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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나’의 관계를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성공리에 치러진 퀴어여성게임즈 참가 후기



언제부터였을까, 운동과 나의 어긋난 관계


나는 ‘가을 운동회’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별로 없다. 1~3등을 하면 받을 수 있는 선물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기도 하고, 부채춤 연습은 재미있기는커녕 괴롭기만 했다. 한번은 오기가 생겨 운동회를 대비한 (혼자서 하는) 특훈을 한 적이 있다. 저녁마다 학교 운동장을 뛰었는데, 방법도 모른 채 너무 열정만 앞선 나머지 결국 발목 인대에 부상이 생겨 운동회에선 뛰지도 못하고 한동안 다리에 깁스를 하고 다녔다.


그게 원인이었을까? 체육에 대한 흥미는 급속하게 떨어져 갔다. 운동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기회도 점점 줄었다. 내가 다녔던 여중, 여고에선 체육 시간이 굉장히 형식적이었다. 빡빡한 책상 앞 공부 시간을 떠나 잠시 운동장에 나간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기 힘들었다.


작년 10월 21일 “제1회 퀴어여성 생활체육대회: 게임은 시작됐다”가 열린다는 얘길 들었을 때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체육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운동회 같은 거 하는구나. 시간이 되면 관람하러 가볼까’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대회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동대문구청에서 체육관 대관을 취소해버려서 생활체육대회는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른 채 연기되었다는 거다. (관련 기사: 퀴어여성들에게 체육관도 내주지 않는 사회에서 http://www.ildaro.com/8028) 체육관에서 운동 좀 하겠다는데 ‘풍기문란’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 2017년 10월 18일 동대문구청 앞에서 열린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 참여자들이 동대문구청 앞에 피켓을 붙였다. ⓒ일다(박주연)


대관 취소의 부당함을 알리는 궐기대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운동장에 서지 못했던 경험과, 운동을 즐길 기회를 배제 당했던 경험을 토로하는 참여자들의 발언을 들으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운동이랑 멀어진 걸까? 왜 우리 사이는 어긋난 걸까?’


그런 고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올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렸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주도한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이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스포츠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을 논의해야 한다는 이슈를 던졌다. (관련 기사: “우린 퀴어이고 여기 있다. 익숙해져라” http://www.ildaro.com/8132)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의 활동을 취재하며 스포츠가 그동안 얼마나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일반적인 시스젠더 남성’의 모습만 대표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스포츠가 규정하고 있는 ‘정상성’에 대한 많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운동 꼴찌, 다시 운동과 조우하다


그리고 4월, ‘퀴어여성게임즈’를 주최하는 퀴어여성네트워크에서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는 슬로건을 걸고 6월 17일 일요일에 생활체육대회가 열릴 것임을 알렸다. 이 공지는 작년 가을에 나왔던 대회 공지와는 달리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우리도 한번 (퀴어여성게임즈에) 참가해 보면 어떨까요?”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침 우린 계주나 3:3 농구 참여가 가능한 4명이었다. 또 언제 쭈꾸미를 먹으러 갈지 시간을 맞춰보자는 이야기를 하던 참이어서 “대회 끝나고 같이 쭈꾸미 먹으러 가요”라는 말 한마디에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좋아요”라고 답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나도 알았다고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꼴등만 했던 과거사를 고백하며 빠져나갈 핑계를 댔지만, 다들 괜찮다고 ‘그냥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자’고 했다. 그렇다 해도 내심 계속 걱정이 돼 참가 신청도 미루다 미루다 다른 팀원들이 다 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야 ‘엎질러진 물’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3:3 농구’ 경기에 참여 신청을 했다.


▶ ‘여성/퀴어 체육인 라운드테이블’ 안내 웹자보 (출처: 퀴어여성네트워크 페이스북)


2018 퀴어여성게임즈를 3주 남겨둔 5월 27일(일)에 열린 사전행사 <여성/퀴어 체육인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했다. 처음 열리는 이 ‘퀴어여성게임즈’라는 대회에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는지 궁금했고, 정말 내가 참여해도 되는지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어서였다.


배정된 조에 앉고 보니 약 30여명이 모인 것 같았다. 각자 소개를 하면서 운동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운동이 뭔지 이야기했다. 난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쭈꾸미를 계기로 얼떨결에 참여하게 되었고, 농구공을 만져본 일도 없다고 밝혔다. 다른 자리였으면 좀 부끄러웠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좀 뻔뻔(?!)해 질 수 있었다.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십여 년 넘게 운동을 해 온 사람, 오래 되진 않았지만 지금 생활체육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의외로 나처럼 운동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팀원 없이 일단 신청했거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이 대회를 위해 팀으로 뭉친 경우도 있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 ‘함께하는 운동’, ‘재미’, ‘야구’, ‘태권도’, ‘풋살’, ‘선수’ 등의 말들이 튀어나오는 그 공간의 분위기는 생소했다. 신난 표정으로 자신이 하는 운동을 자랑하거나 같이 운동하자며 팀원을 모집 중이라고 홍보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며 ‘정말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어 완전히 공감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건 우리에겐 이렇게 운동에 대한 욕구, 혹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털어놓는 자리가 필요했다는 거다. 체육 시간의 즐거움이라곤 불편한 교복 치마를 던져버리는 것 정도밖에 없었던 나조차도 말이다.


