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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공백의 발견> 40대 중반, 내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서
경력단절이라는 꼬리표는 왜 여성에게만 붙을까? 여성들은 왜 노동시장으로부터 단절을 겪게 된 것일까? 출산과 양육만이 경력단절의 이유일까?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에서 여성들의 공백(경력 단절)의 문제와 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일하는 여성’들과 만나, 여성노동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짚어보는 인터뷰를 일다와 공동 연재합니다. www.ildaro.com
시민단체 회계 담당자로 일하는 K님을 만나다
일하다 보면 필요 이상의 감정이 쓰일 때가 있다. 심지어 ‘뒤돌아 생각하면 별일 아닌데 왜 나는 쿨하지 못하나’ 자책 모드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내 주변의 ‘쿨한 사람 리스트’에 최근 업데이트 된 분은 47세의 K님이다. 시민단체에서 올해 초부터 회계 일을 하고 있는 K님은 활동가들에게 재미있는 만화책을 추천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점심 먹을 때는 어떻게 반찬을 조리하는 게 맛있는지 조곤조곤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아, 어떤 이니셜로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할지 여쭤보았더니, 카프카의 앞 글자를 딴 K를 골랐다.
세대에 관한 세상의 고정관념으로는 K님의 일상과 취향을 파악할 수 없다. 누군가는 젊게 산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자유로운 마인드로 사는 중년여성이다. 딸들과 카톡을 하면서 아이들이 너무 빨리 쳐서 대답을 하기도 전에 대화가 끝난다며 살짝 짜증을 내다가, 그냥 핸드폰을 치우고 만다.
대학생, 고등학생 딸 둘을 둔 K님은 지난 해 1년 동안 구직활동을 한 후 시민단체에 반상근 회계 담당자로 일한 지 이제 반년이 되어간다. 인터넷으로 ‘아니키즘’을 검색해보는 취향을 가진 K님의 노동 역사는 시원시원하게 풀어졌다.
다양한 경험이 있어도 흩어져버리는 ‘경력’
처음으로 월급 받으며 했던 일은 실내 인테리어 회사에서 도면을 그리는 것. 3년 정도 일하다 그만두고 첫 아이를 가졌다.
“아는 사람 소개로 인테리어 회사에 취업했죠. 간단한 설계도면 그리는 일. 학원 다니며 배운 기술로 들어갔는데 나하고 안 맞더라고. 남자들은 현장에 가고, 나 같은 여자들은 외근을 나가더라도 백화점 같은데 물건 납품하러 가요. 현장에 가면 보통 보름 정도 계속 공사판에서 일해야 해. 억센 남자들 많은 곳이라 무서웠지. 결혼하고도 1년 다니다가 한 2개월 놀았어요. 그리고 애기 들어섰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전혀 다른 길로 집을 꾸미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인테리어 일. 그러나 K님에게 인테리어 회사는 일의 재미를 주는 곳은 아니었다. ‘억센 남자들’ 틈에서 그들이 주도하는 조직 문화에 잘 어울리긴 쉽지 않았을 터. 큰 미련 없이 그만두었지만, 이후에 재취업을 준비할 때 인테리어 쪽을 아예 배제한 건 아니다. 좋아는 했지만 잘 하진 못했던 인테리어 관련 공부(CAD)를 해두고 노동시장으로 다시 진입하기 위해 계속 노려왔단다.
“그렇게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자격증을 땄는데도 역시 나랑 안 맞는 거야. 좋아하는 것보다 잘하는 걸 직업으로 삼아야 해요. 왜냐하면 일하면서 업무적으로 성과가 있어야 하니까. 좋아하기만 해서 될 게 아닌 거지. 물론 잘 하는 걸 찾는 건 더 어렵고 시간이 걸릴 순 있어. 그래서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해봐야지. 자기하고 맞는 일을 찾아야 되요.”
K님은 “했던 일들이 전공이랑 어긋나면서 교육을 새로 받아야 되고, 다시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을 경험했다. 결국 새롭게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부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공과 다른 길을 가게 되면 그간의 경력은 흩어지기 쉽다. 다양한 경험이 있더라도 일관성이 없다면 언제나 사회 초년생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경력’이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많은 ‘경력단절’ 여성들이 이전에 했던 일을 준비하기보단 자격증을 따는 쪽으로 주로 눈을 돌리는 이유이다. 이력서에 한 줄 더 쓰려면 ‘국가 공인’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그렇게 새로운 경력을 준비하기 위해 ‘자격증’에 집중하는 이유와 ‘경력단절’이 되는 이유는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두기 아까운 직장, 만약 공무원이었다면?
애초에 경력 ‘단절’이 아니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걸까. ‘어떤 상황이었다면 일을 그만 두지 않았을까’에 대한 K님의 대답은 명료하고 구체적이었다.
