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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은 꿈도 꾸지 못할 우리 일터의 악몽

[나의 알바노동기] 노동법과 페미니즘이 필요해 (김승연)


※ <일다>는 청년여성들의 가감없는 아르바이트 현장 경험을 기록합니다. “나의 알바노동기”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14살 첫 알바는 성추행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남성 노동자들은 꿈도 꾸지 못할 우리 일터의 악몽, 아니 차라리 꿈이라면 좋았을 ‘현실’을 고발하려 한다.

 

처음 알바를 시작한 건 14살 여름이었다. 친구들이 기말고사가 끝나면 놀이공원으로 놀러가자고 했다.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입장료가 비쌌다. 우연히 친구 중 한 명이 전단지 알바로 돈을 번다는 얘길 듣고, 처음으로 알바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나이 무관, 여성, 2시간에 1만원”이라는 한 스파게티집의 전단지 알바 구인 공고를 찾아냈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떤 젊은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몇 살이냐 물어서 조심스럽게 14살이라고 얘기했더니 내일 나오라고 했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나고 들뜬 마음으로 그 가게에 갔다. 조금 긴장되었지만 즐거웠다.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그 돈으로 친구들과 놀러갈 수 있다는 게 신나고 뿌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화를 받았던 젊은 남자가 카운터에 서 있었다. 알바를 하러 왔다고 하니 그가 물었다.

 

“왜 교복을 안 입었니?”

“더워서요.”

“스타킹도 안 신었겠네?”

“네. 왜요? 신어야 돼요?”

 

그 남자는 스타킹을 꺼내며 내게 이걸 신고 일하라고 했다. 젊은 여자가 신었던 스타킹을 가지고 가서 자격증 시험을 보면 붙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스타킹을 갈아입을 장소로 나를 데려갔다. 아주 작은 창고였다. 문을 잠갔지만 두려웠다. 갈아입는 중간에 그가 들어 올까봐, 아니면 이 방 어딘가에 카메라가 숨겨져 있을까봐 몸을 잔뜩 움츠리고 갈아입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믿어야만 했다. 믿지 못한다고 해서 저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받아야 하는 ‘을’이었고, 상대는 나보다 나이 많은 남성이었다. 만약 그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잘릴 것이다.

 

이것이 ‘성추행’이라고 판단할 수도 없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준 성추행이라고는 늦은 밤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끌고 간다거나, ‘너 가슴 만질래’ 같은 직접적인 언어와 행동뿐이었다. 그에 대한 대처방안은 ‘내가 조심하기’ 혹은 “안돼요! 싫어요!”라고 크게 외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스타킹을 신어달라고 부탁하는 것(그것도 대낮에!)’을 성추행이라고 판단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앞에서 “안돼요! 싫어요!”라고 외치는 것은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내게 성추행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 느낀 불쾌감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학교에서 배운 성범죄자와 매우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번듯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젊고, 인상 좋은 청년이 ‘가해자’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지폐 한 장을 덜렁 받았고, 다시 그 창고에 들어가 스타킹을 벗어주고 나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과 수치심이 나를 괴롭혔지만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며칠 뒤, 도서관에 가는 대신 알바를 하러 갔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들켰다. “어디에 갔었냐”는 질문에 “돈 벌려고 알바 했어요…”라고 답하자마자 아빠는 내 팔목을 꽉 움켜쥐고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알바를 하러 가, 네가? 당장 나가!” 화가 끝까지 난 아빠는 나를 현관까지 몰아 붙였다. 너무 세게 밀쳐서 내가 넘어지자 그대로 발로 찼다. 그날 밤 나는 순식간에 신발 두 짝과 함께 집 밖으로 내쫓겼다.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었다. 그 밤길 위에서 나는 차라리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화난 아빠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바에서 ‘이상한 짓’을 당한 것도, 아빠에게 맞은 것도 다 내 탓이었다. 그게 성추행인지도 몰랐던 내 탓이었고, 저항할 힘도 지식도 없는 게 거짓말까지 쳐가며 감히 돈을 벌고 싶었던 내 탓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 일은 나의 매우 개인적인, 수치스러운 경험이었고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상처였다.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역시 청소년들은 일을 못하도록 보호해야 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성인이 되면 무언가 달라질 줄 알았지만 상황은 똑같았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지만 일을 해야만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던 6년이라는 시간동안 누구도 내게 ‘노동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좋은 직장에 취직하라고만 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밤길 조심하라고, 위험한 순간엔 소리를 지르라고만 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서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나의 권리들을 알아야만 했다.

