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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겪은 것들을 말하기 두렵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한 시간(1)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너무 많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즈음부터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경험하고 알게 된 일들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겪은 것을 말하기기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믿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 광장에 나와서야 TV에선 알려주지 않는 진실을 알게 된다. © 안미선
올해 2월 1일 서울 마포 지역 시민단체들과 함께 안산 단원고를 방문하고 유가족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호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팽목항에서 겪은 많은 일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말씀을 하시느라 어려워하셨어요. 그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셔도 되는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짧은 기간이나마 비상식적인 일들을 겪고 나니까, 어떻게 이야기해야 거짓말로 오해 받지 않으면서 사실을 전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고 유가족들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겠더라구요.
사람이 예기치 못하게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면, 스스로조차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져서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확신하기 어려워집니다. 지난 일들을 순간순간 기록해두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와 자료를 찾아보면서, 어렵사리 내가 겪은 일들을 정리해볼 수 있었습니다.
메르스에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도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겠지만, 세월호 사태는 희생자들의 유가족만의 일이 아니라 안전에 대한 시스템 부재의 문제이고, 원인을 밝히고 대책을 찾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재판을 받는다고 해서 이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잊고 싶어하거나, 유가족들이 어떤 수모를 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힘겨운 글쓰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진상 규명을 위한, 유가족들의 외로운 싸움
작년 9월, 저는 동네 전철역에서 매일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이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저도 서명운동에 참여하다가, 올해부터는 매주 정한 요일에 피켓을 들고 서있거나 함께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 리본 공작소. 수요일마다 광화문에서 리본 공작소 옆에서 노란별을 떠서 이웃에게 선물합니다. ©화사
지난 3월 중순의 일입니다. 동네에서 받은 ‘진상규명’ 서명지를 모아 유가족들에게 전해드리려고 오전에 광화문 광장으로 갔습니다. 영석 아버지와 민우 아버지가 작년 7월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천막을 지키고 계시는데, 제가 갔을 때 두 분은 물 말은 햇반에 반찬으로 고작 고추장을 찍어 식사를 하고 계셨어요.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3월 30일에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경찰들에 둘러싸여 피 흘리고 있는 영석 아버지의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라고 걱정되어 늦은 밤 무작정 광화문으로 갔습니다. 하나뿐인 자식을 잃고 그 이유를 알고자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잠자리도 불편한 광장에 나와 계신 영석 아버지가 왜 경찰에게 맞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거리에 나와서야 텔레비전이나 주요 신문에서 절대 알려주지 않는 현장의 진실들을 목격하게 되었지요.
작년 4월 16일, 눈앞에서 자녀들이 무참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유가족들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국민들의 관심을 호소했고, 그 결과 약 6백만 명의 서명을 받아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 규명을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해양수산부는 특별법의 취지를 무력화시키는 ‘시행령’(안)을 발표했습니다. 유가족이 그것에 대한 항의 서한을 전달하려고, 국민이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청와대 민원실로 가는 것을 경찰들이 막아서더니 폭력 진압을 한 것입니다.
이 날을 기점으로 경찰은 유가족을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고 초기에 유가족이 팽목항에서 무작정 도로를 따라 걸었던 날도, 작년 가을에 청운동 주민센터에서 노숙농성을 할 때도, 경찰은 아무런 설명도 못한 채 ‘위에서 시키는 대로’ 유가족을 꼼짝 못하게 막았지만, 폭행은 없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이 날 이후 경찰은 유가족을 참사의 피해자로서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폭도’로 몰고 타도의 대상으로 대했습니다.
‘보상금을 노린다’는 언론의 왜곡 보도
▲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416시간 광화문 집중 항의 행동’ 영석 아버지와 민우 아버지의 농성장. © 화사
어렵게 만든 세월호 특별법이 무력화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당사자들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서서 진실을 밝혀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스스로 움직였습니다.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416시간 광화문 집중 항의행동’으로 노숙 농성을 하며, 4월 2일에는 52명의 유가족들이 삭발을 했지만, 주류 언론들은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4월 4일과 5일에는 유가족 250명이 상복을 입고, 가슴에 아이들의 영정을 안고, 안산 분향소를 출발해서 광화문까지 오는 1박 2일 도보 행진을 했습니다. 유가족의 고통과 억울함에 공감하는 시민들 수백 명이 함께 46km를 행진하는데도, 공중파 방송은 유가족이 왜 도보 행진을 하는지 관심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가족들이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시위를 하는 것처럼 왜곡 보도를 했습니다. 서민들이 평생 만질 수 없는 큰돈을 한꺼번에 받는 것처럼, 그것도 국민의 세금으로 주는 것처럼 보도해서 유가족에 대한 위화감과 질투를 유발했습니다. ‘배상금을 받으면 정부에 이의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국가 대상 포기각서를 요구하는, 정부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태에 대해서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노숙에, 삭발에, 도보 행진에 심신이 지친 유가족들은 4월 6일, 시행령 폐기 서한을 들고 해수부가 있는 세종시까지 갔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진상 규명을 가로 막는 시행령이 통과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유가족의 몇 배나 되는 경찰들이 몰려와 막아섰습니다. 경찰은 어머니들이 화장실에 가려는 것조차 막았고, 이에 항의하는 어머니들을 밀쳐냈습니다. 갈비뼈와 팔이 부러지고, 머리를 다친 분도 있습니다.
