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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순환 속에서, 시작과 끝에 대한 사색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벽에는 이미 내년 달력을 걸어두었다. 책상 위 새 달력은 벌써부터 약속과 계획으로 어지럽다. 내 마음과 나의 삶은 시간을 앞서 한참 달려나가 있는 듯하다.
 
12월의 주요 일정을 앞서 마무리해서일까? 일터도 휴가에 들어갔고, 월말 결산도 끝냈고, 우리 집 연말행사도 미리 치렀다.
 
왜 연말과 연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나?
 

[나이 듦에 대하여] © 일러스트_정은

언젠가부터 연말마다 우리 집에서는 한해 10대 뉴스 뽑기를 행사처럼 하고 있다. TV의 연말 10대 뉴스를 보다 떠올린 것인데, 가족 개개인에게, 이웃에게, 그리고 우리 집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되돌아보고, 가장 중요하다 싶은 일 10가지를 추려낸 후 순서를 매겨보는 것으로, 재미나다. 해에 따라 다른 테마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받은 멋진 선물’, ‘나를 슬프게 한 사건’ 등이 그것이다.
 
뉴스거리를 찾는 동안, 한 해를 채운 다채로운 일들에 놀라고 감동하며, 다음 해에는 또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감에 부풀기도 한다.
 
아무튼 이 연말행사는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우리 집의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연말과 연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사실 11월이 12월로, 또는 12월이 1월로 바뀌는 것은 달이 바뀐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고, 또 12월 30일에서 31일로, 또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바뀌는 것 역시도 날이 바뀐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해 마지막 달에서 새해 첫 달로, 한해 마지막 날에서 새해 첫날로의 변화를 다들 특별하게 생각한다.
 
그것을 단순히 심리적 차원에서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오히려 사회의 집단적 시간 리듬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영향 받은, 개인의 심리적 시간체험이 의미를 더하고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분명, 달력을 교체하는 습관만큼이나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은 한 해 12달 단위로 반복되는 순환리듬을 뒤따르고 있다. 어김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한 달, 한 해가 지나간다. 그리고 12달이 되면 새로운 날이 오고,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는 것이다.
 
또, 12달의 기간이 매번 되돌아온다는 것은 그 순환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날, 새로운 달은 더 이상 지나가 버린 날들, 달들, 앞선 해에 속하지 않고, 새 주기의 시작이 된다.
 
이런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사회와 개인이 새로운 해를 맞고 과거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낡은 주기와 더불어 과거를 흘러 보내고, 새 주기 속에서 새로운 각오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고 기대하는 것, 마치 죽어 한 생이 끝나고 다시 태어나 새 삶을 시작하는 것에 견주어도 되지 않을까? 각 순환주기의 끝과 시작에서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퍼 올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사회 속에는 한 해의 끝과 시작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특별한 의식들이 존재한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제야의 종을 치는 것, 연말에 친구들과 모여 ‘망년회’를 하는 것, 그리고 새해 인사와 덕담을 교환하는 것 등.
 
이같은 사회적 리듬에 발맞춰, 우리 집도 12달의 마무리와 12달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시간순환에 동참한다. 연말에는 그동안 긴장하고 집중했던 일도 잠시 놓고 놀이와 휴식의 시기로 접어든다. 10대 뉴스 뽑기도 우리 나름의 한 해 보내기이자 새해맞이인 즐거운 놀이인 셈이다. 무수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한 해의 시간 속에서 몇 가지 기억을 퍼 올려 현재에 담아두고 나머지는 모두 던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홀가분해지고, 새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렌다.
 
자연-우주의 질서와 인간사회 질서의 만남

 

리스트, '순례의 해' Années de Pèlerinage

그런데 달력으로 대표되는 사회집단의 시간리듬이 사계절이나 밤낮의 변화를 통해 느끼는 자연의 리듬이나 우주의 리듬,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리듬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서로 별개는 아니다. ‘한 해’라는 시간의 단위야말로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해가 바뀌는 즈음, 한 해의 주기가 닫히고 다시 새 주기가 열리는 때, 계절의 변화도 비슷한 리듬을 탄다. 흔히들 겨울을 한 사람의 인생에서 노년에 비유하곤 한다. 노년의 정점, 마지막이 죽음이라면, 겨울의 정점은 죽음에 비유할 만하다.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면, 죽었던 만물이 소생하는 부활의 시간을 맞는다.
 
내 몸도 다르지 않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더욱 몸을 움츠리며 쇠약해진다. 12월 중순을 지나면서 활기가 현저히 감소하고 추위로 인해 몸의 통증도 심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이하게 될 때면, 내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생기를 되찾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리듬, 자연의 리듬, 생명의 리듬, 심리적 리듬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려 순환적 시간을 반복하게 된다.
 
죽어 부활하여 생명을 다시 얻는 시기, 끝과 시작이 만나는 시기에, 우리는 우리만의 또 다른 의식을 치른다. 겨울산행이다. 한 해가 끝나고 시작되는 시간을 눈 덮인 겨울 산에서 보내는 경험은 신비롭다. 황량하지만 경이로운 산은 우리에게서 죽음의 에너지를 거둬가고, 생명의 에너지를 돌려주는 것 같다.
 
산행을, 새해를 앞두고 있는 요 며칠 동안, 두 해 사이에 걸쳐 있는, 쭉 늘어난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느낌이다. 죽음을 맞기 직전 얼마 동안 호흡이 느려진다는 그 시간이 이럴까? 새해, 새로운 삶, 평안하게 맞고 싶다. (이경신)   일다는 어떤 곳?

*함께 듣자. Franz Liszt <순례의 해: 둘째 해>(Années de Pèlerinage: Deuxième ann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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