“공무원. 공무원이었으면 친정 엄마가 먼저 ‘내가 애를 봐주마’라고 하셨을 테죠. ‘얼마 번다고 계속 다니냐’는 말은 안 하지만 사람이 눈빛으로 말하는 것도 있잖아요. 공무원이거나 학교 선생님이면 누구든지 아깝다면서 뭔가 계속 일할 방법을 만들어냈겠죠. (아니면 대기업처럼 임금을 엄청 많이 받는다던가요?) 그렇지. 그러면 안 그만두죠.”
6~7명 규모의 작은 인테리어 회사. 공사판이 중요한 노동 현장이라, 이곳에서 일을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맡게 되는 역할이나 그 평가가 달랐을 것이다. 현장에 나가지 않고 내근을 주로 한 K님의 위치는 몇 년을 일해도 큰 변화가 없었다.
▲ 경력 단절된 여성이 노동시장에 재진입하려 했을 때, 이전의 경력을 인정받기 어렵고 연령 제한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 일다- 박희정의 만평
‘경력 단절’ 이전의 노동이 쌓을만한 경력이라기보다는 ‘단순 업무’라고 불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경력이라 부를 만큼 시간을 축적하지 못한 채 끊어지면서, 여성들은 노동시장 외곽선에 머물게 되는 것이 아닐까.
공무원이었다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K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단순한 원인으로 경력 단절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의 특성과 노동의 조건 그리고 주변의 가치 판단 등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단절을 막을 수도 있다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을 눈치 안보고 쓸 수 있는 회사라면, 업무 강도가 요즘의 일반 회사보다 덜한 회사라면, 혹은 ‘보상’으로 월급이라도 많이 받는 회사라면…. 즉, ‘괜찮은’ 일이라면 주위의 상황도 집에 있으라고 팔을 이끄는 게 아니라, 그만두지 말고 일을 계속하라고 노동시장 안쪽으로 등 떠밀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나가려면 또 다른 여자인 엄마가 희생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이를 봐줘야 하니까. 친정 엄마가 희생해야 하는 게 더 싫더라고. 차라리 내가 그냥 있는 게 낫지. 예의가 아닌 거 같고. 그래서 육아를 내 몫이려니 받아들였죠. 여자들한테 죄를 씌우는 사회가 잘못이지.”
그래서 직접 아이를 돌보며 다시 임금노동시장으로 재진입 할 준비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K님은 두 딸을 키우면서 취업 준비를 포함하여 일을 병행하는 것이 괜찮았을까?
“아이들 키우면 사건사고가 없진 않죠. 학교폭력 같은 경우에 엄마가 집에 있으면 안 생길 수도 있지. 애가 맞아서 경찰서에서까지 연락이 온 적이 있긴 했는데, 일을 그만두고 내가 아이들한테 막 몰입한다거나 아무튼 크게 달라지진 않았어요. 다행히 애가 기절한 척해서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교육관은 또 너무 신경 쓰는 것보다 뒤에서 관찰하는 정도로 생각하니까. 그래도 누군가가 집에 있을 필요는 있죠.”
둘째가 유치원을 다닐 때쯤에야 집 밖에 나올 수 있었다는 K님.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일을 할 거라고 이야기해왔기 때문에 엄마의 부재,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진 않았다고 한다.
여성들이 직장을 그만둔 이유 1. 2. 3순위
K님의 입을 통해 들은 깜짝 놀란 사례가 있다. 요즘 게임중독 된 아이들이 많아서 컴퓨터 마우스를 뽑고 출근하는 워킹맘들도 많단다. 아이들 챙기랴 회사 사이클에 맞춰 일하랴, 신경 쓸 것도 해야 할 일도 많고, 여성노동자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은 정말 힘든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힘든 상황을 조금은 가볍게 바꿀 수 있을까.
지난 4월 22일~5월 3일까지 서울시 여성능력개발원에서 직업훈련기관을 이용한 여성 2천명을 대상으로 ‘직업의식’에 대해 조사한 내용 중에 흥미로운 결과가 있다. 여성이 직장을 그만둔 주요 이유는 ①일보다 자녀양육과 가사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18.9%) ②결혼, 임신, 출산으로 퇴사하는 사회분위기와 퇴사 압력 때문에(16.0%) ③자녀를 양육할 시설, 보육 전담자가 부족해서(11.1%) 순이었다.
K님이 체크했을 법한 ①번의 경우를 보자. 정말 자녀 양육과 가사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기보다는 여성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일과 역할이 낮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의 일에 그만큼의 가치를 둘 수 없는 게 당연하다.
②번의 경우라면 결혼, 임신, 출산으로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법적 조치를 확실히 하고 조직 문화를 변화시켜야 해결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③번은 믿을만하고 저렴한 공공보육시설을 많이 만들면 된다. 일과 가정의 양립은 어느 한 개인의 노력이나 여성들의 ‘희생’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닌,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풀어야 할 문제이다.
잘하는 일 찾았지만 ‘나이’ 장벽에 주춤하다
지속 가능한 노동을 위해선 좋아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K님. 그래서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일, 맞는 일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 한다. 배달 된 신문에 끼여 있던 광고 전단지를 통해 여성인력개발센터를 알게 되었다.
