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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독거여성노인들이 이제 내 동지야

[비혼여성의 시골생활] ‘아내’ 타이틀을 뗀 김수미 (글 사진 정상순)


※ 시골살이를 꿈꾸는 비혼·청년 여성은 점차 늘고 있지만 농촌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들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기획달>은 농촌에서 비혼·청년 시절을 경험한 일곱 명의 여성들과 만나,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삭제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원고를 쓴 이들 모두 농촌에서 비혼·청년의 삶을 경험한 남원시 산내면의 여성들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귀농학교를 졸업하고도 나는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마땅한 귀농지를 찾아다녔지만 소득은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긴 싫었다. 결국 다시 산내(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로 돌아왔다. 동시에 귀농학교 동기생과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입성 직후의 설렘과 두근거림은 사라졌다. 최승자의 “내 청춘의 영원한”을 다시 읊조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며,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갈망하며 나는 경계인이 되어 서성댔다. 16년 전 그렇게 서성이던 그때, 수미(김수미, 47세)를 만났다.


나는 2002년, 서른둘에 산내에 내려왔다. 그 나이에 왜 시골에 가냐며 묻거나 붙잡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수미는 내가 내려오기 삼 년 전, 스물아홉에 귀농이라는 새로운 삶을 택했다.


▶ 19년 전, 스물아홉에 귀농한 친구 김수미는 현재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일하고 있다. 할머니들 모시고 목욕탕에 온 날. ⓒ촬영: 정상순


안빈낙도의 삶을 꿈꾸며 스물아홉에 귀농한 여자


귀농운동본부에서 나온 책을 봤어. 궁금해서 전화를 해봤지. 귀농학교라는 데가 있는데, 3개월 전문과정 장기 귀농학교래. 당시 전문과정 교육비가 30만 원이었어. 3개월 먹고 자는 데 30만 원! 한 달에 십만 원인 거잖아. 너무 싼 거야. ‘체험! 삶의 현장’인가, 그런 티브이 프로 있었지? 그거 보니까 힘들어 보이는데도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일을 하더라. 농촌에서 살고는 싶은데 난 게으르고… 귀농학교를 다니면 농촌 생활이 나한테 맞을지 안 맞을지 알 수 있겠다 싶어서, 그래서 왔어.


펄 벅의 <대지>를 중학교 때 읽었는데, 주인공 왕룽이 농지에 대한 애착 때문에 땅을 사들이잖아. 거기에 팍 꽂힌 거야. 지구라는 공공의 것을, 자연을, 땅을 산다는 거, 지구의 일부분을 내가 가질 수 있다는 거, 그게 정말 놀라웠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왜 사냐 건 웃지요’ 그러는 시 있었잖아. 제목이 ‘남으로 창을 내겠소’였나. 그 시 주제가 안빈낙도의 삶인가 그랬는데, 안빈낙도의 삶은 왠지 시골에서 이루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도, 시골 가면 일관된 심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어. 세상이 너무 궁금했거든. 산을 바라보면 산속에 있는 동물이 다 보이고, 바위를 보면 바위 속이 꿰뚫어 보이면 좋겠다… 나무 수액 올라가는 게 보이고 사람 내장, 뼈가 다 보이면 좋겠다 싶었어.


대학 친구들은 내가 귀농하겠다고 하면 “너무 낭만적이다”, “비현실적이다”, “삶의 도피다” 그러는데,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더라. 실은 도시가 싫었거든. 그래서 증명해야 했어. “있잖아, 나 도시에 살 수 있어. 그런데 시골로 가는 거야. 서른까지 증명해 보이마. 증명하고 나서 귀농할 거야!” 이러면서 어정쩡하게 도시에서 직장을 다녔지.


근데 미치겠더라. 회사와 집을 왔다 갔다 하는데, 발로 막 아무 데나 뻥뻥 차고 싶더라고. 그런 와중에 귀농운동본부의 그 책을 본 거야. 사실 난 큰 변화가 없는 삶을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그런 결심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도시가 너무 힘들었던 건가. 죽을 때 ‘아, 어떡해!’ 하고 죽는 거, 난 그게 제일 무섭거든. 1999년 세기말에 ‘지구 종말의 해’라고 떠들썩했잖아. 멸망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만 1999년이라는 걸 핑계 삼아 ‘에라 모르겠다’ 그러면서 내려온 것 같아.


