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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가난의 관계를 생각하며
산행동무였던 이웃화가가 도시를 벗어나 멀리 이사를 갔다. ‘가난이 무서워’ 도시를 떠난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닌 듯했다. 시골에 간다고 해서 그녀가 가난을 벗어날 것 같지도 않으니까. 오히려 도시에서 가난한 것이 무서워, 아니 도시에서 가난하면서 행복하기 힘들어서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도시에 머물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물론 큰 돈을 벌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도시에서 생존할 만큼은 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도시 삶을 선택함과 동시에, 그림 그릴 여유도, 자연과 벗하는 한가로운 삶을 살 기회도 박탈당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가 실패한 삶은 ‘도시에서’ 생존할 돈을 마련하면서도, 자유롭고 시간적 여유를 누리며 좋아하는 일과 놀이를 하고도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삶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실패에 뒤이어, 그녀는 차선책으로 ‘도시 밖에서’ 그러한 삶에 또 한 번 도전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내가 현재 바라는 삶 역시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도시에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얻으면서, 일과 놀이, 휴식을 내 방식대로 조절하는 느긋하고 자유로운 삶 말이다. 나와 그녀의 가장 큰 차이라면, 내가 그녀보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난 좀더 쉽게 그 삶에 다가갈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럭저럭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강제된 가난, 자발적 가난, 그리고 부자의 꿈
강제된 가난에 짓눌린 채 행복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지 않을 정도의 가난에 내몰린다면, 당장 살아남기도 힘든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나. 그리고 상대적인 가난 역시도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면, 불행으로 내몰리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가난 자체라기보다는 ‘그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는가, 아니면 밖에서 강제되었나’ 하는 구분에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난을 자발적으로 택하게 된다면, 그것이 행복의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자발적 가난’을 행복의 본질적 조건이라고 생각하며, 가난한 삶을 선택한 이들도 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 성인 프란체스코, 간디, 소로우처럼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몇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만큼 그들이 실천한 금욕생활은 보통사람들이 감히 따라 하기 어려운 경지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다들 부자가 되려고 하는 걸까?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할 만큼 자신의 욕구를 절제할 자신이 없으니까,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행복을 쟁취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 것일까? 그러고 보면, 주변 사람들은 예외 없이 부자를 꿈꾸고 있다. 그나마 이웃화가나 나처럼 남들이 말하는 부자가 될 자신이 없는 사람이나 부자를 꿈꾸지 않을 뿐이다.
부를 추구하지 않을 때 (부자가 아니라도) 행복하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굳이 철학자의 사상이나 과학적 연구까지 빌리지 않더라도, 부가 행복과 무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만 만족된다면, 그 이상의 필요와 욕망은 다분히 심리적인 것과 관련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생명체인 한에서의 생존을 위한 요구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고통을 받아 행복할 수 없겠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물질적 욕망의 충족과 행복은 아무런 필연적 연관도 없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다스려야 행복할 수 있다’는 종교인들의 충고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돈을 벌 수 있다면,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좀더 적은 돈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자급자족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이미 행복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물질적 기초는 갖춘 셈이다. 그 이상의 물질적 욕구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와 관련될 뿐이다. 자신이 가진 수준에서 충분한 행복감을 얻어내는 것,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부는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가난해서 고통 받는 것에 비하면 이점이 있긴 하더라도 말이다. 부자가 되어 행복하겠다는 것은 구매하고 소비하는 것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행복을 물질적인 것에 가두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행복감은 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서 온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기본적인 의식주 이외에 ‘벗’과 ‘자유’, ‘사색할 여유’를 행복의 조건으로 꼽았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나는 거기다 사랑하는 가족, 의미 있는 일,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자연을 더해 보고 싶다.
결국 부는 행복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현자들은 부가 아니라 가난에 진정한 행복의 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비록 자발적 가난의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부자가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오히려 부를 추구하지 않을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지혜는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그 지혜는 분명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고 가는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
오늘은 그녀의 블로그를 찾아보았다. 시골로 이사간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시골생활에 조금씩 자기방식으로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인터넷부터 연결하고 시작한 그녀의 시골생활, 어려운 시작을 당분간 함께 해줄 친구도 있었고,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나눠주고 있는 앞집 할머니도 계셨다. 좋아하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리길 꿈꾸면서, 마당에 어린 감나무 한 그루도 새로 심었다. 또, 가끔은 짬을 내서 자전거를 타고 근처 절들을 찾으며, 여유도 즐기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가난에 쫓겨 시골로 갔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곳에서 행복을 찾길 진심으로 바란다. 아니, 그녀라면 그 행복을 건져낼 능력이 있다고 본다. 가난한 독신여성 혼자서라도 그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시골 삶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어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짬이 나면 그녀가 살고 있는 시골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www.ildaro.com
[일상 속 철학] 일/놀이/휴식 경계를 넘나들며| 도시재개발에 몇가지 의문|차이를 인정한다는 것
산행동무였던 이웃화가가 도시를 벗어나 멀리 이사를 갔다. ‘가난이 무서워’ 도시를 떠난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닌 듯했다. 시골에 간다고 해서 그녀가 가난을 벗어날 것 같지도 않으니까. 오히려 도시에서 가난한 것이 무서워, 아니 도시에서 가난하면서 행복하기 힘들어서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버린 것이 분명하다.
