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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꺼!’에서 시작되는 데이트 폭력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2. 감시와 통제 

 

※ 일다의 신간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발간 기념으로, 데이트 폭력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남친의 질투가 폭력이 되기까지
  

“그의 질투가 하도 심해 캠퍼스에서도 더 이상 생활할 수 없게 되었지. 그는 내가 다른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만 봐도 못 견뎌 했어.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자기 말고 다른 남자를 쳐다볼까 봐 항상 경계를 했지. 그건 그를 미치도록 화나게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이젠 슬슬 이런 생각도 들어. 내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었는지. 바보같이 보인다는 거 알아. 하지만 모든 게 해결되고 더 나아질 거라 생각했어. 함께 지내다 보면 그도 결국 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어. 그가 행복하다면 나 또한 그렇게 될 거라고!”

 

▲  만화 <7층>(오사 게렌발 저, 강희진 역, 우리나비) 

스웨덴의 인기 만화가 오사 게렌발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된 만화 <7층>(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우리나비, 2014). 사랑의 증거라고 믿었던 남자친구의 질투가 어떻게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지, 여성이 왜 데이트 폭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사는 새로 들어간 예술학교에서 매력적이고 평판 좋은 남자를 만난다. 그는 오사에게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다. “제로에서부터 전부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제부터 너와 나만 생각해. 우리 두 사람 일 이외에는 다 잊어.” 남자친구가 말하는 ‘새 출발’이 과거의 연애를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화장법부터 옷 입는 법, 취향, 친구 관계까지 모두 단절하는 것일 줄 오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친구는 키스할 때 오사가 눈을 감으면 ‘다른 남자 생각하느냐’고 화를 내고, TV 보면서 오사가 한숨을 쉬면 ‘저 남자랑 사귀고 싶어서 그러냐’고 따져 묻는다. 마음속에 의혹이 조금씩 일기 시작하지만 오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도가 지나칠 때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의 과도한 질투는 어디까지나 나에 대한 깊은 사랑의 증거였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 벽에 붙여놓은 그림들을 보며 남자친구는 화를 내며 폭언을 퍼붓는다. 오사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맞춰준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정체성을 갖다 버린다. 일기장도, 화장품도, 좋아하던 검은색 옷들도…. 그런 오사에게 남자친구는 네가 갖다 버린 것이기 때문에 네가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생기를 잃어버리고 고립된 오사는 말한다.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숨 쉬는 법을 터득했다”고. 남자친구의 질투 때문에 늘 둘이 붙어 다닐 수밖에 없는 오사의 사정을 모르는 주변인들은 오사 커플을 완벽한 커플로 칭송한다.

 

구타가 시작된 후에도 남자친구와 관계를 정리하지 못했던 오사는 남자친구에게 손가락 살점을 물어 뜯기고 나서야 자신이 당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빠에게 도움을 청해 그와 헤어지게 된다.

 

사랑의 표현으로 둔갑하기 쉬운 집착과 감시

 

▲   오사 게렌발의 실화 만화 <7층> 중에서. 
 

흔히 ‘데이트 폭력’하면 상대를 때리는 신체적 폭력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데이트 폭력은 신체적 폭력은 물론, 상대를 감시・통제하거나 협박하는 정서적 폭력, 데이트 상대에게 폭언을 일삼고 일상적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언어적 폭력, 갈취 등의 경제적 폭력, 그리고 원치 않는 성행위나 음담패설 등을 강요하는 성적 폭력까지 포함한다.

 

전문가들은 데이트 폭력에서 한 가지 유형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폭력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7층>의 주인공 오사 또한 사소해 보이는 질투나 집착으로 시작돼 일상적인 감시와 통제가 이어지다 결국 구타로까지 확대되는 데이트 폭력을 겪은 것이다.

 

그런데 데이트 폭력 중 특히 정서적인 폭력은 폭력으로 인지하기 쉽지 않다. 너무 일상적인데다가 집착이나 질투, 감시가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상적인 만큼 많은 여성들이 경험하고 있다.

 

2014년 한국여성의전화에 접수된 데이트 폭력 상담 총 215건 중 정서적 폭력은 81.9%(복수응답)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신체적 폭력이 52.1%, 성적 폭력이 38.6%로 그 뒤를 이었다.

 

또한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에서 2009년 9~10월 서울지역 11개 대학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데이트 경험이 있는 370명의 여학생 중 77.8%가 ‘정서적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구체적으로는 상대방이 자신의 “핸드폰, 이메일, 개인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자주 점검한다”(59.7%), “누구와 함께 있는지 항상 확인한다”(40.9%), “다른 이성을 만나는지 의심한다”(32.1%)로 나타났다. 옷차림을 제한하거나 학과, 동아리 활동을 못하게 통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주대학교 성폭력상담센터 허은영 연구원은 “성폭력상담센터에 접수되는 데이트 폭력 사례 중 스토킹을 제외하면 ‘데이트 관계에서의 감시와 통제’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남성은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네 주변 사람들을 못 믿는 거야”라고 말하며, 여자친구가 남성들하고 어울리는 모임에 나가는 것을 통제한다든지, 귀가 시간을 단속한다든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사진을 찍어서 보내게 하기도 한다. 같이 노트북이나 컴퓨터를 쓰고 여자친구가 로그아웃하지 않으면, 위치 서비스 프로그램을 이용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여자친구에게 어디 있는지 떠 보고, 거짓말을 하면 그걸 빌미로 더 심한 통제를 하기도 한다.

