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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뜨개질을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심리적 시간과 물리적 시간의 간격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경험한다.

아침마다 창을 여는 습관을 접고, 닫힌 공간 속에 웅크리게 되는 겨울이 오면, 불현듯 뜨개질 생각이 난다. 뜨개질을 잘해서는 아니지만, 그냥 폭신하고 따뜻한 모자, 장갑, 목도리, 스웨터를 뜨는 광경만 떠올려도 마음은 벌써 훈훈해져 온다.

 
장롱 깊숙이 넣어둔 뜨개바늘과 상자 속에 모아둔 친구의 낡은 티셔츠들을 꺼내 들었다. 작년 겨울처럼 올해도 발판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면 티셔츠를 잘게 잘라 실을 만들고 색깔을 어울리게 배치한 후 실을 연결해 메리야스 뜨기를 하면 나름대로 쓸만한 발판이 된다.
 
심리적 시간과 물리적 시간의 차이
 
뜨개질을 하다 보면 시간이 참 잘 간다. 한참 동안 발판 뜨기에 몰두하다 잠시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려 놀란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가 뜨개질하는 동안 경험한 심리적 시간이 시계로 측정되는 물리적 시간에 비해 더 압축된 것이다.
 
이처럼 재미난 일을 하거나 일을 집중하는 동안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듯 하지만, 지루하거나 강요 받아 억지로 일을 하는 동안엔 더디 가는 느낌 때문에 괴롭다. 그런데 우리가 일을 하고 있을 때와 지난 일을 돌이켜 볼 때는 정반대의 경험을 한다. 흥미로운 일에 몰두한 때는 기억 속에서 시간이 팽창된 느낌을, 따분한 일에 동원되었을 때는 시간이 텅 빈 것처럼 쪼그라든 느낌을 받는다.
 
심리적 시간과 물리적 시간의 간격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게 뜨개질은 정신을 집중시키는, 흥미로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시간이 언제 흘러가 버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쏜살같이 떠나가버리지만, 뜨개질한 물건을 감상하고 있을 때는 풍성함으로 내심 감동에 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정서적 시간체험은 ‘몇 시간, 몇 분이 걸렸다’고 하는 경제적 시간관리와 통하는, 물리적 시간경험과는 분명 구별된다.
 
시간의 공간화와 지속의 체험
 

앙리 베르그송은 연속적인 지속만을 시간의 참된 현실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뜨개질을 해나가는 동안 한 코, 한 코 늘어가는 발판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뜨개바늘을 끊임없이, 나름대로 리듬감 있게 놀리고 있는 내 손의 움직임보다도 한 단씩 길이가 늘어나는 발판에서 흘러 지나간 시간을 의식한다. 이것은 시간을 공간처럼 생각하는 방식이다.

 
베르그송(프랑스 철학자, 1859~1941)은 시간을 공간과 구별하며, 시간의 공간화에 반대했다. 연속적인 지속만을 시간의 참된 현실로 봐야 하고, 지나간 시간을 공간적 궤적처럼 취급하여 시간을 분절시키는 작업은 자유로운 시간체험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시간의 주요 특징들, 즉 단절 없이 흐르는 ‘지속성’과 공간처럼 전후, 좌우로 뒤집을 수 없는 ‘불가역성’을 우리 삶 속에서 직접 체험하고 있다. 태어나서 자라 늙고 죽어가는 내 몸과 정신은 나의 자각과 무관하게 쉬지 않고 변화를 겪어내고 있다. 지속적인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또 나를 포함한 세상이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건 못 하건 변함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시간을 뒤로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발판 뜨기를 잠시 중단한다고 해서 이 세상의 크고 작은 변화들이 중단되는 것도 아니며, 뜬 발판을 모두 풀어서 다시 뜬다고 해서 그 발판이 이전의 것과 똑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순간순간 늘어난 발판의 길이를 눈으로 좇거나 잠시 뜨개질을 멈추어 그 동안 짠 발판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이미 과거가 된 시간을 돌이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이것은 분명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의 지속체험과는 다르다. 한 코가 늘어나고, 한 단이 늘어나는 것으로 흘러간 시간을 파악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계판 위의 초침, 시침, 분침의 이동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 즉 ‘시간의 공간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매 코, 매 단은 동질적인 단위가 아니기에, 발판의 길이와 넓이를 통한 시간체험은 시계의 그것과는 다르기도 하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늘어나는 길이의 속도는 이질적이다. 어쨌거나 발판 하나만큼의 시간이 흘러갔고, 나는 그 발판을 보며 흘러간 시간, 과거의 흐름을 더듬어 본다. 이때의 지속은 흘러가 버린 것을 다시 재구성한 것일 수밖에 없다.
 
순간들로 이어진 지속
 
지속의 흐름에 잠겨있는 것만큼이나 지속을 재구성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시간체험으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베르그송과 달리, 바슐라르(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의지가 개입되는 순간들의 연속, 즉 불연속적인 지속을 생각했다. 흐름,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시간체험만큼이나 행동과 직결된, 타인과 소통하는 시간체험도 중요하다. 여러 순간이 모여 이루어지는 또 다른 지속의 체험으로, 아니, 순간의 체험으로 사색의 중심을 옮겨보는 것도 흥미롭다.
 
뜨개질을 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붉은 실의 단을 짜고 노란 실의 단을 짜는 순간, 목표한 대로 마지막 매듭을 짓는 순간과 같은 여러 의지의 현재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발판이 완성되는 지속체험에 이르는 것. 순간을 ‘지속의 조각’으로 보기보다, 서로 구별되는 순간들의 연결로 ‘불연속적 지속’이 구성된다는 주장은, 행동으로 채워가는 일상 속에서 충분히 공감이 간다. 불연속 없는 지속체험의 자리는 여전히 남겨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현재 순간들로 이어진 지속, 현재 순간은 과거로 가라앉아 기억이 되고, 기대와 희망 속에서 현재 순간은 미래를 향해 열린다. 설레는 마음으로 맞았던, 서로 다른 실이 만나던 순간들, 그 순간들도 이제는 모두 과거의 시간이다. 색색의 실들이 어우러져 얼마나 멋진 발판으로 태어날지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순간들 역시도 과거로 가라앉았다.
 
나를 시간의 사색에 빠져들게 했던 그 발판은 낡은 티셔츠의 주인이었던 친구의 손에 선물로 건네졌다. 그녀는 그것을 대할 때마다 잠깐씩, 각각의 색깔이 이끌고 가는 먼 기억에 빠져들곤 할지 모르겠다. 나는 정성과 시간을 들였던 뜨개질 순간들을 짧은 지속의 사건으로, 행복한 추억으로 품게 되리라. 뜨개질하던 동안 명상하듯 몰두했던 지속체험은 잊게 되더라도. (이경신)
 
* 함께 읽자.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아카넷, 2001)
 
[철학하는 일상 보기] 젊어서 노년을 준비해야 하는 까닭 |  추억하고, 기억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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