막 왔을 때는 안전하고, 재밌고, 뭘 좀 못해도 되고, 내가 결정 안 하고 따라만 가면 되는 시간이었어. 나는 그냥 즐겼을 뿐이고 귀농에 대한 의지 같은 건 없었거든. 농사가 아니라 안빈낙도, 무위자연이 목표였다니까. 노자를 아주 좋아했어. 근데 실컷 놀고 졸업할 때가 다가오니까 불안했는지 졸업 일주일 전부터 허리가 너무 아프더라고. 아파서 누워 있다가 귀농학교 간사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 조건은 농장식구 되는 거고, 그때 월급은 20만 원. 농장식구로 남는 것도 안전망으로 들어가는 거라 쓰윽 발을 담갔지.


혼자 살기는 두려우니까 몇몇이 의지하면서 살았어. 절이랑 농장에서 백일리, 입석리, 대정리 이런 데다 숙소를 마련해줬고. 근데 같이 살던 친구들이 하나둘 다른 파트너를 만나 연애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도 하고 그러대. 끈 떨어진 연 돼서 우왕좌왕하다가 그때 나도 연애 시작했지. 그러다가 결혼도 하고…. 결국 갈아탄 거야. 누구라도 의지하고 살아야 하니까.


근데 정말 상상 초월이더라. 애를 어떻게 키우는지 왜 나한테 아무도 안 가르쳐줬니? 분노가 일었어. 애가 두 시간마다 깨는 줄도 몰랐고, 젖을 두 시간마다 먹여야 하는 것도 몰랐어. 나, 정말 너무 당황스러웠다.


지역민과 10년 결혼생활, 이제 다시 ‘비혼’


근데 신랑이 이 마을 사람이니까 결혼 안 하고 살 때랑은 정말 또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 동네 사람들이 몽땅 선후배야. 내 신랑이 자라온 과정을 동네 사람들이 죄다 아는 거지. 그때 알겠더라. 왜 시골에 배타적인 정서가 생기는지, 왜 텃세 부리는 문화가 있는 건지. 이건 도시 사람들이 도대체 알 수 없는 정서야.


임신해서 그때까지 일하던 한생명(남원시 산내면에 위치한 비영리단체. ‘조화로운 삶,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 생명을 살리는 농업’을 실현하는 지역공동체를 꿈꾼다)을 그만두고 아이 낳아 키우느라 5, 6년이 훅 지나갔지. 애들 키우는 동안은 산내에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살았어.


나, 결혼 전에 귀농학교 총동문회 담당이었거든. 1년에 한 번 총동문회 주최하고 그랬으니 귀농학교 사람들 다 알고 지냈지. 지금은 윗마을로 이사 갔지만, 농장 바로 옆에 있던 작은학교 사람들하고도 한 식구처럼 그렇게 지냈어. 근데 애 키우고 다시 마을로 나오니까 너무 낯선 거야. 그사이 모르는 사람도 엄청 많아졌고. 뭐랄까, 소외된 느낌이랄까. 낯선 귀농인을 보니까 원래 살던 마을 분들 심정이 너무 이해되더라고. 불편함, 거부감,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감정, 그런 게 생기대. 그 때 생각했지. 마을 분들이 우리 볼 때 이랬겠구나….


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느꼈던 거부감이 얼추 정리된 다음에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냈어. 그러면서 산내랑 두 번째 교류를 시작한 것 같아. 어린이집 애들 엄마들이랑 소통하면서 그 힘으로 버틴 시간이 있었지.


▶ 목욕탕에 가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어르신들. 수미는 혼자 양육을 하고 있는 엄마지만,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일하며 혼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했다. ⓒ촬영: 정상순


내가 독거노인생활관리사잖아. 이건 정말 큰 장점이야. 난 마을에 애정이 있어. 내가 살다가 죽을 마을이니까. 한 동네 어르신들이 남편 친구 엄마고 친척인 거야. 그래서 동네에 낯선 사람이 왔을 때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됐어. 내 아이들을 여기서 낳고 키웠으니까 우리 애들도 아빠처럼 살아가겠구나, 어르신들이 얘네들 자라는 거 다 지켜보시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애들한테 “아빠 친구야”, “아빠 친구 어머님이셔” 이렇게 소개해야 되니까. 지금은 그런 친척, 친족에 가까운 이웃이라는 끈을 잘 이용하고 있기도 하고.


내가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지금껏 버텼을까 싶을 때가 있어. 아마 그건 도시에서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으니 불현듯 다가온 가벼운 즐거움이랄까, 그런 걸 알아버려서 그런 거 같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귀농학교 시절이었어. 농장에서 천왕봉 바라보는 게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천왕봉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그 행복감이 너무 깊었다. 발이 땅에 안 닿아있을 때니까.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이 여기서 보낸 그 시절이야. 어떻게든 굶어 죽진 않겠지, 하면서 의지하게 되는 든든한 백이 있었고. 그래서 떠날 생각을 안 했지.