 

새벽 귀가길, 거리에 ‘여자’는 나뿐이다

 

두 번째 알바는 스물이 갓 되기 전에 시작했다. 수능이 끝난 친구들이 너도 나도 알바를 시작했고,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작은 맥주 집이었는데 첫 출근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장님, 월급은 언제 들어오는 건가요? 통장으로 들어오나요?”

“왜, 걱정돼? 알아서 잘 줄게. 걱정 말고 일해.”

 

근로계약서의 존재도, 임금 지급의 원칙도 몰랐던 나는 사장님의 말을 ‘믿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졌다. 궁금한 것도 걱정되는 것도 많았지만, 나보다 나이도 많고 힘도 센 남성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을 보는 게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두 번째 알바 장소였던 맥주집.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매일 오랜 시간 딱 저만큼의 좁은 장소에서 일했다.

 

사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내가 실수를 할 때 인상을 찡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점 ‘아이 씨’, ‘저리 비켜’라는 말을 했다.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지는 않았지만, 짜증 섞인 말투와 표정과 행동으로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이유로도 짜증과 화를 내기 시작했다. 밤길이 무서워 자정에 퇴근하는 걸로 계약했지만, ‘이렇게 손님이 많은데 1시까지 일하고 가라’고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사장이 말하면, 나는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밤길도 두려웠지만 일터에서 마주해야하는 사장이 더 두려웠다. 그는 나의 월급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분노 앞에 나는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사장은 어리고 여성인, 그리고 노동자인 나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매일 매일 안전하지 못한 일터와 귀갓길을 견뎌야 했다. 단 하루 한 시간도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됐다. 그와 동시에 예민하게 굴어서도 안 됐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려니, 누구나 겪는 일이려니 생각해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성폭력에 ‘잠재적 피해자’는 있어도 ‘잠재적 가해자’는 큰일 날 소리다. 일찍 집에 들어와야 하는 사람은 오빠가 아니라 여동생이어야 하고, 술에 취하면 안 되는 사람은 남자선배가 아니라 여자후배여야 한다.

 

새벽 1시에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거리의 풍경이 뭔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가는 길에 슈퍼 가는 청년(남), 술 취한 아저씨들은 있어도 여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 남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렇게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배고프면 그게 몇 시든 간에 슈퍼에 가고, 취하고 싶은 날 마음껏 술 마시고, 그래도 무서울 게 없는 삶을 나는 딱 하루만이라도 살아보고 싶다. 내가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적은 아빠가 나를 발로 차 내쫓은 날, 현실감각이 모두 사라져 버려서 누가 날 죽여도 슬프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날뿐이었다. 그 남자들은 나와 정말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그들이 부럽다고 느꼈다.

 

월급날이 다가오자 사장은 일도 다른 알바에게 맡겨둔 채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했다. 한 달이 지나도 월급이 안 들어와서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겨우 연결이 되어서 월급 얘기를 하니 역시 짜증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야, 원래 한 일주일은 기다리는 거야. 왜 자꾸 전화를 걸고 그래.”

 

원래 그렇다며 화를 내기에, 나는 순간 알겠다고 대답하고 끊었다. 그러나 무언가 부당하다는 생각에 몇 번 전화를 걸었고,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결국 3일 만에 돈을 받았다. 그 마저도 새벽까지 일했던 노동에 대한 대가는 받지 못했다.

