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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칼럼’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동성애자 여성의 기록을 담은 ‘Over the rainbow’ 코너를 통해, 필자 박김수진님이 가족, 친구, 동료,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레즈비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이 칼럼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편집자 주

‘Over the rainbow’ 인터뷰칼럼(5)


‘인터뷰 칼럼’의 다섯 번째 손님은 바로 박김수진, '저'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살짝' 내가 나를 인터뷰해서 칼럼을 써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다섯 번째 손님으로 슬쩍 집어넣어 보기로 했어요.

 
인터뷰는 지난 번 ‘인터뷰 칼럼’의 주인공이었던 제 파트너 S씨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S씨에게 “레즈비언인 나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편안하게 물어봐주세요”라고 부탁을 했고, S씨는 훌륭하게 인터뷰를 진행해 주었습니다.
 
S씨가 제게 물었어요. 앞으로 만나게 될 레즈비언 지인들에게 묻게 될 공통의 질문, “당신은 왜 레즈비언이에요?”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 것이고, 그럴 경우 그것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여성잡지 <레이디 경향>을 통해서 '여성인데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을 '레즈비언'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레즈비언'이고 싶어서 몸부림을 친 것이 아니라, <레이디 경향>에서, 사회에서 날더러 '레즈비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저는 '레즈비언'인 것이지요.”
 
S씨가 또 제게 물었어요. “그 이름(레즈비언), 썩 마음에 드나요?”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필요하니 가져다 사용하는 것이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그런 구분이 없는 세상이라면, 그런 구분이 아무짝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런 구분이 명확한 사회에 살고 있으니 일정부분 그 이름이 필요한 거죠.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법한 사람들의 처지가 별로 좋지 않으니, 처지 개선을 위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도 그 이름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 질 때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도 아닌 그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게 뭐 그리 썩 마음에 들겠어요. 그렇지만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다면, 하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그와 같은 낱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레즈비언'이라는 낱말이 ‘과잉 정체화’다 뭐다 하면서 뭐라고 하던데, ‘장애인/장애여성’, ‘여성’, ‘노동자/여성노동자’, ‘빈곤여성’ 등의 개념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면, ‘레즈비언’이라는 낱말이 왜 필요한지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해요. ‘레즈비언’ 개념에 있어서 유난히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S씨가 물었어요. “자기는 다음 생애에도 다시 레즈비언으로 살고 싶어요?”
 
“만일, 환경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이번 생애에는 레즈비언으로 살았으니, 다음 생애에는 마음 편하게 이성애자로 살고 싶어요. 만일, 환경이 변해서 동성애자고, 이성애자고 하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라면, 다시 레즈비언으로 살고 싶어요. 아, 물론 상대가 배용준이라면 게이로 살든, 이성애자로 살든 상관없이 그를 선택할 것이고요.”
S씨가 제게 물었어요. “겨울연가 찍으시게요?”
 
참고로, 저는 배용준의 팬입니다. 뒤늦게 드라마 <겨울연가>를 시청하고는 배용준에게 빠져서 하루에 한 번씩 배용준 공식 홈페이지에 방문하고, <겨울연가> DVD를 구입하고, 툭하면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유명한 남이섬과 외도를 방문한답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는 배용준을 좋아하는 아니, 호감을 갖고 있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어서 홀로 외롭게 팬심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지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S씨가 제게 물었어요. “자기는 20대 중반에 레즈비언 인권운동을 시작했잖아요.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원동력이요? 원동력은 나의 암울한 10대 시기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다른 레즈비언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동성애자 지인 한 두 명은 봤다고들 하던데, 나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거든요. 그저 <레이디 경향>의 ‘집단 섹스하는 레즈비언들’에 관한 기사를 통해서만 레즈비언을 봤죠. 굉장히 예민한 시기인 10대 시기에 아무런 정보도 접할 수 없는 상황에 나 자신이 놓였었다는 것, 일정 정도의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편견이 가득한 정보를 접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10대 시기의 누군가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10대 시기를 보내게 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내가 그런 시기를 왜 보냈어야 했나를 생각하면서 화가 났고, 그래서 뭔가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일종의 분노 에너지였죠. 분노 에너지.”
 
S씨가 제게 물었어요. “스물여섯 살 이전에는 그 분노 에너지가 없었나요?”
 