 

귀가길 단속하고 짧은 치마 못 입게 하는 애인

 

▲  커플이 등록하면 서로의 현재 위치와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커플각서> 
 

정서적 폭력이 이렇게 빈번하고 일상적인 이유는 상대를 구속하고 통제하는 행동이 애인 간의 애정 표현이나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2010년 만들어진 ‘오빠믿지’라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은 커플이 함께 등록하면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서비스다. ‘오빠믿지’의 소개에는 “순순히 위치를 넘기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당시 사생활 침해로 논란이 일었고 개발자가 ‘위치정보서비스 사업자’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비스를 했다는 이유로 입건되면서 ‘오빠믿지’는 사라졌다.

 

그러나 곧이어 ‘커플각서’라는 어플리케이션이 등장했다. ‘커플각서’는 위치 서비스뿐만 아니라, 특정 단어(예를 들어 사랑, 오빠, 만나 등)를 지정하면 그 단어가 들어간 문자를 검색해 보여준다. 또 특정인과 몇 분 이상 통화를 하면 그 번호를 알려주고, 특정 장소를 지정하면 그곳을 진입하거나 벗어날 때 알림 벨이 울린다.

 

이런 어플리케이션이 등장할 만큼 연애 관계는 상대를 “내꺼”라고 소유하는 관계라는 인식이 자연스럽다. 특히 남성의 여자친구 단속은 ‘여성을 보호한다’라는 미명 아래 정당화되고, 남자다운 것, 낭만적인 것으로 포장된다. 스물여섯 살 다정(가명, 여성)씨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친구가 자기 남자친구가 귀가 단속하고 옷차림 단속하는 거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야, 내 남자친구는 나 짧은 치마 못 입게 해. 자기만 봐야 된다면서’라고. 사실 그 친구는 ‘나 너무 힘들어, 내 옷은 내 식대로 입고 싶어, 너무 간섭이 심해’라고 말한 건데, 주변 친구들은 ‘야, 네 남자친구 (진짜) 남자네, 내 남자친구도 나한테 집착 좀 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반응하더라고요. 연애에서 겪는 불편함을 표현했을 때 여성들 안에서도 불편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사귀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등의 자해 협박도 폭력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힘든 행동 중 하나다. 여성은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폭력으로 인지하기 어렵고, 주변에서는 남성의 그런 행동을 ‘사랑의 순정’, ‘절절한 구애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협박이 먹혀 들어 연애가 시작되면 남성은 이미 여성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쥐게 된 셈이다.

 

폭력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다

 

여성들도 남자친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통제하려 하고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것 역시 정서적 폭력에 해당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남성의 감시나 협박은 신체적 폭력 등 다른 형태의 폭력과 결합되는 일이 많다. 또 같은 정서적 폭력을 행해도 남성이 느끼는 공포감과 여성이 느끼는 공포감의 정도는 확연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너 죽고 나 죽는다’고 말했을 때와 남성이 여성에게 ‘너 죽고 나 죽는다’고 말할 때 상대가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요. 남성은 여성이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하는데, 여성은 남성의 그 말에 진짜 그럴 수 있다(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맥락이 있어요. 그 전에 이미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거나….” (아주대학교 성폭력상담센터 허은영 연구원)

 

▲  감시나 통제는 더 큰 폭력을 예고하는 전 단계일 수 있다.   © JOHN GOMEZ 
 

감시나 통제는 그 자체로 인간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폭력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폭력을 예고하는 전 단계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남자친구로부터 일상적인 감시나 협박을 당해도 ‘날 사랑해서 그런 거니까 그냥 그 방식에 내가 맞춰주자’, ‘그냥 내가 참고 넘어가면 되지, 내가 너무 까칠한 걸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정서적 폭력에 무감해지는 경우, 다른 유형의 폭력이나 더 심한 감시와 통제 행동으로 발전해도 <7층>의 오사처럼 쉽사리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유리화영 소장은 “여성들은 주로 심각한 폭력이 터졌을 때 상담소를 찾아오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남자친구의 감시와 통제가 (이전부터) 기본적으로 깔려있다”고 말한다. “여성 본인도 데이트 앱을 같이 사용하는데, 관계가 좋을 때는 마치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다가 큰 폭력이 터지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그 순간부터 ‘아, 이게 큰 족쇄가 될 수 있구나’하고 생각한다.”

 

사실 데이트 관계에서 물리적 폭력과 정서적 폭력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식은 다르지 않다. 바로 ‘연애 상대는 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물리적 폭력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남자친구의 질투가 도를 넘어설 때, 사랑한다면서 자기만을 바라볼 것을 강요할 때, 그것은 데이트 폭력의 예고 신호일 수 있다.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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