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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창간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미디어교육 활동가 혜경(1)
여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이 연재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개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와 사회적 영향을 평가하며 독자들과 함께 여성주의 대안담론을 만들고자 합니다.
첫 연재는 여성주의 미디어교육 활동가이자 성공회대학교 실천여성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혜경님의 기록 2편이 이어집니다. “나의 페미니즘”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나는 어디쯤에서 페미니즘과 만났을까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은 그다지 치열하지도, 신선하지도, 격정적이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내 삶은 평범했고, 그 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어디쯤에서 페미니즘과 만났을까를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내 기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면 만나볼 수 있을까?
이성애로 결합된 부모님, 가부장제 아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신들의 역할에 충실했고, 남매들은 사건사고 없이 조용했던 우리 집은 이웃들이 인정하는 모범가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반대에 부딪힌 나의 결혼이 성공하기까지의 무용담이 있었지. 그건 우리 집의 충격 1호였다. 조용한 나의 성격에 어찌 그런 일을 벌였는지 지금도 놀랍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왜 결혼이란 걸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들은 서울로 유학 보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강고한 집념 덕분에 아빠는 중학교생활을 서울에서 했고, 그런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시가와 멀리 떨어져 시집살이라는 것을 겪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여자 삶의 반 이상을 보내야 하는 며느리로서의 엄마의 고충을 경험하지 않아, 가부장제 하에 여자로서의 억압과 불평등, 차별, 이런 걸 별로 고민해 본적이 없다. 물론 남편과 아내, 딸, 아들로 구성된 우리 가정에서 소소한 사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크게 문제로 와 닿지 않았다.
초등학교 이후 줄곧 여학교만 다녀서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고민이나 남학생들과의 차별을 겪지도 않았다. 아니, 감수성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물론 선생님들로부터 여자가 지켜야 할 태도나 정서에 대해 끊임없이 세뇌를 당해서, 난 나이 들면 저러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한 것이 반항의 전부일까?
그러다 처음 사회에 나와서 겪게 된 일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난한 나 홀로의 투쟁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연장자 남성이 지배하는 회사에 입사한 ‘미스O’
1990년대 초에 입사한 회사엔 나의 아버지보다 나이 어린 사장과,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전무 그리고 이사, 부장 등이 있었다. 전무는 사장의 처형(妻兄)이었는데 회사의 실질적인 오너였다. 입사한 다음날 여자선배(사실 선배라 부르지 않고 “미스O언니”라고 불렀다)는 나에게, 전무가 가끔 담배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는데 아버지라 생각하고 해주라고 하였다.
‘아버지? 우리 아빠도 나에게 담배 심부름은 시키지 않는데. 그리고 전무가 왜 내 아버지야?’ 선배에게 따지지는 못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일을 할 수 없었다. 실제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대응할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회사에는 사환(使喚)이라고 야간학교에 다니며 주간에는 회사에서 온갖 굳은 일을 하는 학생들이 두 명 있었었는데, 전무의 담배 심부름은 이들에게만 돌아갔다.
▲ 처음 사회에 나와서 겪게 된 일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난한 나 홀로의 투쟁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 그림 - 박희정
당시엔 ‘가부장제’라는 말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가장(家長)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가족성원들을 지배하고 통솔하는 모습이 가정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회라는 공동체가 사실은 권력을 가진 연장자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사회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강력한 권한으로 통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엄마가 강한 리더십을 가졌고, 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입사해서 또 한 번 놀란 것은 여직원에겐 이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이 결혼을 하면 자기 이름대신 ‘OO댁’, ‘OO엄마’ 라고 불리는 것처럼, 회사에서 여직원은 ‘미스O' 이었다. 남자직원들끼리의 호칭은 ‘O선배’, ‘OOO씨’지만, 여자직원들끼리는 ‘미스O 언니’, ‘미스O!’라고 불렀다. 언니라는 말은 가정에서 또는 친근한 사적 관계에서의 호칭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공적 영역도 여자들의 관계는 사적인 것처럼 만들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 위로 여자선배가 둘 있었다. 한 명은 지나친 여성성을 무기로 남자직원들에게 아양과 앙탈을 부리는 선배였고, 다른 한 명은 그와는 정 반대로 매우 무뚝뚝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배였다. 남자직원들이 지나친 여성성을 보이는 여직원과는 표면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뒤로는 두 선배를 조롱하고 힐난하는 것을 목격했다.
선배들의 지나친 여성성도, 배제된 여성성도 나는 불편했지만, 인간적인 덕목이 부족한 선배들과는 ‘자매애’나 연대를 맺을 수가 없었다. 같은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로 묶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그때 체험하였다.
