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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의 가능성…억압된 말들의 귀환

[페미니스트의 책장] 최은영 소설집 『쇼코의 미소』


 

『쇼코의 미소』를 처음 딱 읽고 책을 덮으면, 부드럽고 따뜻한 기분이 든다. 아름다운 이야기책을 읽은 것처럼 소중한 마음이 차오른다.


그러나 혼자서 조용히 이야기를 잘 곱씹어보면, 이상하게도 이것은 그리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들은 아니다. 삶의 초라하고 추악한 단면들이 그의 이야기 속에 어떤 치장도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쇼코의 미소에 서려 있는 서늘함처럼, 문득 터져 나오는 미진의 분노처럼, 알 수 없이 단절되어버린 어떤 관계의 날카로움처럼 이 따뜻한 이야기들은 칼을 품고 있다. 그래서 『쇼코의 미소』를 다시 펼쳤을 때, 스스로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느꼈다고 생각했던 온기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여성 작가의 약진’이라는 말로 기억되는 한국 문단의 최근 몇 년, 『쇼코의 미소』는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은 이미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부드러운 분홍색의 배경과 타이프로 친 것처럼 가늘고 우아한 은색의 서체, 그리고 연하늘색 스웨터를 입은 소녀의 뒷모습이 그 책의 인상을 구성하고 있다. 어떤 공격성도, 위악도 느낄 수 없는 섬세한 색상들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방향을 알 수 없는 시선과 숨겨진 손, 소녀를 둘러싼 희미한 그림자가 문득 위태롭고 불안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그리고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감상도 그런 양면성을 닮아있다. 아주 순정하고 무해한 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실은 적극적으로 가장 첨예하고 정치적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서사이다.

최은영 소설집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이 책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서사’를 갈구하는 욕망과 목소리 속에서 직접적으로 호출되어 나왔다. ‘생각하고 설치고 말하라’는 구호 위에 여성의 말하기를 가장 정치적인 자리에 기재했던 페미니즘 리부트처럼, 『쇼코의 미소』는 여성의 이야기를 가장 정치적인 자리에 두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단편집의 위치를 관통하는 표제작 「쇼코의 미소」는 각각 한국과 일본을 국적으로 하는 두 소녀가 교차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국인인 소유과 일본인인 쇼코는 고등학교의 국제결연 홈스테이를 통해 만나게 된다. 촌스러워 보일 정도로 뚜렷한 욕망 속에서 수없이 기획되었던 이러한 행사는 자유 여행의 시대를 지배하는 국제성의 이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이상이 여성에게 가지는 의미는 사뭇 달랐다. 영화 <벌새>의 은희가 ‘영어 잘하는 여대생’이 되기를 기대받았을 때 거기에 ‘엄마와는 다른 삶’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처럼, 여성에게 새로운 사회의 가치에 부합한다는 것은 하나의 탈출이기도 했다.


그것은 쇼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를 유랑하며 살겠다는 꿈은 쇼코가 집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기반이었다. 집에 귀속되는 것이 성공이자 안전으로 여겨지는 전통적인 여성에게, 21세기 새롭게 떠오른 국제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는 집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탈출구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은 결국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다. 소유는 자유롭고 특별한 삶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여행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해놓고는 정작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쇼코에게 어떤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영화 쪽 진로를 포기하고 하루에 단어를 백 개씩 외우면서, ‘그토록 싫어했던 제도권 교육’에서 편안함을 느끼면서 소유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사회가 불어넣었던 희망은 진정한 변화도, 탈출도 아니었다는 것을. 오히려 그들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사회의 이상 속에서,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쇼코의 미소」는 여성의 성공 담론이 그 시대의 여자아이들에게 남겼던 외상을 기억한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다시 ‘성공’이 논의되는 이 현실에서, 이 기억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가장 시의성 있는 이야기로 다시 다가온다. ‘성공한 소수’가 되지 못하고, 그들의 멋진 성공담 뒤에 남겨진 소유는 성공의 담론이 애써 포착하지 않는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소유가 다시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엄마와 할아버지의 새로운 면면들은 발견할 때, 여성이 귀속되어있었던 ‘집’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그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쇼코의 미소」는 그 새롭게 발견된 가족들을 우리가 잊고 있었던 해답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미 그 가족의 자리는 우리가 지향하거나 돌아가야 할 고향은 될 수 없다.


여기서 여성이 서 있는 자리는 과거의 가치로 회귀할 수도, 그렇다고 새로운 가치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곤란한 자리이다. 언제나 쇼코가 조금 더 어른스러웠던 것처럼, 그 곤란함을 쇼코는 조금 더 빨리 깨달았던 것처럼 보인다. 쇼코의 서늘한 미소, 어렸을 때의 그늘을 여전히 지닌 그 양면적인 미소를 바라보는 소유의 시선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 곤란한 자리에서 여전히 살아나가야 하는 시간을 남겨둔 채.


「쇼코의 미소」뿐 아니라, 이 책 곳곳에는 방 한켠에 지구본과 세계지도를 지닌 채로 자란 1980년대생 여자아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기 때문에 어디로든 가야 한다고 믿었던 시대를 살았지만, 그것은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사실 또 하나의 속박이었음을 깨달으며 자라야만 했던 여자아이들이다. 그리고 이 여자아이들이 서 있던 곳이 사실은 가장 논쟁적이고, 불온하고, 정치적인 자리였다는 것을 이 책은 변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적확한 여성 서사로 호명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회원들의 글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은진(호네시)님은 “글 쓰는 대학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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