“30대에 처음 발을 디뎠어요. 그 다음에 이래저래 알아보니까 거기가 제일 나은 거 같아. 인력개발센터가 1대1로 밀착으로 해줘요.”
10여 년간 양육 시기를 거친 후,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가서야 좀 여유를 만들 수 있었다. 이왕 다시 하는 일은 돈을 버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 기여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생활협동조합에서 K님의 노동역사가 다시 펼쳐졌다. 이곳에서의 일은 물건 정리, 주문 받기, 회계사무 등이었다. 일의 내용에 따라 임금을 받는 노동일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다.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배운 기본적인 컴퓨터 활용법이나 전산회계사무 공부는 나름 유용했고 K님과 잘 맞았다.
K님은 생활협동조합에서 11년 동안 일했다. 그리고 “일을 계속하다 보니까 내 성격에 제일 맞는 게 회계”라는 걸 깨달았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비로소 찾은 것이다. 그러나 생활협동조합을 나와서 새로 직장을 구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지금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로 자리잡기까지 1년간 구직 활동을 했다. 네 번의 계절을 보내는 그 과정은 어땠을까?
“이번에 느꼈던 건, 내 나이가 너무 많다는 거야. 만으로 마흔다섯임에도 불구하고 취업할 데가 없어요. 일자리를 계속 알아보던 중에 지인 소개로 왔지. 그 사이에 별 걸 다 해봤던 것 같아. 일단 ‘워크넷’. 거기 가입해서 내 이력을 등록해요. 그러면 회사에서 연락이 오기도 해요. 그리고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내 이력서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 회사에 보내주더라고. 연결되면 면접 날짜 언제니까 한 번 가보세요, 이러지. 갈 자신이 없다고 하면 면접에 같이 가주기도 해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 회사는 몇 군데 지원했는지, 나이 때문에 취업이 얼마나 어려웠던 건지 들어보았다.
“열 몇 군데 정도. 이력서는 주로 장애인단체나 협회 같은 곳에 넣었어요. 그런데 거의 다 전화가 없더라고. 하도 안 되길래 솔직하게 물어보니까, 인력개발센터 쪽에서 나이 때문에 걸린다 하더라고.”
그럼 몇 살까지는 괜찮다고 하였는지 물어보았더니 “마흔 살”까지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사람이 취업을 해서 직장을 다니면 한 마흔다섯까지가 최대 아닐까 싶어요. 나이 들면 잘 습득이 안 되는 건 사실이니까. 요즘은 너무너무 빨리 바뀌고 회계 프로그램도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나이 많은 사람을 선호하는 업체가 있다는 말은 있지만, 그렇다고 40대 후반인 내 나이는 원하지 않는 거야. 아무리 많아도 마흔둘 정도면 모를까. 그 사람이 취업을 해서 3,4년은 있을 텐데 그럼 50살까지 같이 일해야 한다면. 오너 입장도 이해는 돼. 결론은 이 세상의 속도와 일하고자 하는 나이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모집, 채용 등 모든 고용 영역에서 나이를 이유로 한 차별을 방지하고 피해노동자를 구제하기 위해 연령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시행된 지 4년째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의 나이 차별은 여전한 것이다. 나이든 사람에 대한 편견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박혀있고, 이에 따라 작동되는 차별은 법의 변화에도 여전히 공고하다.
그리고 K님의 이야기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자 스스로도 나이로 인한 고용 차별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청년실업도 큰 문제지만 중장년의 취업난도 문제이다. 더구나 나이든 여성노동자에게 열려있는 곳은 더 좁은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노동은 삶의 바탕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한다고 봐요. 그게 삶의 바탕이라고 생각해. 젊었을 때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쉬고 싶을 때 돈은 내가 벌 테니 쉬라’고 하고 싶었는데 못했어, 영원히. 하하. 영원히 돈이 적을 테니까. 아무튼 지금은 어찌됐든 여자도 돈을 안 벌면 안 되요. 일단 아이를 키우게 되면 돈을 안 벌 수 없어.”
일을 통해서 비전을 찾기 어려운 지금과 같은 시대. 더구나 이렇게 내리막길로 달리는 경제 상황에서 노동자의 팍팍한 일상은 로또 한 장에 대한 꿈으로 일주일을 지탱한다. 어떤 때에는 꿈꿀 시간이 있다는 것마저도 사치스럽다. 그럼에도, K님에게 일은 ‘삶의 바탕’으로서 나이 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지금의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면 K님은 어떻게 했을까. “일을 계속 찾았겠죠? 구직하면서 사실 좀 지쳐가고 있었어요. 1년 동안 진짜 우울했어. 내가 너무 많은 나이구나 싶어서 다른 자격증을 따려고 했을 거야.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주먹밥 장사라도 할까 이런 생각을 했겠죠.”
꿈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꿈이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충분히 괜찮다. (기록_강선미)
※ 이 기사는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womenlink19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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