스포츠는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운드테이블이 끝나고 나자 우리 팀의 단톡방 분위기가 변화했다. ‘참가에 의의를 두자’던 팀원들이 ‘확실히 준비 훈련을 해야겠다’고 선언한 것. 생각보다 다른 참여자들이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연습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위기감과 함께 전투력이 상승한 것 같았다.


하지만 훈련 날짜를 정할 때마다 계속 시간이 안 맞았다. 예비 후보라고는 하지만 돌아가면서 다 뛰어야 한다고 하니, 선발 멤버가 아닐 뿐 경기는 참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드리블도 한번 안 해 보고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점점 초조해져 가는 동안 대회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고, 결국 팀에서 극단의 조치를 내렸다.


대체 멤버를 구하겠다는 거였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안도감이 더 컸다. 팀원들의 배려로 부담감을 덜었고 다행히 팀에 계속 남을 수 있었다. 유일한 ‘응원 멤버’라는 새로운 포지션을 얻으면서 말이다.


▶ ‘2018 퀴어여성게임즈’가 열린 은평구민체육센터 ⓒ일다(박주연)


이렇게 된 거 응원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며 머리를 굴렸지만 생각해 보니 응원의 경험도 별로 없었다. 분명 ‘스포츠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는데 왜 관람과 응원의 경험도 없는 거지?’ 생각해 보니 내가 그나마 좋아했던 스포츠는 흔히 ‘비인기 종목’으로 분류되는 여자농구와 여자배구였다. TV중계도 잘 안 해주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경기들 말이다.


학창시절, 비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던 내가 그 경기들을 보는 방법은 열심히 TV편성표를 뒤져서 찾아보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더 욕심을 냈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만, 아빠가 종종 데려갔던 (남자)야구나 (남자)축구에 비하면 관람에 대한 정보도 실질적인 접근성도 떨어졌다.


내가 보는 운동의 모습이 대부분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나에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운동하는 여성들의 멋있는 모습을 자주 접할 수 없었던 것, 그것이 나와 운동의 거리를 좀처럼 좁힐 수 없었던 이유였다.


이것이 바로 ‘스포츠의 힘’


드디어 ‘2018 퀴어여성게임즈’ 대회 당일, 은평구민체육센터는 아침부터 스텝들, 자원활동가들, 선수들 그리고 관람객들로 붐볐다. 농구 예선이 오전 11시부터 시작된다고 해서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이미 배드민턴 예선이 치러진 탓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 3:3 농구 경기 중인 선수들 ⓒ일다(박주연)


도착해서 보니 팀원 중 한 명은 연습하다 발가락이 다친 상태였고 대체 멤버로 들어온 팀원은 경기 시작 전부터 왠지 지쳐보였다. 걱정됐지만 잘 하라고 응원을 하고 다른 팀 경기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걱정은 배가 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트를 누비는 선수들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하루 이틀 연습한 실력이 아니라는 게 눈에 보였다. 3:3 농구여서 골대 하나를 두고 하는 거라 움직임의 반경이 그리 넓지 않다고 하더라도, 슛을 블로킹하거나 3점슛 거리에서 공을 넣거나, 드리블로 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내가 보던 프로 선수들 경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 팀이 코트 위에 섰다. 상대 팀은 유니폼까지 맞춰 입어서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우리 팀과는 한 눈에도 비교가 되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나의 걱정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팀원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연달아 레이업 슛(골대 가까이에서 뛰어올라 손바닥에 공을 올려 가볍게 던져 넣는 슛)을 성공시키고 점수를 더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 친구들이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었나’ 싶어 놀랐다. 덩달아 응원하는 나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우리 팀은 예선 통과 후 준결승에서 탈락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한 팀원은 “내가 속한 팀이 이긴 건 처음”이라며 행복해 했고, 경기를 뛰는 팀원을 응원하던 그의 애인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며 웃었다.


▶ 계주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이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 ⓒ일다(박주연)


나 또한 그 경기를 보고 있으면서 처음으로, 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들이 나와 ‘동일시’되는 경험을 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머나먼 존재가 아니라 ‘나도 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운동과 내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퀴어/여성이 모여 함께 코트 위를 뛰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생애 처음이기도 했다. 그 코트 위에선 정말 나이, 인종,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이 아무 상관 없었다. 지금까지 스포츠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존재들이 자신의 몸과 운동에 대한 욕망을 마음껏 표출하고, 그걸 지켜보는 모두가 편견 없이 그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이게 바로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스포츠의 힘’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우연히 한강에서 연습하다 만난 인연으로 우리 팀의 단톡방엔 경기에 참여했던 다른 농구팀의 팀원들이 초대되었다. 함께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도 언젠가 농구공과 함께 코트에 올라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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