나는 대신 후배들을 변화시키려 했다. 의식적으로 후배 여직원들을 부를 때는 ‘OOO씨’ 라고 호칭하니, 어느덧 남자직원들도 그렇게 여직원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여성은 서로 연대를 맺을 때 많은 것을 이룬다고 했는데, 여자선배들과 연대를 했다면 더 일찍 많은 변화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배들은 자신과 조금 다른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업은 여자가 할 일 아냐’ 견고한 성별분리
회사는 일본에 본사가 있고 해외에 지사가 있는 반도체 및 정밀기기를 생산하는 곳이었는데, 내가 일하던 곳은 한국의 지사로 일본의 생산품을 수입하거나 무역 도매를 했다. 업무 특성상 이공계를 전공한 남자직원들은 기술영업 업무를 담당하고, 여자직원들은 회계와 경리, 무역, 관리 등의 업무를 나눠 하였다. 처음엔 모두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출을 올리는 성과는 남자들의 업무에서 나왔고, 여자들은 그 업무를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영업 관리는 중요한 일이긴 했지만, 스스로 일을 만들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남자들이 벌여 놓은 일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돌봄’이라는 영역과 일맥상통한다. 관리와 지원이 결국은 돌봄과 보살핌의 영역으로 치부되면서 여자의 영역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왜? 라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여자는? 일을 하다 보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조금씩 영업 쪽 일에 관심을 갖고, 또 1990년대 중반에 거래처 구매팀에 여직원들이 업무를 맡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상대로 내가 영업 업무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업부 차장이 내게 본격적으로 기술영업팀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왔다.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구나 하고 잔뜩 기대했는데, 하루도 못 가 바로 다음날 차장이 나를 불렀다.
차장은 영업팀에서 회의를 한 결과 ‘여직원이 영업팀에서 함께 일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다. 여자가 할 일은 아니다’ 라는 의견이 있었다고 했다. 다들 여자가 영업을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들이라, 어제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였다. 남자들의 영역을 침범 당한다고 생각했을까? 여자들의 갈 길이 매우 험하구나! 라고 느꼈던 씁쓸한 경험이었다.
여직원 최초 승진! 쾌거도 양육의 벽을 넘지 못했다
여자직원이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당시에, 나는 사내커플이 되어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여직원이 승진을 한다거나 직함을 갖는 일이 한 번도 없던 회사에서, 여자직원으로는 내가 처음으로 승진을 하였다. 회사에 조금씩 변화를 주고자 노력했고, 무엇보다 일을 통해 나를 보여주고자 했던 모습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결혼과 동시에 퇴사가 당연시되던 시기에, 나는 결혼을 하고도 자연스럽게 계속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여자직원의 ‘결혼과 동시에 퇴사’라는 문화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임신이 문제였다.
나는 출산휴가를 마치면 회사로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모유수유를 하지 않기로 했다. 사내에 수유를 위한 시설이란 걸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기였고, 직장을 다니면서 모유를 수유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애초부터 젖을 먹일 생각을 안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초유(初乳. 분만 직전과 직후 수 일간 분비되는 유즙)가 신생아의 면역력을 키워주고 총명하게 만들어 준다며, 꼭 초유와 모유수유를 하라고 권장하던 시기였다. 남편은 내 앞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지 않는 이기적인 엄마로 생각하는 듯했다.
한번은 유방암 검진을 위해 병원을 방문했는데, 의사는 모유수유를 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보이는 특징인 ‘치밀유방’(치밀유방이란 질병이 아니라, 유선조직의 밀도가 높아 검진을 했을 때 하얗게 나오기 때문에 종양 등을 관찰하기 어렵다)이 내게도 있다면서, 젖을 먹이지 않은 엄마들이 벌을 받는 거라고 말해 나를 경악시켰다. 지금도 언론에서는 모유수유를 하지 않는 여성들을 모성이 부족한 엄마로 그리고 있다.
나는 임신 중에도 출산하고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나니 아이를 맡길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처럼 양육도우미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마땅한 탁아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사회생활을 위해 아이를 길러 줄 테니 절대 퇴사는 하지 말라 하셨지만, 엄마에게 양육의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결국 출산을 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언젠가 여성운동을 하는 한 비혼(非婚)여성이 ‘여자들은 결혼하면 그냥 살림이나 하고 싶어요?’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일하는 기혼여성들의 양육 부담이나 경제활동과 가사활동을 병립할 수 없는 사회적 어려움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 그렇게 물은 것이리라 이해했다. 물론, 결혼과 동시에 집안으로 들어가는 걸 선택하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과연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다수 기혼여성들에게는 임신과 출산이 경제활동을 하는데 대단히 많은 걸림돌이 된다. 나 역시 남자들처럼, 남편처럼,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을 하고 싶었지만 양육과 돌봄까지 모두 여성의 몫으로 전가시키는 가부장제 사회시스템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경제활동을 하는 기혼여성들은 사회생활과 가사, 양육의 이중 부담에 힘들어 하고 있다. (혜경)
상업광고 없는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언론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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