든든한 백, 그게 ‘실상사’였어. 기적적인 일들이 다 와. 필요하면 누가 막 주고. 그래서 물질적인 두려움이 없었어. 20만 원으로 살았어. 밥은 절에서 주고, 임대료 없었고, 옷도 여기저기서 주고 그랬으니까. 어떻게든 뭐든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느꼈던 것 같아. 근데 그때 내 나이 여성들이 지금 산내 온다면… 아휴, 정말 불안하겠다. 우리 땐 다 가난했고, 다 돈 없이 왔고, 맨땅에 헤딩해도 될 만한 공간이었잖아. 근데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우린 실상사라는 큰 품 안에서 놀았어. 누구라도 아무 때나 와서 자원봉사하겠다고 하면 밥 먹여주고 재워주고. 인심이 후했다고 해야 하나. 아마 그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 같아.


그래, 밥하고 방이 문제네. 예전엔 그게 기본적으로 해결됐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 그렇다고 바로 결혼할 수도 없고. 더구나 원주민이랑 결혼하는 건… 아휴, 사랑한다면 또 모르지만. 애들 아빠는 지역민이지만 독특한 지역민이었어. 귀농한 사람들에 대한 호의와 이해가 있었지. 귀농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역민이었고. 내 결혼 조건이 ‘꼭 귀농학교 졸업해라’였거든. 귀농학교 졸업식 다음 날 결혼식 했어. 나에 대한 이해를 바랐던 거야.


근데 그게 가능할까? 보통 지역민이랑? 나는 아니라고 본다. 나도 목마름이 있었어. 삶의 철학에 대한 배고픔도 있었고. 솔직히 남편을 약간 무시했다고 하나. 도시에서 배운 사람이 지역민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이해하며 살 수 있을까? 그거 생각보다 진짜 힘든 일이야. 그래서 내가 유일무이한 거야. 어떻게 20년 동안 지역사람이랑 결혼한 귀농인이 나 말고 아무도 없니.


10년 결혼 생활하고 이제 다시 혼자인데, 혼자란 생각은 안 들어. 애들 키우느라 정신없으니까. 비혼의 삶이 어떤 건지도 다 잊어버렸네. 일단 지역에 산다는 건 나한텐 굉장한 백(background)이야. 나를 그냥 혼자 된 과부로 안 보셔. 난 지역주민의 아내였으니까. ‘혼자 애들 키우느라 애쓰는’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덜 힘든 면도 있어. 내가 모시는 분들이 독거노인이라 다 동지인 거야.


젊어서 혼자 된 분들도 계셔. 그래서 내 아픔을, 내 미래에 놓인 예상된 어려움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거야. 깊은 동정과 배려심이 있지. 그분들이 볼 때 난 그냥 귀농인이 아니고 지역민의 부인이거든. 그래서 좋은 시선으로 봐주시는 것 같아. 가면 맨날 뭘 주셔. 참 다행인 게, 내가 나름 성격이 좋아서 “도망가지 말고 힘내서 살아라”라든가 “좋은 사람 만나면 혼자 살지 말아라”라든가 그런 말들이 다 안 걸려. 어르신들은 그저 당신 마음을 얘기하시는 거니까.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애들 보고 살아야죠.” 그러면서 나와.


▶ “목욕탕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할머니들을 안내하는 모습. 다시 비혼이 된 수미는 ‘아내’ 타이틀이 없어지니 날개가 펼쳐진 느낌이라고 말한다. ⓒ촬영: 정상순


독거노인에게도, 비혼 청년에게도 울타리가 필요해


결혼한 사람들이 부러운 건, 둘이 돈을 벌 수 있다는 거. 시골에서 비혼은 도시처럼 많이 안 벌어도 생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 현재 내 조건 중 제일 좋은 건 집이 있어서 월세 안 들고 이사 안 가도 되는 거야. 집이 있으니 절대 거지는 안 될 테니까. 혼자 사니 강해지는 면도 있어. 독립심이 모락모락 올라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려고 한 결혼인데, 이제 내 구체적인 삶을 멋지게 펼칠 순간이 온 거야. 남편이 살아있다면 내 날개를 이렇게 확 펼치지 못했을 거 아니니. 남편이란 존재는 여자의 날개를 접게 하는 존재야. 내가 알아서 기어. 알아서 접고.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근데 아내니 남편이니 그런 신경 쓰이는 타이틀이 없어지니 새롭고도 놀랍더라고.


