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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한복을 입으며 발견한 재미
 
낮에는 아직도 덥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져 자주 생활한복을 입고 지낸다.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보다는 주로 봄, 가을에 생활한복을 즐겨 입는 편이다. 처음 그 옷을 입게 된 것은 헐렁해서 몸에 잘 달라붙지 않아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입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불편한 점도 여러 가지다. 잘 구겨지니까 아무데서나 뒹굴 수도 없고, 주로 손세탁을 해야 하니 세탁도 까다롭다. 또 세탁 후에는 다림질도 꼭 해야 하니, 다림질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꽤 번거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옷을 고집하는 까닭은 또 다른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타인의 시선에서 좀더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서양식 옷처럼 몸의 선을 드러내거나 노출시키면서 노골적으로 여성성을 강조해 나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여성성을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다. 결국 옷이 몸과 겉돌지 않아 편안하다. 몸의 편안함과는 또 다른 이유, 마음의 편안함이 있다.
 
게다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재미도 발견했다. 그 이름과 달리, 일상 생활에서 생활한복을 입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게 된다. 때로는 말을 건네오는 사람도 있다.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애국심이 깊어 보여요”, “종교생활 하시나요?”, “직접 만드셨어요?” 등등.
 
사실 난 전통에 큰 관심도 없고, 애국심 넘치는 민족주의자도 아니며, 종교도 없고, 옷 만드는 놀라운 기술도 없다. 하지만 입는 옷 때문에 내 모습이 아닌 연상들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래서 다른 이를 연기하는 연극배우가 된 듯 즐기곤 하는데, 놀이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필요’로서의 옷, ‘필요 이상’의 옷
 

추천서 - 질 리포베츠키 & 엘리에트 루 "사치의 문화" (문예출판사, 2004)

이처럼 생활한복이란 옷은, 생존을 위한 ‘필요’를 넘어 옷을 사색하도록 나를 이끌고 간다. 물론, ‘더위와 추위로부터 체온을 유지하고 현대사회에서 알몸을 가리기 위해 옷이 필요하다’는 소로우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의 시선을 의식해 찢어진 옷, 깨끗한 새 옷, 유행에 어울리는 옷에 신경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옷에 관심을 쏟을 시간이 있으면 내면을 가꾸라’는 그의 진지한 가르침도 경청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겉치레만 신경 쓰거나 내면보다는 외모에 더 집중해서 정신을 갈고 닦는 일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동서고금의 현자들이 모두 입을 모아 그와 같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한다면, 그 가르침만으로는 좀 갑갑하다. 의복은 인간이 최소한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필요 이상’의 것이기도 한데, 금욕적 태도로 그냥 무시해 버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내 경우를 보면, 옷에 대한 생각이 지속적으로 바뀌어 온 것 같다. 한때는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하는 한에서만 옷을 소유하는 금욕적인 생활에 충실했던 적도 있고, 어느 시기에는 돈이 없어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닌 적도 있다. 또 꽃처럼 대상화되는 여성적 이미지를 던지고 싶어 치마를 입지 않고 운동복을 즐겨 입거나 유니섹스 모드를 따른 적도 있었다.
 
요즘은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으로, 연기하듯 옷 갈아입기를 즐기기도 한다. 이렇듯 내게도 옷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표현 수단, 즐거운 놀이로서 필요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그 필요 이상의 의미로서의 의복은 분명 이 사회의 물질적 풍요, 개인적인 경제적 여유가 안겨다 준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유명 브랜드의 패션이나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유행패션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한 옷차림은 조장된 소비에 편승하거나 경제적 부를 과시하는 것이니만큼, 내 경제수준에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처럼 과도한 물질적 소비에는 동참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검은 원피스, 프리다 칼로의 민속의상
 
아무튼 자기표현 및 타인과의 소통이야말로 생존적 필요를 넘어 옷을 입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독립적인 여성화가의 이미지를 원했던 조지아 오키프의 검은 원피스차림이나 멕시코 문화, 멕시코 여성민중에 관심을 가졌던 프리다 칼로의 ‘테우아나 민속의상’만 해도 그렇다. 그녀들에게 의복은 자기내면을 표현하고 그 내면을 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때 의복은 생존적 필요를 넘어서는 하나의 메시지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녀들의 옷은 단체 유니폼, 일터 작업복, 동호회 티셔츠와 같이 특정한 집단을 드러내기 위한 몰개성적이고 획일적인 옷과도 명백히 구분된다.
 
나 역시도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내면을, 욕망을 표현하길 원한다. 비록 그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다 하더라도 말이다. 내면과 외면이 분리된 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은 외부로 전해질 수 있고, 옷은 그 작은 통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만화 티셔츠, 생활 한복, 운동복은 각각 내 속의 아이, 노인, 젊은이를, 남성성과 여성성을 밖으로 드러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일, 놀이, 휴식이라는 제각기 다른 목적에 따라, 또 장소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옷은 선택된다. 옷이 나를, 나의 개성을 잘 표현해준다면, 나는 그 옷을 통해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때 옷은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의 도구가 된다.
 
‘필요 이상’의 옷이 공생의 가치와 충돌한다면?
 
그러나 아무리 자기표현과 소통, 편안함과 즐거움이라는 개인적 쾌락이 옷을 입는 이유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마음 한 편에 불편함은 남는다. 그것은 개인적 쾌락주의가 공생과 공존의 가치와 상충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내 욕망을 드러내고 나의 쾌락을 도모하기 위해, 동물을 잔인하게 사육, 도살해 만든 모피옷. 가죽옷,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공동재산인 물을 오염시키는 화학염색 옷, 토양을 황폐화, 사막화시키는 관행농업에서 생산된 면 옷, 노동력을 착취해 만든 헐값의 옷 등을 입는 자신을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나 스스로 작물을 가꾸고 실을 뽑고 천을 만들어 천연염색을 해 옷을 만든다면 자연스레 내 욕망은 현실적 조건에서 조절되겠지만, 상품으로 완성된 옷만 대할 뿐이니, 금욕주의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내 욕망을 자연스레 공생의 흐름에 맡기는 일은 여전히 내게 큰 과제일 수 밖에 없다. [일다]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www.ildaro.com
 
[철학하는 일상] 물건을 오래도록 사용할 수는 없을까? | 벼룩시장 통해 ‘좋은 소비’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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