유가족을 전원 연행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져 실제로 연행을 했지만, 이 또한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SNS를 통해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가족을 연행한 것에 대한 항의와 시행령 폐기 여론이 거세져서야 비로소 유가족을 풀어주었고, 해수부 장관도 유가족과 면담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유가족의 뜻을 무시하듯 ‘세월호 배·보상단 회의실’로 끌어들여 유가족들을 모독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호소해야 했던가
4월 11일 토요일은 416참사 1주기 바로 전 주이기도 했고, 유가족에 대한 경찰의 폭력이 알려지면서 집회 참여자가 많았습니다. 이날 경찰은 방패와 차벽으로 막았습니다. 시민들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맨 앞에서 자리를 지키던 유가족에게 최루액을 쏘고 연행했습니다. 마이크로 진압을 지시하던 한 나이 많은 경찰은 부모님 뻘 되는 유가족 앞에서 방패를 들고 힘겨워하는 젊은 경찰들에게 “위축되지 마세요! 채증 꼼꼼히 하구요. 네, 잘 하고 있습니다” 하고 유치원생 다루듯 하며 구체적으로 불법 행위를 지시하더군요.
이날 가장 슬펐던 것은, 노란 점퍼를 입고 있어서 유가족임을 뻔히 알면서도 조준해 최루액을 쏘거나 사지를 들어 연행하는 경찰의 모습보다, 준비된 원고 없이도 너무나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해야 했던 것일까요.
그분들의 뜻은 항상 같았습니다. 진.실.규.명. 내 아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겠다는 것과, 앞으로는 이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더 생기지 않도록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 배를 인양해서 미수습자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자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언론에 의해 유가족들의 뜻이 왜곡되고 그로 인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얼마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외쳐야 했을지,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연설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평범한 직장인이고, 엄마고 아빠였던 분들이 정치인들보다도 더 말씀을 잘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만 생각하며 사느라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다가 아이를 잃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어 아이에게 미안하고 너무 부끄럽다’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지금의 여당과 대통령을 뽑았다”며, “내가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추위와 빗속에서, 416시간의 노숙 농성
▲ 4월 초, 416시간 집중 농성 중 비오는 밤 © 최창덕
416시간 노숙 농성을 하는 동안, 유가족들은 낮에는 뜨거운 햇볕과 밤에는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건 아마 ‘고립감’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걱정스런 마음에 시간이 되는 대로 농성장에 찾아가곤 했는데, 이상한(?) 사람들도 꼬박꼬박 유가족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100원짜리 동전을 영석 아버지 얼굴에 던지고 가는 노인도 있었고, 아직도 보상을 못 받았냐며 걱정해주듯 접근해서는 유병언의 재산과 청해진 해운 보험으로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며 속을 긁는 소리를 잔뜩 하고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광화문 광장 한복판까지 찾아와서 욕지거리를 하고 가는 사람, 차에 유가족을 비난하는 플랜카드를 붙이고 확성기로 유가족을 ‘종북’이라고 몰아세우는 방송을 하며 광화문 광장을 빙빙 도는 사람, 유가족을 조롱하는 랩까지 만들어 나오는 몰인정한 사람들이 출몰했습니다.
4월 초에는 비가 자주 내려서 유가족들은 비닐을 덮은 채 주무시며 자리를 지켰습니다. 식욕이 없어도, 주변에서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해 빗속에서 억지로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영하로 기온이 뚝 떨어진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계신 유가족들에게 돗자리나 담요조차 전해드릴 수 없도록 경찰들이 막기도 했습니다. 밥을 전해드리려 해도 공권력의 검사를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지요. 어두운 농성장을 촛불로 밝히려 해도 ‘시위용품’이라며 반입이 안 된다고 하여 가방에 숨긴 채 광장을 빙 돌아서 가져온 적도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전해드리려는데 우산이 ‘노란색’이라 안 된다며 경찰이 잡아서, 한참 실랑이를 벌인 웃지 못할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4월 16일,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덧> 7월 14일은 광화문 광장에 세월호 천막이 생긴지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작년 여름, 광화문에서 유민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단식을 했을 때, 많은 국민들과 정치인들이 광화문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지쳐서 광화문을 떠날 때에도,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모든 삶을 포기하고 광화문을 매일같이 지키고 계신 영석 아버지와 민우 아버지께 정말 고생 많으셨다고, 감사하다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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