혼자 귀농하신 분들, 그들이 선택해서 혼자 사는 거잖아. 그거 정말 멋진 일인데 뭔가 날개를 확 펼친 것 같은 느낌이 없어. 왜냐면 뒷받침이 없으니까. 사회적인 뒷받침. 그런 뒷받침이 없어서 혼자 사는 즐거움을 더 많이 못 느끼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뭔가 단단하게 잡아주는 게 있으면 더 잘 날아갈 텐데. 대들보, 기둥 그런 게 없으니까. 단단한 기반들을 마을에서, 사회에서 주지 못하면 그들도 불안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뭐, “독거노인들, 독거솔로들 연대하시오~!” 그래서 될 일은 아니지. 마음도 맞고 뭐도 맞고 그래야 하는데, 그들만의 연대를 하라고 해서 될 일은 아니거든.


우리 동네 활력기금(지리산 청년활력기금. 지리산 자락에 정착한 선배 세대가 지리산에서 자립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최소 1년 간 월 50만원 활동비를 아무 조건 없이 제공하는 프로젝트) 있잖아. 그런 형식으로 청년들을 지지하는 것처럼, 아니면 우리가 예전에 실상사에서 보호받고 지지받았듯이 독거노인들에게도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때는 가족보다는 솔로들이 농장이나 귀농학교, 작은학교에 많았어. 농장이라는 공간도 농사일, 참 먹는 시간, 저녁 뒤풀이 같은 거로 솔로들을 묶어주는 환경이었지. ‘장가가려면 귀농학교 다녀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농촌에서 살고 싶거나 힘든 농사일을 자청하는 처자들이 흔치 않은데 귀농학교엔 그런 걸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내려 온 처자들이 있으니, 귀농학교 온 총각들이나 산내에 남은 총각들이 그 처자들에게 호감을 갖는 게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지.


요즘은 혼자 살고 싶어서 내려오기도 하니까 새로운 조건이 필요해. 새로운 조건에 맞는, 옛날의 실상사 같은 큰 품이 필요해. 관점이나 듣는 입장이 옛날하고는 달라져야 한다는 거지. 혼자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건 분명히 이유가 있는 거잖아. 이제 다른 제도가 필요한 거야.


어르신들은 공간적으로 한마을에서 살잖아. 그런데 우린 다 떨어져 있고, 혈연도 아니고, 같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자칫하면, 어느 순간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훅 소외되는 상황이 올 수 있거든. 그게 원하는 바라면 모르지만, 안전한 소외여야지. 어르신들은 저절로 형성된 환경에서 그렇게 살아온 거고 그래서 자연스레 서로 돌봐주는 게 가능한데, 이제는 그런 거 안 돼. 그냥 저절로 될 일 아니야.


지금 내가 시골에서 비혼으로 사는 게 덜 힘든 이유는 이혼녀도 아니고, 외지에서 온 비혼 여성도 아닌 남편을 잃은 가엾은 공가네 막내며느리기 때문인 것 같아. 그래서 배척당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 당하지 않고, 오히려 동정의 시선을 받는 거지. 물론 이런 시선이 외로움을 상쇄시켜주진 않아. 내가 외롭지 않은 건 마음을 나눌 친구들 덕분이야.


산내에 내려온 지 채 일 년이 안 됐을 때, 다시 최승자의 ‘내 청춘의 영원한’을 읊조리게 됐을 때, 귀농인도 도시인도 아닌 경계에서 다시 서성대고 있을 때, 아직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그때, 나는 실은 버거웠다. 고른 치아를 드러낸 채 늘, 유쾌하게 봄 햇살처럼 웃고 있는 이 애가 벅찼다. 뭐가 저리 즐겁지. 뭐가 저리 유쾌하지. 마음을 내는 것도, 다른 이의 마음을 받는 것도 뭐 하나 걸릴 게 없는 그 애는 내가 모르는 평화의 한 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너그러움 덕분일까. 친구의 웃음은 더 이상 나에게 부담스럽거나 버겁지 않다. 그래서 생각한다. 지난 시간, 친구가 손에 넣은 것은 지혜였을까. 혹은 젊은 날 자신이 누린 것을 순환시키고자 하는 의지였을까. 여전히 ‘여럿이, 함께’보다는 ‘단출하게 오롯이’를 꿈꾸는 나는 이 친구 수미 앞에서 멈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다.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혹은 다른 삶도 가능할까.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농촌 비혼여성 인터뷰는 삼선복지재단 지역청년 지원사업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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