 

이 날들은 좋지 않은 기억이라 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만두니 후련하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 해 여름, 곪아있던 설움이 터져버렸다. 어느 날 심리치유극(사이코드라마: 상담자와 함께 내담자가 역동을 느꼈던 당시의 상황, 감정 등을 재현하며 재구성하는 심리 치료 기법)에 참여할 기회가 생겨서, 나는 떼인 돈을 받았던 상황을 재현하고 싶다고 했다. 한 남성분이 ‘사장’ 역할을 맡았는데 짜증내는 목소리와 눈빛, 태도가 그 날의 공포를 떠오르게 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혔던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치유극이 끝나고 퍽 당황스러웠다. ‘내가 어른에 대한 공포증이 있나보다’ 하며 넘겨짚었다.

 

일터의 여성들, 서로의 연결지점 찾기

 

그 즈음에 알바노조를 알게 되었다. 노조에 가입해 노동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없었던 언어가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이 권리들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노동자들이 뭉쳐서 투쟁해 온 역사들을 하나씩 배웠다. 그 다음 알바에서 나는 사장님께 “주휴수당 주세요” 라고 말해서 주휴수당을 받아낼 수 있었다. 여전히 겁은 났지만, 길고 길었던 무력감 속에서 나를 끄집어 낸 것 같은 엄청난 해방감이 들었다. 심리적 요인이라고 생각했던 ‘어른에 대한 공포’는 놀랍게도 노동조합과 노동법으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일터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었다. 내가 노동법을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사장님의 외모품평, 성추행에 대해서는 여전히 저항할 수 없었다. 내게는 페미니즘도 있어야 했다.

 

▶ 작년 5월 27일, 알바노조 조합원들과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에 맞서는 ‘두려움을 넘어 밤길 함께걷기’에 참여했다.

 

알바노조에는 여성조합원이 많았다. 분회장, 지부장과 같은 직책도 여성들이 많이 맡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만난 여성들을 통해 페미니즘 공동체를 조금씩 경험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하자, 노동법을 배웠을 때보다 더 많은 언어들이 내게 주어졌다. 나의 경험들이 사실은 말해지지 못했던 우리 공통의 경험이었으며,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괜히’ 움츠러들었던 시간들에 ‘이유’가 생겨났다. ‘내 탓이 아니야’라는 말을 드디어 나 자신에게 쥐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할 땐 멋지다고 지지해주던 사람들도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하면 ‘그래? 요즘엔 여성상위 시대 아니야?’라며 의아해 하거나, 침묵으로 자신의 불편함을 표현했다. 언젠가 만났던 한 노동운동권 선배는 페미니즘 운동을 ‘부문 운동’이라고 일컬었다. 내 삶을 비추어 보았을 때 나는 그 단어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분명 같은 노동자지만 ‘여성’노동자라서 겪는 차별과 억압이 있는데도, 그것은 그들의 현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투쟁 거리도 아니었다. 정말 임금만 해결된다면, 노동시간만 단축된다면, 나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는 ‘말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강남역 앞에서 ‘피해자’였던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와 ‘고발자’가 되었듯이, 노동조합 안에서도 페미니스트들은 끊임없이 얘기했다. 꾸미기 노동에 대해서, 성추행에 대해서, 노조 내 성평등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했다. 나에겐 노조가 필요하다. 노동조합은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을 세상을 함께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그런 공간에서조차 ‘여성’으로서 내가 경험했던 착취와 억압을 말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세상은 반만 혹은 반도 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난 싸워야만 했다.

 

나는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내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지난한 무력감의 시간을 지났지만, 어느새 나는 세상을 뒤바꿀 꿈을 꾸고 있다. 그 천지개벽과 같은 시간 사이에는 어떤 대단한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사이엔 ‘우리의 존재’가 있었다. 노동조합 안의 페미니스트들, 또 그 바깥의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 그들의 말하기가 있었고 행동이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로 시작된 나의 아주 작은 감각은 그로인해 깨어났다. 이제는 내 차례가 온 것 같다. 나도 한 명의 연결지점이 되어 ‘말하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일터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노동조합 안에서 ‘예민한 여자’ 취급을 받고, 낮은 시급 때문에 가정폭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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