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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본 재난영화 속의 두 장면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터져 나오는 용암이 불비로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희열로 가득 차 죽음을 맞는 광인과, 거대한 산도 거침없이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해일이 밀려오는 중에도 담담히 생을 접는 노승. 두 사람은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도취되어, 또 다른 사람은 초월한 듯 죽음을 받아들인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의 죽음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는 없다. 다만 실감하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뒤로 미루길 바랄 따름이다. 생명체인 이상 그 생명을 보전하려는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보려는 순간, 그 아득함이란! 뒤이어 죽는 순간,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온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 있으니 죽음이 없고, 죽은 다음에는 죽었기에 다시 죽을 일이 없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명쾌한 논변조차도 그 두려움을 해소하는 데는 부족하다.
 
그래서 사후세계, 윤회와 같은 죽음 이후의 이야기들이 무성하게 넘쳐나나 보다. 소크라테스를 보라. 죽으면 더 멋진 세상이 펼쳐지리라는 강력한 믿음이 강요된 죽음조차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역사 속의 그 무수한 순교자들처럼.
 
그런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면? 노쇠와 질병, 경제적 어려움 등과 같이 살아나갈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거나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생각할 때, 두려운 죽음조차 그냥 받아 안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 한 할머니께서 “젊은 시절에는 죽음을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살다가, 나이가 들고 보니 ‘자다가 편안히 가는 죽음’을 맞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내세에 대한 믿음도 없고, 죽음으로 회피하고 싶을 만큼 현실적 어려움도 없고, 죽음이 가까이 있다 생각할 만큼 큰 병을 앓거나 늙지도 않은 나는, 지구멸망의 날 천재지변으로 드라마틱한 죽음을 맞고 싶다는 꿈을 꾸곤 한다. 아무튼, 그 영화 속의 광인처럼 -웃으며 죽지는 못할지라도 감동에 벅차- 그 충격적이고 놀라운 광경, 섬찟한 아름다움을 목도하면서 죽음에 이른다면 그 공포스러운 죽음도 덥석 껴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보는 것이다.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의 파편
 

추천서- 야마오 산세이 "더 바랄게 없는 삶" (달팽이)

물론, 내가 지구의 마지막 순간에 죽을 가능성보다는 교통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더 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난 고사하는 식물처럼 죽을 듯하다. 베란다 정원의 화초들이 누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미래를 눈 앞에서 확인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막상 죽음이 임박하면, 괴로운 현실에 종지부를 찍는 마음으로 환영하며 팔을 벌릴 것 같다. 그런데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상상한 것과는 영 딴판인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나의 죽음 역시도 내 예측을 벗어나는 놀라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평소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을 동경해왔지만, 좋은 삶을 충분히 산 후 자발적으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과감히 선택하는 용기는 내 것이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야마오 산세이처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이된 말기암 선고를 받았을 때, 현대의학에 매달린 채 살려고 버둥대기보다는 자신이 꾸리던 일상을 그대로 살면서 차분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때가 되었구나’ 하고 삶에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나고 싶다.
 
죽으면 갈 별로 오리온을 정해놓고 거기로 돌아간다 생각했던 산세이처럼, 죽어 영혼이 별나라로 떠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슴에 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죽음을 ‘삶의 정점’으로,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죽음은 탄생만큼 신비로운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기억할 나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세에 대한 믿음도 없고, 별나라로 떠날 영혼의 존재도 꿈꾸지 않는 나는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죽으면 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거라고. 미생물이 분해한 몸은 식물의 영양이 되고, 그 식물을 동물이 먹고…. 그렇게 자연순환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여행을 떠나리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나무도 되고, 곤충도 되고, 풀도 되고, 토끼, 호랑이, 사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우주의 먼지가 되어 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가겠나’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커져 있는 듯하다. 다들 새로운 바이러스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죽음을 맞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화재로 죽거나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른 질병으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우리가 종종 잊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죽을 수 있다. 어리더라도 죽을 수 있으며, 죽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더라도 죽을 수 있다.

죽음이 갑작스러운 손님처럼 우리 곁을 찾아 드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니, 우리는 그 손님 맞을 준비나 평소에 잘 해두면 된다. 그를 불청객으로 여기지 않고, 언제 어느 때라도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이처럼 죽음을 잘 맞으려면 삶을 얼마나 잘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가겠나’ 하고 오늘을 ‘죽기 좋은 날’로 삼아 삶을 마감하는 인디언의 여유로움도 바로 그들의 삶 속에서 퍼 올릴 수 있다.
 
과연 나는 오늘 하루,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잘 살았나? [이경신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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