각 없이 하고 보니, 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잠시 빼앗겼던 성별 정체성에 대한 상처가 아물었나 보다.
거울 속 낯선 커트머리의 나를 보며
지금 엄마가 살아 계시다면 뭐라고 하실까? 그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함께 웃을까? 어리석게 왜 어린 너에게 그런 짓을 했을까 하고 속상해하셨을까?
여자로 태어나 겪게 되는 원치 않는 차별, 억압, 종속, 부당함 같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릴 때 잠시 했던 남장이 뭐가 그리 상처였을까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갔던 엄마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린 딸의 성별 정체성을 빼앗는 일이었다는 것은 시대적 아픔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도 딸이라는 이유로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았던 경험이, 우리 모녀에게 아주 오랫동안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엄마는 나를, 나는 나 스스로를 옭아맸던 것은 내가 여자이기에, 딸이기에 겪었던 상처였다. 40년만에 처음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거울 앞에 서서 낯선 내 모습을 본다. 내 모습에서 엄마를 본다. (혜경)
*여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는 독자들의 응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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