“스물여섯 살 이전에는 그런 분노 에너지는 없었어요. 레즈비언 커뮤니티를 처음 만나면서 놀라움과 호기심, 이런 감정들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과거에 내가 처했던 상황이 부당하다거나 억울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저 ‘힘든 시기를 지내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죠. 스물여섯 살에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되면서, 갑자기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고 생각을 했는지 그 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터져 올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당위’, ‘의무’ 이런 것들에 의미를 두면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활동을 하는 동안 별로 즐겁지 않았는데도 그런 에너지로 해왔던 것 같아요.”
 
S씨가 제게 물었어요. “1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활동을 했잖아요? 뭔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아요?”
 
“네.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요. 그 변화는 ‘바지씨’든, ‘치마씨’든, ‘동성연애자’든, ‘레즈비언’이든, ‘게이’든 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 온 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 기반 위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1993년을 시작으로 조직된 활동단체들, 그 단체들에서 활동한 수많은, 셀 수 없이 많은 활동가들, 회원들에 의해 중요한 변화들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그 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동성애자의 존재를 드러냈다는 것, 대단히 추상적으로만 존재해왔던 동성애자들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했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동안 일상에서,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해 온 많은 사람들이 이룬 성과들도 있고요. 커뮤니티가 성장한 것만 봐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질과 양만 봐도 변화를 느낄 수 있죠. 아직도 많은 레즈비언, 게이들의 현실에 있어서는 피부에 와 닿는 변화들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과거에 비하면 정말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죠.”
 
S씨가 제게 물었어요. “자기는 10년 동안 해왔던 활동들을 정리했잖아요. 그 이유는 뭐에요?”
 
“내가 레즈비언 이슈를 내 인생에 있어 너무 큰 범위를 차지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레즈비언 이슈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슈에 내가 짓눌려버린 느낌이 들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말이 10년이지, 절반은 분노 에너지를 가지고 잘 해냈다고 생각하고, 절반은 그저 의무감, 당위 이런 것들로 운동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운동이 즐거울 리 없고, 다루는 주제들이 워낙에 무거운 이슈들이니 기운이 금방 빠져 버린 거죠. 게다가 나는 성격상 조직형 인간이 아니어서 결국 ‘나는 역시 개인플레이가 맞는가보다’고 결론내리면서 활동을 접었어요.”
 
S씨가 제게 물었어요. “자기의 분노 에너지는 지금은 어떻게 되었어요?”
 
“사라졌어요. 서른한 살이 넘어가면서부터 분노 에너지가 사라졌어요. 개인적인 고민들이 생기면서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이를테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사나?’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하더니, ‘다른 삶’, ‘즐거운 삶’, ‘재미있는 일들’ 이런 것들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만일 내가 그 분노 에너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면, 내 인생은 피폐해졌을 거예요. 왜냐하면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많거든요.
 
똑같은 레즈비언 이야기를 해도 다른 방식으로, 나 자신에게도 에너지를 주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즐거워야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도와달라’, ‘살려달라’는 레즈비언들이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즐겁게만 할 수 있는 운동을 꿈꾸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저 개인적으로 운동방식의 변화를 시도할 시기를 맞이했다는 의미에요.“
 
S씨가 제게 물었어요. “그럼, 앞으로 개인적으로 활동을 해나갈 텐데, 개인적으로 한다고 생각하니 좋은 점은 무엇이에요?”
 
“내가 조직형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은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나 스스로 만든 것이 일단은 참 기뻐요. 단체 활동은 아무래도 사업을 기획하면 약속한 기한 내에 성과를 내야하고, 계획주의자인 내 성격과 달리 시급하게 벌어지는 일들에 에너지를 분산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죠. 이제 그런 부담을 없애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과제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서, 천천히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과제에 있어서도 레즈비언 관련 이슈뿐만 아니라, 내가 평소에 관심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이슈들에 관한 일들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어서 기뻐요.”
 
S씨가 제게 물었어요.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데요?”
 
“나는 정말 기록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의 모든 것들을 기록하면서 지내왔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다>의 ‘인터뷰 칼럼’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나에 관한 기록, 내 지인들에 관한 기록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록활동을 해나가고 싶어요. 그 기록이라는 것이 대단한 기록이 아니라, 내 일상의 소소한 모든 것들, 내 지인들의 소소한 모든 것들을 기록하는 그런 기록이에요. 다양한 주제들을 다양한 방법, 버전으로 기록하고,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계획이에요.
 