가난 자체가 불행인 것은 아니다.
그녀가 실패한 삶은 ‘도시에서’ 생존할 돈을 마련하면서도, 자유롭고 시간적 여유를 누리며 좋아하는 일과 놀이를 하고도 충분히 휴식할 수 있는 삶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실패에 뒤이어, 그녀는 차선책으로 ‘도시 밖에서’ 그러한 삶에 또 한 번 도전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내가 현재 바라는 삶 역시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도시에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얻으면서, 일과 놀이, 휴식을 내 방식대로 조절하는 느긋하고 자유로운 삶 말이다. 나와 그녀의 가장 큰 차이라면, 내가 그녀보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난 좀더 쉽게 그 삶에 다가갈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럭저럭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강제된 가난, 자발적 가난, 그리고 부자의 꿈
강제된 가난에 짓눌린 채 행복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지 않을 정도의 가난에 내몰린다면, 당장 살아남기도 힘든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나. 그리고 상대적인 가난 역시도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면, 불행으로 내몰리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가난 자체라기보다는 ‘그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는가, 아니면 밖에서 강제되었나’ 하는 구분에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난을 자발적으로 택하게 된다면, 그것이 행복의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자발적 가난’을 행복의 본질적 조건이라고 생각하며, 가난한 삶을 선택한 이들도 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 성인 프란체스코, 간디, 소로우처럼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몇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만큼 그들이 실천한 금욕생활은 보통사람들이 감히 따라 하기 어려운 경지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다들 부자가 되려고 하는 걸까?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할 만큼 자신의 욕구를 절제할 자신이 없으니까,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행복을 쟁취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 것일까? 그러고 보면, 주변 사람들은 예외 없이 부자를 꿈꾸고 있다. 그나마 이웃화가나 나처럼 남들이 말하는 부자가 될 자신이 없는 사람이나 부자를 꿈꾸지 않을 뿐이다.
부를 추구하지 않을 때 (부자가 아니라도) 행복하다
*추천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이레, 2004)
다시 말해서, 생명체인 한에서의 생존을 위한 요구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고통을 받아 행복할 수 없겠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물질적 욕망의 충족과 행복은 아무런 필연적 연관도 없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다스려야 행복할 수 있다’는 종교인들의 충고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돈을 벌 수 있다면,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좀더 적은 돈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자급자족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이미 행복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물질적 기초는 갖춘 셈이다. 그 이상의 물질적 욕구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와 관련될 뿐이다. 자신이 가진 수준에서 충분한 행복감을 얻어내는 것,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부는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가난해서 고통 받는 것에 비하면 이점이 있긴 하더라도 말이다. 부자가 되어 행복하겠다는 것은 구매하고 소비하는 것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행복을 물질적인 것에 가두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행복감은 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서 온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기본적인 의식주 이외에 ‘벗’과 ‘자유’, ‘사색할 여유’를 행복의 조건으로 꼽았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나는 거기다 사랑하는 가족, 의미 있는 일,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는 자연을 더해 보고 싶다.
결국 부는 행복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현자들은 부가 아니라 가난에 진정한 행복의 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비록 자발적 가난의 이상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부자가 아니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오히려 부를 추구하지 않을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지혜는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그 지혜는 분명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고 가는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
오늘은 그녀의 블로그를 찾아보았다. 시골로 이사간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시골생활에 조금씩 자기방식으로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인터넷부터 연결하고 시작한 그녀의 시골생활, 어려운 시작을 당분간 함께 해줄 친구도 있었고,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나눠주고 있는 앞집 할머니도 계셨다. 좋아하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리길 꿈꾸면서, 마당에 어린 감나무 한 그루도 새로 심었다. 또, 가끔은 짬을 내서 자전거를 타고 근처 절들을 찾으며, 여유도 즐기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가난에 쫓겨 시골로 갔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곳에서 행복을 찾길 진심으로 바란다. 아니, 그녀라면 그 행복을 건져낼 능력이 있다고 본다. 가난한 독신여성 혼자서라도 그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시골 삶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어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짬이 나면 그녀가 살고 있는 시골에 한번 다녀오고 싶다.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www.ildaro.com
[일상 속 철학] 일/놀이/휴식 경계를 넘나들며| 도시재개발에 몇가지 의문|차이를 인정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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