그리고 지금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학교에서 배운 것을 활용해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이슈들,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의 이슈들을 찾고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건 굳이 연구소에 취업을 하고, 학회에 논문을 써서 내고 하는 따위의 일들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주제와 형식으로 내 스타일에 맞게 조사와 연구를 하겠다는 의미에요.”
 
S씨가 제게 물었어요. “레즈비언이어서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을 텐데, 혹시 레즈비언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던, 레즈비언이어서 배울 수 있었던 것들, 좋았던 것들이 있나요?”
 
“친한 동생 두 명이 있는데, 그 애들을 만나면 내가 자주 듣는 말이 하나 있어요. ‘저 인간은 레즈비언이 아니었다면 정말 못 봐줄 사람이 되었을 거야.’ 이 말이 무슨 의미냐면, 나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보수적인 사람인 거죠. 그 점을 그 동생들이 항상 저렇게 표현을 하면서 저를 비난하는 거예요.”
 
그러자 S씨가 제게 말했어요. “알죠. 내가.”
 
“예를 들기는 참 민망한데, 많은 부분에서 나는 너무 보수적인 것 같기는 해요. 만일 내가 레즈비언이 아니었다면, 맑스나 푸코 같은 학자들에 매료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며, 사회의 소수자에 관해서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내가 다른 사람들,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레즈비언이라는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레즈비언이 아니었다면, 사회 문제에는 완전히 무관심하면서 그저 돈이나 많이 벌고, 성공해서 사회적 지위나 명예 따위에나 관심을 가지고 사는 그런 성공지향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거예요. 물론, 가끔은 레즈비언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돈도 많이 벌고, 살 만 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워하기도 하죠.” (여러분, 맨 마지막 문장은 농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S씨가 제게 물었어요. “일다 ‘인터뷰 칼럼’에 무슨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인터뷰한 글을 싣기로 했어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지내왔어요. 인터뷰를 많이 했죠. 그런데 이번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양한 인터뷰이 중 한 명으로 나를 자연스럽게 하나 밀어 넣어봐야겠다.’ 나를 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시키는 것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S씨가 제게 물었어요. “해보니까 어때요?”
 
“역시 이런 식의 인터뷰는 ‘수박 겉핥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식으로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지인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다니요. 너무 단편적인 내용들을 듣고 소개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네요. 마음에 안 드네요. 하지만 나의 가족들, 지인들에 관한 인터뷰를 또 다른 방식으로 기록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죠. 1시간 정도 이야기를 하기는 했는데,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도 한 번 잘 써봐야지요.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요.”
 
이번엔 제가 S씨에게 물었어요. “나를 인터뷰한 소감이 어때요?”
 
“들었던 이야기들인데도, 이렇게 인터뷰 형식으로 하니까 새로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나도 자기를 계속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궁금한 것들도 생기고. 그리고 운동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분노 에너지를 가지고 운동했던 시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자기 눈에서 광선이 나오는 것을 봤어요. 나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 인터뷰를 더 많이, 자주 해봤으면 좋겠고, 그래서 자기에 관한 기록을 더 많이 남겼으면 좋겠어요.”
 
레즈비언 인권운동단체 두 곳에서 활동을 해 온 10년 동안, “레즈비언들의 현실에 관해 말씀해주세요”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대답하면서 지내왔어요. 제가 참여한 인터뷰라는 것이 대부분 저런 것이었죠. 이번에 <일다> ‘인터뷰 칼럼’을 통해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생각, 내용들을 말하는 인터뷰이의 역할을 해보았어요.
 
멍석을 깔면 돌이 되어버리는 제 성격상 그 동안 개인적인 내용의 인터뷰를 제안한 친구들의 청을 꾸준하게 거절하면서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 형식으로 제 이야기를 해보니, 나에 관한 다른 방식의 기록을 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고, 재미도 느껴지는군요. 물론, 여전히 멍석을 깔아 놓으니 매우 개인적인, 그래서 더 흥미로울 이야기들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리 되어버렸지만요. 앞으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다음 ‘인터뷰 칼럼’을 시작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레즈비언들을 만나 볼 계획입니다. 그녀들을 인터뷰하면서, ‘또 다른 나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듣고, 그녀들 앞에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보따리도 더 풀어내 봐야겠습니다. (박김수진) [관련 칼럼 보기->] 트너와 나, 우리가 사는 이야기 | 긴 터널을 빠져 나온 엄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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